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08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아,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3 동서 남북 사방에서, 주님께서 모아들이신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4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5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8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9 주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을 실컷 마시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셨다.

 

ESV

Let them thank the Lord for his steadfast love, for this wondrous works to the children of man!(8절)

 

주석

구속의 사랑(2절) 이 시 전체를 통해 언급되는 ‘인자하심’은 자신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여호와의 헌신적이고 변치 않으며 사랑 많은 결의를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주님의 인자하심은 그가 선택하신 이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2절). 주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길을 잃어 헤매는 이들을 바른길로 걷게 하십니다(4-7절). 그것은 그 백성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에(6절), 주님이 신실하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절). 시인은 이러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주님을 높입니다(8절).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도 합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라는 경제적 문제, 방황과 무기력이라는 마음의 문제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부르짖음에 신실히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이 세상의 고통의 현장에 임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시편의 말씀은 달콤하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예수님에 대한 신약의 저자들의 인식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은 대적의 손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광야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도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물과 먹을 것을 공급하신다. 

우선적으로 출애굽 상황이 그려진다. 

이집트 군대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다. 

광야에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교제하셨다.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셨다. 

출애굽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시인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실 시편의 저자라고 불리는 다윗의 삶이 이런 삶이었다. 

사울이라는 대적자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먹을 물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구원하셨으며, 그러하기에 그는 찬양을 그치지 않았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도 재현된다. 

백성들을 사단의 손에서 구출하신다.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먹을 물을 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다. 

그분은 구약의 하나님을 빼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들 대신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사건이다. 

누군가는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신명기 21장에서도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사야에서 예언하기를,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셨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 53:6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래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것은 신학적 진술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아니다. 

억지로 부들부들 떨면서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십자가 위에 쏟아붓고 계신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그것은 오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확증하기 위해(로마서5:8) 십자가를 사용하셨다. 

다른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신할 뿐이었다. 

온갖 좋은 것으로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땅과 그 소산을 주고, 평화롭게 살게 해도,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길을 갈 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는 사람은 너무 드물며, 그나마 완전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모두들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아는 것에는 반나절이 걸리지 않는데, 그분이 사랑스러운 분으로 아는 데는 인생 전체가 걸려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의 최후 수단, 오랫동안 남겨 두었던 그 수단은 바로 자신이 사람들을 대신 해서 죽음으로써, 사람들이 져야할 저주와 죄의 징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은 바뀔 것이다. 

그래야 성령님은 더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성령님의 활동 환경을 우호적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강력한 작동이었다. 

십자가 덕분에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함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했다. 

십자가 덕분에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넘나들며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

성령님은 자신을 의지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기가 어려운 분이시다. 

성령님은 민감하시고 예민하신 분이시면 사람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속에서 굳이 적극적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시며, 대리통치자였던 사람들의 위치를 귀하여 여기신다. 

성령님은 당신을 우호적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갖고 성령님을 적극적으로 초대하여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받는 새로운 존재 말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이 여기서 진실이 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의 영향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인도 받기를 즐겨한다. 

쾌락에 노예가 되지 않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그것이다. 

지식도 논쟁도 그친다. 

그분의 사랑이 남아 나를 이끄신다. 

일상의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이 눈에 들어온다. 

성령님의 섬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적인 세계의 문을 연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면 더욱 더 찬양이 깊어진다. 

선하고 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렇게 찬양을 선포한다. 

 

[오늘의 기도]

십자가에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 

저주와 진노 이전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저는 믿습니다. 

그 사랑에 기대어 주님께 찾아갑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람의 말보다 필요한 것이 당신의 도우심입니다.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도우심으로 채우소서. 

 

소통을 위해 말하라고 재촉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는 당신의 손길입니다. 

저를 통해 당신의 손길이 느껴지도록 인도하소서. 

 

섬세하신 성령님,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수 많은 쾌락의 유혹들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음성과 사랑에 기대고 싶습니다. 

주님,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 제 마음을 채워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3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너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2 그에게 노래하면서, 그를 찬양하면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여라.

3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4 주님을 찾고, 그의 능력을 힘써 사모하고, 언제나 그의 얼굴을 찾아 예배하여라.

5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생각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7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8 그는,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그가 허락하신 약속이 자손 수천 대에 이루어지도록 기억하신다.

9 그것은 곧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요, 이삭에게 하신 맹세요,

10 야곱에게 세워 주신 율례요, 이스라엘에게 지켜 주실 영원한 언약이다.

11 "내가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물려줄 기업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석

이삭에게 하신(9절) ‘하신’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자르다’(cut)는 의미로, 공식적 언약 제정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다(IVP 성경주석).

율례(10절) 변치 않는 헌신을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가 하신 일들을 전하라고 촉구합니다(1-2절). 주님을 찾아 예배하고, 그의 능력을 사모하며,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3-4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은, 맺으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허락하신 약속을 아브라함에서 수천 대가 지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8-10절). 하나님은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11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성취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야기가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아브라함의 소명이 곧 이스라엘의 소명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갈 3:7) 우리의 이야기와 소명입니다. 내가 기억해야 할 주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 약속의 성취를 신뢰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시편의 직설적 명령이 맘에 든다. 

크게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감사하라, 찬양하라, 예배하라.

시인의 존재에서 터져나오는 저 명령에 정신이 확 든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이 그분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다. 

이것 저것 재지 않고, 이리 저리 머리 굴리지 않고, 그저 그분의 영광과 성품을 찬양하고 경배한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적 행동이 되어야 한다. 

예배적 존재, 경배적 존재.

단순히 생존을 넘어선다. 

본능적 욕구를 넘어선다. 

식욕, 수면욕, 성욕을 넘어선다. 

 

1. 기억하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이 행하셨던 이적, 그분이 내리셨던 판단. 

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기억하는 것이 찬양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기억의 종교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든지, 혹은 마음을 비우든지 하는 수행이 핵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 판단으로 실제 행한 일이 무엇인지 기억해 내는 것이 핵심이다. 

기독교와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다. 

기독교와 성경의 역사성은 밀접하다. 

성경의 뼈대는 역사서다. 

히브리 민족의 구원 역사, 이스라엘 백성의 대안적 나라 건설의 역사, 그리고 인류 구원의 역사… 

그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 기억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에 놓여 있다. 

기억에 없는 신을 찬양할 수 있는가! 기억에 없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가!

 

성경을 통독하고 매일 말씀을 읽는 것도 우리의 기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함이다. 

매 사건마다 그분이 하신 판단에 대해 듣는 것, 

매 예배 때마다 그분이 하신 이적과 기적에 대해 듣는 것, 

무엇보다 매 찬양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인류 구원의 놀라운 기적에 대해 듣는 것, 

이것이 기억의 종교 기독교의 중심이다. 

 

감동이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그것이 없다해도 일단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기본은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니, 매번 예배 때마다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다. 

시간이 들더라도 그분의 판단을 면밀히 살펴보고 기억하는 것, 

우리의 뇌 근육을 풀어서, 신경 세포들을 활성화해서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예배 때 일어나야 할 일들이다. 

 

2.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특히 사람들과 하셨던 언약, 약속, 결정, 합의, 논의를 세밀하게 기억하신다. 

그 때의 감정과 생각까지도 다 기억하신다. 

그 기억이 하나님의 판단과 행동의 근간을 이룬다.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그 스스로 증명하신다. 

아담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신다. 

모세, 다윗, 솔로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의 약속을 기억하신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하신다. 

그 분 스스로 이 땅 위에 오신다. 

사람들을 살리시고 귀신을 내쫓으신다.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그렇게 사단의 권세를 깨부수신다. 

더이상 사단은 권위와 권세는 깨지고 만다. 

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짓말과 위협이다. 

 

그리고 다시 약속을 주셨다. 

다시 오시겠다고. 

언젠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속에서 역사하신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그분의 성품을 닮아 우리도 언약에 더욱 성실하게 살아간다. 

신실하신 분, 믿을 만한 분, 의지할 분을 닮아 우리도 더욱 신실하게, 믿을 만하게, 의지할 만하게 살아간다. 

 

명절 연휴.

다른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 

쉬는 것이 도가 지나쳐 몸을 망치지 않아야 한다. 

쉼은 회복을 위한 것이지, 몸의 흐름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당신의 생각, 판단, 일, 이적… 이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습니다. 

제 기억을 새롭게 하소서. 

저는 기억이 세밀하지 못합니다. 

자꾸 잊어버립니다. 

이름도 까먹습니다. 

사건도 잘 기억 못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역사의 순간 순간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더욱 기억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더 기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신을 더 기억하고 싶습니다.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6. 27.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5:7-20] 

7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보십시오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여러분도 참으십시오마음을 굳게 하십시오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형제자매 여러분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보십시오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앞에  계십니다.

10형제자매 여러분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 삼으십시오.

11보십시오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하늘이나 땅이나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다만, “” 해야  경우에는 오직 “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G7 정상회의 & J12

최근 G7 정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위기와 기후 위기 앞에서 서방세계의 리더격인 나라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1975년부터 매년 모였던 G7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가 회원국가입니다. 세계적인 군사, 경제 선진국이며,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모임에 한국이 초대받아 갔는데,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의 위상을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 위기 극복과 탄소중립을 위한 미래 산업의 선두 주자로 한국을 그들의 동반자로 여기게 것입니다. 세계적인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고 한국에게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개발도상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세계로부터 원조를 받으며살아가는 것이 어찌보면 편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의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일에 동의를 하고 전세계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살펴나가야 합니다. 한국의 뉴스 아니라 전세계 뉴스를 적극적으로 비판적 발전적으로 읽고 듣고 의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세계 리더 나라의 국민이 가져야 태도죠. 위기 속에서 한국은 리더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돕는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우리를 부르는지, J12 모임에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언제까지?(7-12)

- 야고보의 당부와 한계 

온갖 내외부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야고보의 마지막 당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참으십시오

저는 말을 듣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 언제까지 참으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주님이 언제 오신단 말입니까? 코로나 사망자 수가 391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건 공식 통계치이지 연구기관에 따라서는 숫자에 2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기후위기는 점점 우리 주위로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이상 고온 현상과 무자비한 태풍과 폭풍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통제할 없는 자연의 역습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전쟁과 이로 인한 기아와 난민수많은 고통이 지구 상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세게 들립니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인류가 겪는 고통의 소리가 전달됩니다. !! 언제까지 참으란 말입니까? 

 

이것이 솔직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처음 읽은 수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 속에 계속 메아리치는 소리는 바로 소리였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마음의 소리를 가라앉히고,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 농부 

야고보는 농부의 예를 듭니다. 

저의 아버지는 작은 농부셨습니다. 주인이 관리하지 않는 , 거의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 없는 중턱에 매일 올라가 고랑과 이랑을 파고 물길을 만들고 방울토마토, 고추, 상추, 배추, 가지, 호박,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셨습니다. 마석 아버지 집에 다녀올 때마다 그동안 키우신 채소들을 얼마나 바리바리 주시는지, 결국 이상을 장인장모님께 드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태풍이 올라와서 그동안 자랐던 온갖 작물들이 망신창이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안따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날 밭에 가셔서 나무가지로 지지대를 세워 넘어졌던 작물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떠내려간 것들도 많았고, 물이 넘어 많아 섞은 것도 있었지만, 살릴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려서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서 밭을 망가뜨렸다는 겁니다. 밟고 지나가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망가진 것들은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자주 겪는 일처럼 익숙하게 열매가 맺히고 먹을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가꾸시고 돌봤습니다. 

 

농부는 기다릴 압니다. 그러나 온라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설교문을 쓰기 위해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컴퓨터가 너무 느린 겁니다. 커서가 멈춰서 몇초간을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짜증이 몰려 옵니다. 순간 핸드폰을 집고 다음 뉴스를 검색합니다. 10초의 짧은 시간도 기다리게 하는 컴퓨터가 아주 짜증스럽습니다. 하지만, 땅의 소출, 밭의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들은 기다릴 압니다. 하루 하루 별로 자라는 같지 않은 농작물을 보면서 매일 기다립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농부의 태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부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 예언자들 그리고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기다렸는지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받았던 구약의 이사야, 미가, 예레이먀, 에스겔 등의 많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메시아 만나기를 고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몇백년이 지난 후에 메시아 예수님이 오셨죠. 

 

참고 견디는 데는 욥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참고 견뎠습니다. 재신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자녀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잃었습니다.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복시킬 것을 소망하면서 참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에서 인내의 대명사 격인 대표적인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참고 견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 

언제까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견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시련도 이겨내고, 내부의 시험도 통과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최소한 야고보는 대목에서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오지 않으셨거든요. 2천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니 답답합니다. 농부의 마음과 태도도 이해가 되고, 구약의 예언자나 욥의 태도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2천년은 너무 오랜기간이라 뭔가 아리송합니다. 

 

=> 한숨과 소망 

정말 야고보의 말은 소망을 주는 같지만 편으로는 한숨만 나오게 합니다. 도대체 주님의 재림은 언제쯤 일어난단 말이야.. 이런 한숨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나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은 언제든지 죽습니다. 죽음 다음은 그분의 재림이며 심판입니다. 죽음은 통제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갑작스럽게 죽든 병에 걸려 천천히 죽든 죽음을 피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장수마을의 최장수 할머니도 150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그분의 재림의 순간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재림은 개인에게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 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대 교회 야고보 시절 그리스도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기다림의 시간의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100년이 안됩니다. 인생의 기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 기다리는 방법_찬양과 기도(13-18)

야고보는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바로 기도와 찬양입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기다리다보면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야고보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즐겁고 기쁜 순간에는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을 향한 행동입니다. 기도나 찬양이나 인생의 굴곡에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1) 고난 기도(13)

먼저,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상의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을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외부적 환경 때문에 내면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일들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국제 경기 때문에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이것도 고난입니다. 돈이 충분치 결혼을 미루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 그것도 엄청난 고난입니다. 군대에서 겪는 수많은 수모도, 직장에서 겪는 숱한 어려움도 고난일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일상적 고난 아니라 현대사회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아니라 초림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사역하시다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말이죠. 이게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2)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14-15) 

둘째,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병든 시기는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병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병의 원인을 알게 해달라고, 좋은 의사와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게 달라고, 환자의 생활 습관이 바뀌어 병이 온전히 치료될 있게 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 시절에는 손만대고 기도하면 낫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바울고 그랬습니다. 이적,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죠. 하나님 나라가 땅에 왔음을 확실히 알려주는 광고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이적과 기적이 일어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좀더 다양하게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병원, 좋은 의사를 만난다거나 적절한 약을 처방받는다거나 나에게 맞는 치료법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등등우리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과정에는 공동체적 기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병자에게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믿음의 기도가 병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까? 때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습니까? 그럼 기도하게 되고요 기도 부탁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고 있습니까? 그럼 기도 부탁을 받아도 기도하지 않고요, 기도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3)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16) 

셋째,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15b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진심어린 죄의 고백은 서로를 위한 기도를 낳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예수님의 용서를 선포할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는 더욱 현실이 됩니다. 과도한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사회법 상의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영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그분께 다가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죄의 고백과 서로를 위한 기도는 용서를 경험하게 줍니다. 

 

4) 의인의 기도(16b-18) 

넷째, 의인들의 기도를 통해 인내합니다. 

 

16b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야고보에게 엘리야는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인생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반대자의 암살 시도를 뚫고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 의인들의 기도는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님들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5) 그리고 찬양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때때로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하라구요. 그렇습니다. 찬양하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들을 우리는 기뻐할 있습니다. 기쁨을 우리는 찬양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신실한 선교사님을 찾아 그의 기도 편지를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조금씩 후원해 보십시오. 그의 기도편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보십시오. 

 

=> 오래 기다리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기다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고난 속에서, 병든 자를 위해,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때로 기적적으로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때마다 찬양합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오랫동안 기다릴 있습니다. 

 

3. 언제까지!!(19-20) 

- 진리를 떠나는 사람들 

편지는 이제 끝이 납니다. 야고보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세계 교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그의 간절함과 시급함이 묻어납니다. 그는 진리를 떠나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을 보고 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믿음과 실제적인 행동으로 구원의 대열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다시 유대교의 덫에 빠져 버렸습니다. 누구는 혼합주의의 마약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누구는 이방의 신들을 다시 섬기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 돌아서게 하는 사람들

야고보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보다 시급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진리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다시 설득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편지 시종일관 이렇게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안따까움으로 가득합니다. 때로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돌아오라고 벗어나지 말라고 애타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시험을 이기라고, 시련을 견디라고 말했습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니 구체적인 실천을 하라고 목이 터져라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말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경고했습니다. 특히 부자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할 것을 지적했죠. 모든 것이 진리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한 그의 목회적 관심이 녹아 있었던 겁니다. 

 

4. 나가며 

- 리더로의 부르심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달에 걸친 야고보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은 특별히 그의 그런 의도를 매우 강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분노와 비방을 멈추고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리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죄의 자리에서 돌아오게 도움을 있는 리더의 출현을 야고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야고보서는 리더 훈련의 최고 교재였습니다.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야고보의 부르심을 느끼게 됩니다. 리더로의 부르심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청년부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청년들에게 다가가서 진리로 돌아올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리더가 되어 주세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리더가 되어 주세요. 

리더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리더가 되어 주세요. 

 

여러분 모두가 리더가 되어 죄에 빠진 사람들을 돌보는 리더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을 있도록 기도합시다. 의심하는 마음보다 확신에 거할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의심이 더욱 각광받고 비판이 더욱 우대받는 세상에서 확신에 거하고 건강한 확신을 유지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나요?    

 

2. 기도와 찬양을 통해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야고보는 추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삶을 돌아봅시다.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의 정도는 어떠한가요? 찬양할 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마음 속에 있나요? 

2021 06 14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마스길]

1 하나님, 우리는 귀로 들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이 살던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우리의 조상이 우리에게 낱낱이 일러주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손수 몰아내시고, 우리 조상을 땅에 뿌리 박게 하셨습니다. 민족을 재앙으로 치시고, 우리 조상을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3 우리 조상이 땅을 차지한 것은 그들의 칼로 차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상이 얻은 승리도 그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오른팔과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이 이루어 주셨으니, 참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이야말로 나의 , 나의 하나님. 야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5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적을 쳐부수었으며, 우리를 공격하여 오는 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짓밟았습니다.

6 내가 의지한 것은 활이 아닙니다. 나에게 승리를 안겨 것은 칼이 아닙니다.

7 오직 주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적에게서 승리를 얻게 하셨으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셨기에,

8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하렵니다. (셀라)

 

시인은 과거 하나님의 구원을 회고합니다. 그분은 조상들에게 승리를 주셨고 지금의 땅에 살게 하셨으며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1-3).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칼과 활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만 자랑하고 이름만 찬양하겠노라 다짐합니다(4-8).

 

과거를 회상하면,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시다.

 

——

출애굽의 역사, 가나안 정복의 역사, 주변국의 침략을 방어했던 역사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스라엘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역사였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때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일하심을 깨닫는다. 

시인은 역사 스토리텔러였던 부모님과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나님이 그들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책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선조들의 이야기가 들리자, 어린이들이 감동을 받는다. 

이야기는 반복이 되고, 반복은 노래가 된다. 

노래는 반복을 용이하게 하고, 반복 위에 감동을 싣는다. 

감동의 노래는 쉬이 퍼지며,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는다. 

생명력이 공동체를 형성 유지시킨다. 

이것이 시와 노래의 힘이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 개입의 일하심을 노래로 만들어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계속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는 과거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어야 한다. 

누군가는 지금 현재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어야 한다. 

누군가는 미래 하나님의 일하심을 비전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야 한다.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다. 

 

이렇게 그분의 이야기가 물결을 타고 대양을 건너고, 바람을 타고 대륙을 넘는다. 

그분에 대한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분을 향한 자랑과 사랑이 점점 커진다. 

 

성경의 이야기 아니라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이야기로 남겨 놓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정 예배를 드릴 , 종종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나누면 좋겠다. 

 

공동체에서 나눠져야 이야기는 사실 비판보다 찬양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찬양. 

비판과 비난은 순간적인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인 레이스를 펼치기는 어렵다. 

결국 공동체에 하나님이 일하시는지를 서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아차리고 감지할 있는 능력. 

능력으로 역사가 기록될 , 공동체는 다시 있는 기반을 마련할 있는 것이다. 

비판이 전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비판을 압도하는 그분에 대한 찬양이 넘쳐야 한다. 

그분에 대한 노래가 넘쳐야 한다. 

 

나의 시편은 어디에 있는가?

 

——

역사를 관통하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역사 아니라, 우리 나라의 역사도 주님께서 주관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와 공동체도 주님께서 돌보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비록 당면한 과제가 많고, 때로는 비판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 이끌어 오셨다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찬양이 더욱 넘쳐야 합니다. 

주님을 기억함이 우리에게 더욱 찬양이 되게 주세요. 

오늘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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