2023년 08월 24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7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8 “네가 누구에게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9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10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13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14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The Message

Invite some people who never get invited out, the misfits from the wrong side of the tracks(13절).

 

주석

12-13절. ‘이것은 하지 말고, 저것을 하라’는 식의 표현 방식은 때때로 ‘(단지) 이것만 하지 말고, (또한) 저것도 하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여기서 정죄하시는 것은 주로 손에 잡히는 세상적인 보상을 위해서만 선을 행하는 태도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7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아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이 있었다. 

그 집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자리,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이 마뜩치 않았다. 

그래서 수종병을 고친 이후에 비유의 말씀을 전하신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 더 존경 받는 사람이 올 수도 있다. 

어차피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경우에야, 그저 평범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좋다. 

주인이 필요하면, 자리를 옮겨주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창피를 당할 수 있다. 

이것은 초대받은 사람의 태도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대받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초대한 호스트의 태도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신다. 

그것은 초대 리스트를 적을 때, 아는 사람, 부유한 이웃만 부르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도리어 앞으로 갚을 일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신다. 

 

14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사실 이런 정도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큰 메시지에 비하면 비중에 작다고 볼 수 있다. 

잔치에 누굴 초대하는가의 문제, 잔치 자리에 어디에 앉을지에 대한 문제는, 한 개인이 구원을 받거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큰 관련이 없어보인다. 

지혜로운 처신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한 편으로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이 선대받는 곳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자신 스스로 높이려는 자들은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동의해서 높이게 되면, 높아질 것이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이건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원칙이라기보다, 이런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생생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부르심의 기준은 먼저 신앙 생활을 했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기실 하나님 마음이다. 

늦었지만, 겸손한 자를 찾으시기도 한다. 

예수님는 스스로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도 하셨다. 

 

둘째, 보상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14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사람에게서 보상을 바라는 태도는 자칫 실망과 미움을 낳는다. 

보상을 바라고 선하게 대하려는 태도는 그 행위 자체는 귀하지만, 동기가 바르지 않다.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선한 행동과 행위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보상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리고 그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하는 그 때,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이뤄진다. 

하나님은 멋진 축하의 말씀을 해주시고,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실 것이다. 

재림 신앙, 소명 신앙, 보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재림 신앙이다. 

부르신 분은 한 분이시며, 그분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소명 신앙이다. 

사람에게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께 듣는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믿음이 보상 신앙이다. 

이 세가지 신앙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태도다. 

 

열심히 사역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실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겸손히 재림 신앙, 소명 신앙, 보상 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묵묵히 부지런히 살아갈 일이다.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자녀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저녁 시간을 더욱 지혜롭게 알차게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 

방법이 없을까? 

피곤한 육체와 정신을 어떻게 이기고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겸손히 주님께 물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잘 간직하게 도와주세요. 

마음 속에 두고, 때로는 외우고, 때로는 사용하면서 살게 해 주세요.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저의 소명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해 주세요. 

주님께만 칭찬듣겠다는 생각으로 일하게 해주세요.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즐거움에 동원하지 않도록 

자녀들의 삶 그 자체를 깊이 긍정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22일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35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The Message

Jesus said, “Tell that fox that I’ve no time for him right now. Today and tomorrow I’m busy clearing out the demons and healing the sick; the third day I’m wrapping things up(32절).

 

주석

32절. 고대에 어떤 사람을 ‘여우’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교활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대신 그 사람이 쓸모없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믿을 수 없거나, 아니면 파렴치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말일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기서 헤롯에게 뜻밖의 인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 좀 더 적절한 핵심은, 여우는 기회가 닿으면 암탉을 약탈한다는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고를 준다. 

얼핏보면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두 가지 다 가능하다. 

1. 예수님을 보호하다. 

2. 예수님을 위협하다. 

예수께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알려줌으로써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제법 예수님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에 위협을 가하려고 알려 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더이상 예수의 활동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사람들이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떠나 달라는 것이 그들의 핵심 메시지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호했다. 

자신이 갈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포부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 

하나님 나라의 그 길을 끝까지 걷겠다고 하신다.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다. 

원래부터 죽음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배워야 한다. 

자신의 욕심과 습관을 밀어부치는 것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소명을 따라 살아간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의 삶의 태도다.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기 위해 달려갔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태도다. 

한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다. 

그 한계에 대해 너무 과대 해석하지 말자. 

사람이 어찌 한결 같을 수가 있는가! 

대의를 위해 살다가도, 가족들 앞에서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혹 그런 한계를 느끼더라도, 지금 이 순간 소명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용기 있게 기도하고 결정할 일이다. 

하나님 나라 위해 애써왔던 시간들을 후회하지 말자. 

소명을 위해 결정했던 숱한 순간들을 섭섭해하지 말자.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품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왕권만을 생각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까지도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품고 싶어하신다.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을 품기 위해 이방인을 품으신다. 

이스라엘의 원래 소명을 이룸으로써 유대인들이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또 주신다. 

이스라엘이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뜻 안에 이 모든 것이 들어있다. 

 

주님의 오랜 인내의 사랑을 다시 느낀다. 

그분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사랑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그런 사랑으로 대하신다. 

그분의 품 안에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해 주신 하나님, 

주님의 사랑 덕분에 저에게까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발적으로 주되심을 인정하도록 기다려주시는 예수님, 

시간이 더디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도와주소서. 

 

오늘 만나는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하소서.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도우소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지혜롭게 감당하다록 도우소서. 

특히 교회 수련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일을 미루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19일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22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25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27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30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The Message

Put your mind on your life with God. The way to life—to God!—is vigorous and requires your total attention(24절).

 

주석

26-27절. 닫힌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또 그분이 자기들을 가르치셨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라고 부르신다. 이로써 이 비유는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기독교 전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체 단락의 청중을 암시한다(IVP 성경비평주석).

 

29-30절.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의 문맥에서 보면, 요점은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메시아의 잔치에 기대어 있는 자들이 되며, 거기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던 많은 사람은 배제되리라는 것이다. 동서남북이라는 말은 ‘모든 곳’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전문맥에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새들의 안식처가 된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한다. 

얼핏보면 하나님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듯 싶다.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에 대해, 그 나라에 실제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큰 나라일까? 

그 나라의 인구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 

그 나라에는 누가 들어갔는가? 

등의 질문이 맴돌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러 성읍들을 두루두루 다니신다. 

어느 마을에 가니, 한 사람이 묻는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예수님은 예/아니오로 대답하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갑자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신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은지 많은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리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수가 많다고 말씀하신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구원 개념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입성”이다. 

구원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구성원이 되느냐의 문제다.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육을 가진 존재 자체의 구원이며, 새롭게 조성되는 피조세계의 구원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문이 닫히면 아무리 두드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의 선택에 의해 찾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 원하는 현실의 넓은 문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함정이다. 

 

좁은 문은 불의와 거리가 먼 문이다.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 앞에서 먹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길거리에서 들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등장한다. 

문이 닫힌 뒤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서 선처를 바라지만, 기회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갔었다. 

불의를 거부하는 좁은 문은 피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정말 적은가? 많은가? 

예수님은 그 수에 많고 적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이 순간의 참석자들 중에도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계, 주의다. 

불의로 점철된 넓은 문을 피하고, 정의로운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좁은 문을 선택했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었다. 

그들의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좁은 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입성했다. 

 

우리도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들, 그리고 대부분의 문은 좁은 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는 방법이다. 

그 좁은 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과 성령님의 인도일 것이다. 

그것이 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사람들이 다 선택하는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야 한다. 

 

나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있나? 

 

 

[오늘의 기도]

의로우신 예수님, 

주님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불의, 불법, 편법, 속임으로 가득한 넓은 문이 아니라, 

정의, 희생, 공평, 정직으로 속이 꽉찬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모든 선택을 바르게 할 수는 없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17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11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12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15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NRSV

And just then there appeared a woman with a spirit that had crippled her for eighteen years. She was bent over and was quite unable to stand up straight(11절).

 

주석

15-16절.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그날의 의미에 대해 논하신다. 예수님은 몸이 불편한 여자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다.’ 이 여자는 “약함의 영(spirit of weakness)”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악한 영을 가리킬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8년된 병자가 등장한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는 중에 병자를 발견하셨다. 

가르치시다가 병자를 보시고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신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손을 얹으셨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계셨다. 

18년된 병자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시지는 않았겠지만, 곧바로 그녀를 고쳐주신 것은 아니다. 

재구성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모세 율법의 십계명을 강론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인지, 그 그본적인 뜻이 무엇이고, 그 안식일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며,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한다. 

쉼은 6일간의 창조를 관조하며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쉼은 6일간의 창조를 통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주일은 새창조의 강력한 증표인 부활을 기념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념한다. 

기념일로서 주일은 단순히 안식일의 쉼의 의미를 넘어선다. 

안식일로서의 쉼이 아니라 기념일로서의 쉼이 더 크다. 

주일은 단순히 쉼이 아니라 크게 기뻐해야 할 기념일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쉼에는 회복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 

안식일은 그냥 아무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니라, 쉼을 통해 몸과 마음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임을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 가르침 중에 병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를 회복케 하는 것이 자신의 가르침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신 것 아닌가? 

 

이 모든 과정을 탐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회당장이었다. 

회당장 야이로는 지난 번 딸 아이 치료 사건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회당장은 예수님이 별로라고 생각한다. 

가르침은 그렇다고해도, 안식일에 여인을 고친 행위에 대해서 회당장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회당장으로서 반드시 지켜왔던 일에 대해 도전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정체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가르치는 데 있다. 

회당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왔고, 훈계했고, 때로는 화를 내며 잘못을 지적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임무다. 

어떤 누구도 율법을 어길 수 없으며, 어떤 누구도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 없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범주를 어겨서는 안된다. 

그나마 이 회당장은 정직한 사람이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할 생각으로 음모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직접 화를 내고 논리적으로 따진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상당히 권위있는 말투로 예수님을 나무란다.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단박에 그를 위선자로 몰고 가신다. 

안식일에 동물들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왜 사람의 회복에 대해서는 나몰나라하는지 질타하신다. 

18년이나 사단에게 고통받는 한 여인을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에 꼭 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제 안식일 규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재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틀로 안식일을 재규정해야 한다. 

이런 변화들에 사람들을 기뻐하기 시작한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현실 파괴자이다. 

전통과 관습에 매여 있지 않으시다. 

 

전통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을 때로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혁신주의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때로 매우 불편하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지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나 저러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신다.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신다. 

 

하나님 나라 사역자들이 하는 일이 그런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들을 설파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도 일어난다. 

 

윤석열 정부를 보면 점입가경이다. 

광복절 기념사는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또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북한과는 대화를 끊고 한미일 공조만 강조한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고, 독도를 자기 땅으로 주장한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일본과는 가치를 공유하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광복절 기념사에서 말이다. 

 

참 답답한 일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십니다. 

이제 안식일은 주님을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날로 바뀝니다. 

변화를 만드신 주님, 

혁신을 이끄시는 주님, 

필요한 변화와 혁신이라면 그 일이 일어나도록 이끌어 주소서. 

 

저 개인에게, 공동체에게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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