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6솔로몬 왕은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사장께서는 상속받은 땅 아나돗으로 가시오. 제사장께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만,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주 하나님의 법궤를 메었고, 또 나의 아버지께서 고통을 받으실 때에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제사장을 죽이지는 않겠소."

27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주님의 제사장 직에서 파면하여 내쫓았다. 이렇게 하여서, 주님께서는 실로에 있는 엘리의 가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28이런 소문이 요압에게 들렸다. 비록 그는 압살롬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으므로,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았다.

29요압이 이렇게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피하여 있다는 사실이, 솔로몬 왕에게 전해지니, 솔로몬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면서 "가서, 그를 쳐죽여라!" 하였다.

30브나야가 주님의 장막에 들어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어명이오. 바깥으로 나오시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못 나가겠소. 차라리 나는 여기에서 죽겠소." 브나야가 왕에게 돌아가서, 요압이 한 말을 전하니,

31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를 쳐서 죽인 뒤에 묻어라. 그리하면 요압이 흘린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나와 나의 가문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33그들의 피는 영원히 요압과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왕실과 그의 왕좌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34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올라가서, 그를 쳐죽였다. 요압은 광야에 있는 그의 땅에 매장되었다.

35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삼고, 아비아달의 자리에는 사독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아비아달은 반역하였지만 제사장이며 다윗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솔로몬은 그를 죽이지 않고 파면하여 고향으로 보냅니다. 이로써 엘리 가문을 두고 하신 무명의 선지자의 말씀(삼상 2:27~36 참조)이 드디어 이루어집니다(26-27절). 또 다른 반역자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의로운 사람들을 죽인 것의 죄를 물어 죽임당합니다(28-34절). 솔로몬은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새롭게 임명합니다(35절).

 

솔로몬은 재빨리 반역자들에 대한 처분을 내립니다.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따라 요압을 처분하며, 다윗 왕실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 선언합니다(33절). 아비아달과 요압은 그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자들이 축출되고 있다. 

왕권은 솔로몬에게 있으며, 아도니야는 어리석게도 욕심을 부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다윗의 마지막 몸종이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요청하다가 솔로몬의 분노를 샀다. 

아도니야가 죽자 그의 라인이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도 징계를 받고 귀향을 가거나 죽임을 당한다. 

인간 세계의 권력은 대체로 무자비하다. 

혈연이라도 왕의 권력에 위배되는 자들은 숙청되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이 갑자기 슬퍼진다. 

권력이 집중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성이 말살된다. 

최고 권력자에게 무한 권력이 주어지면 주변 사람들은 파리 목숨이다. 

왕의 심기에 의해 생명이 들고나간다.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거해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리는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용서와 회복과 포용과 환대가 있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왕정국가의 모순이 부각된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조금 나은 구석이 있긴 하다. 

율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간청은 나름 훌륭한 기도였다. 

지혜롭게 재판하고 판견하는 에피소드는 그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솔로몬 시대 당시의 다른 민족들의 왕국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의 기준에 못 미친다. 

솔로몬도 어쩔 수 없이 정적을 죄다 숙청한다. 

이유야 어떻든 왕권 강화를 위한 현실적 대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국을 안정화시키며 자칫 다시 찾아 올지 모르는 반역과 내전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나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지하지만, 속은 쓰리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함과 온전함에 눈을 돌린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솔로몬의 이런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요압보다 아브넬과 아마사가 더 의로웠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거기서 거기다. 

요압, 아브넬, 아마사… 모두 공과가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왕상 2:5-6절)을 받들어 요압에게 더욱 냉혹하다. 

제단 뿔을 잡아 도움을 요청함에도 솔로몬은 요압을 죽였다. 

요압이 과실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의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윗의 편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했던 장군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럴바에야 전장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명예롭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결정한다. 

오랜시간 요압은 요압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사람들을 죽여왔다. 

아마도 다윗을 위한 일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내적 동기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요압이 자각했든 못했든 자신 안에 있는 정치적 욕망이 강하게 작동했다. 

그 결과는 불명예스런 죽음이었다. 

 

예수님이 그리셨던 하나님 나라와 비교, 대조해 본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그에 한참 못미친다. 

솔로몬의 왕권 강화는 어떻게 보면 최종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일어날 사단과의 전투에 비견될 수도 있겠다.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솔로몬이 만드는 왕국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더욱 그립다. 

그분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다시 꿈꾸게 된다. 

 

기독공동체는 이상을 꿈꾼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모두가 화목하고 용서하는 아름답고 순전한 공동체를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쪼잔한 문제로 싸우고, 감정이 상하고, 토라지고, 뒷담화하고, 욕하고 배신한다. 

그래서 이상을 꿈꾸지 말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한다. 그 현실을 항구로 두고 이상을 향해 노를 젓는다. 

아벱, 송청 모든 공간에 이상을 향한 추구가 끊이지 않길 소망한다. 

 

——

꿈을 주시는 하나님, 

현실은 무시무시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암투가 있고, 살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꿈은 배려, 포용, 용서, 화해, 평화가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왕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보여준 용기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고 동료를 살해하고 혈연을 몰살시켰습니다. 

주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인간의 죄악과 잔혹함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꿈을 주시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주시고 그것을 위해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오늘도 분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 성령님의 은사로 채워주세요. 

힘과 지혜가 가득하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17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 왕이 목놓아 울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2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도 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왕이 자기의 아들 때문에 몹시 슬퍼한다는 소문이, 모든 군인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3 그래서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안으로 들어왔다.

4 그런데도 왕은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 아들 압살롬아, 아들아,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울부짖었다.

5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 모든 부하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건지고, 임금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목숨도 건지고, 모든 왕비의 목숨과 후궁들의 목숨까지 건져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6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임금님을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시고, 임금님께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시는 겁니까? 우리 지휘관들이나 부하들은 임금님께는 있으나마나 사람들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오늘 임금님의 본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차라리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께서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7 이제라도 일어나 밖으로 나가셔서, 임금님의 부하들을 위로의 말로 격려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지금 임금님께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사람도 임금님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께서 젊은 시절부터 이제까지 당한 모든 환난보다도 무서운 환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8 그러자 왕이 일어나서 성문 문루로 나와 앉았다. "임금님께서 성문 문루에 앉아 계신다!" 하는 소식이 모든 부하에게 전해지니, 모든 부하가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도망하여,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9 이스라엘 백성은 지파마다 서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나라에서 떠나 있다.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11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다윗 왕에게 전달되었다. 다윗 왕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다 장로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어찌하여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12 그들은 나의 친족이요 나의 골육지친인데, 어찌하여 왕을 다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그리고 아마사에게는, 그가 나의 골육지친이면서도,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사령관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벌을 내리시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고 하더라고 알려 주십시오."

14 이렇게 다윗이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자기쪽으로 기울게 하니, 그들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부하들을 격려하고 왕국을 안정시켜야 상황이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요압의 책망과 협박을 들은 다윗은 억지로 왕의 직무를 재개합니다(1-8). 북이스라엘 지파가 왕의 환궁을 주도하려하자 다윗은 자신의 친족 유다 지파가 주도권을 갖도록 부탁합니다.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워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이들에 의해 왕은 환궁 요청을 받습니다(9-14).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왕의 직무에 복귀한 다윗은 제대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환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유다 지파를 의존함에 따라,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간의 갈등을 촉발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군사령관 교체는 요압의 아마사 살해라는 불상사를 불러옵니다(삼하 20 참조).

 

——

다윗의 이야기는 현실 역사 이야기다. 

단순히 영적으로 해석될 내용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일들에 시사점을 많이 던져준다. 

다윗은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용사들을 격려하거나 환대해주지 못했다. 

쿠데타가 일어났으면 어쩔 없이 쪽은 죽음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압살롬이 죽지 않으면 다윗과 그를 따르는 식솔, 부하들이 죽는다. 

대등한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휴전이라는 것이 있다. 

전력차가 경우라면, 항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럴 경우 목숨은 살려 두기도 한다. 최고 지도자는 죽더라도 부하들을 살려 두기도 한다. 

그러나 쿠테타는 패배한 쪽의 세력이 거의 대부분 축출된다. 내전이 무서운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압의 말이 옳다. 

다윗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운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것은 알겠지만, 씨앗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시시비비를 다루든지, 아님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든지 

중에 하나를 결단력있게 감당했어야 했는데, 애매하게 진행했다.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만들었다. 지혜롭지 못했고, 어설펐다. 

그가 작성한 수많은 시편은 때로 이런 약점에 대한 자신의 도피처가 아닌가 싶다. 

 

요압이 다윗을 압박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 수준의 말이 나왔다. 

싸움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패잔병처럼 대한다는 사실에 요압은 화가 많이 났다. 

 

다윗은 여전히 개인적인 감정, 사적 감정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다윗은 공인이다. 왕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현실판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왕국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다. 고통은 심하다. 

그럼에도 왕국의 회복을 위해 고통을 감당한다. 

인간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자신의 아들이 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귀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 했다. 

게다가 압살롬만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왕위 계승자도 있었다. 

 

여러모로 다윗의 인생 후반부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아브라함은 인생 후반부에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까지 성장, 성숙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다윗은 과연 어땠을까? 

다윗은 인생 후반부로 갈수록 초심을 잃어버렸다. 

왕이라는 직책이 갖는 부담 때문인가? 

 

죽을 때까지 성숙할 있는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닮을 있는가? 

죽을 때까지 믿음의 삶을 진보시킬 있는가? 

 

——

평생에 걸쳐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 머물거나 퇴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의 관계, 믿음, 신실함, 윤리의식, 실천력 

모든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2021 06 02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알았다.

2 요압이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였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시오.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민 다음에,

3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시오." 요압은 여인에게, 말을 일러주었다.

4 드고아에서 여인은 왕에게로 나아가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절을 뒤에 "임금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 왕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여인이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이 죽어서, 가련한 과부가 되었습니다.

6 여종에게 아들이 있는데, 들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7 그런데 이제는 집안이 들고 일어나서, 종에게, 형제를 때려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죽은 형제의 원수를 갚고, 살인자를 죽여서, 상속자마저 없애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남아 있는 불씨마저도 버려서, 남편이 땅에 이름도 자손도 남기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8 듣고 왕은 여인에게 말하였다. " 문제를 두고서는,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9 그러나 드고아 여인은 왕에게 아뢰었다. "우리의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일에 있어서 허물은 저와 아버지의 집안에 있습니다. 임금님과 왕실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10 왕이 대답하였다. "누구든지 너를 위협하거든, 그를 나에게로 데리고 오너라.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다."

11 여인은 간청하였다. "그러면 임금님, 임금님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셔서, 저의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집안 사람들이 살아 있는 저의 아들까지 죽이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12 여인이 간청하였다. "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말씀만 드리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13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처럼 그릇된 일을 하셨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친아들인 왕자님이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지금까지 종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렇게 말씀만 하시고, 왕자님을 부르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4 우리는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15 높으신 임금님, 제가 지금 임금님을 찾아 뵙고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까닭은, 제가 친척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문제를 임금님께 아뢰면, 임금님께서 제가 간구하는 바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16 저의 집안 사람들이 저와 저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끊어 버리려고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저의 사정을 들어서 아시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7 종은 ,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임금님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까, 저의 호소를 들으시고 선악을 가려내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이 섬기시는 하나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18 마침내 왕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을,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하여라."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19 왕이 물었다. "너에게 모든 일을 시킨 사람은 바로 요압이렷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임금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 요압입니다. 그가 모든 말을 종의 입에 담아 주었습니다.

20 왕자님의 일을 되게 하여 보려고,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슬기로우시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실 압니다."

 

 

압살롬이 떠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을 향하고 있으나 다시 불러오지 못합니다. 요압은 한 여인을 보내 다윗의 상황과 비슷한 사례를 실제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하도록 지시합니다(1-11절). 자신을 돕겠다는 다윗의 맹세를 들은 여인은 왕의 모순을 지적하며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권합니다(12-17절). 다윗은 이 모든 말들이 연출에 의한 것임을 직감하고 배후에 요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18-20절).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요?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면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 실행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자신의 입으로 말해버렸으니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매한 마음은 미지근한 화해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킵니다.

 

——

 

역사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각자의 입장에 서면 판단이 바뀌기 마련이다. 

아버지로서 압살롬과 빨리 화해를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님 왕으로서 죄인에 대해 영구히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다윗 왕에게는 여전히 많은 아들들이 있다. 

압살롬이 외모나 기개가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삼하 14:25)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교활하고 폭력적이다. 

암논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왕은 아들에 대한 정당한 벌을 내렸어야 했지만,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물쩡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압살롬은 큰형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평생 거기서 사는 것이 압살롬에게나 다윗 왕에게나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심각한 딜레마가 여기도 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둘의 역할을 함께 있냐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왕이 없다. 

왕이 되는 순간, 왕국의 통치를 위해 사적 관계를 공적 원리로 재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되는 순간, 가정과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고 보살피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차라리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도덕적 명분도 분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진심으로 따랐다. 

왕이 되어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을 , 그것을 해결할 의지와 지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왕은 오롯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분만이 진정한 왕이 되실 있다. 

사무엘상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백성이 왕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아서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 왕은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도 지혜도 없다. 

그러니 어쩔 없이 분열의 씨앗이 자라게 되고, 전쟁의 빌미가 제공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젊고 능력있는 정치인의 등장은 반갑다. 

청년 세대를 대변하면서 청년의 지지를 받아 정치권에 청년의 문제를 해결해 있는 대표주자가 된다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물론, 개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난관을 계속 만나게 것이기에, 그래서 온갖 딜레마 속에서 고통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인간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든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부르심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자리다. 

공동체 지도자의 자리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분들이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공동체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배제할 없기에, 항상 부딪히는 날까로운 이슈들을 다뤄가며 이루는 밤들이 늘어가게 된다.

공동체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 앞에 선봉장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직장에서도 책임있는 자리, 관리자의 자리에 승진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한다. 

사토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보이는 지점이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바울은 권세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P4G 국제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개회식 장면을 보았는데, 사슴이 거닐고 나비가 나부끼는 소나무 숲에서 대통령 연설이 진행되었다. 

증강현실이 보여주는 회복된 자연이 모습이 성경이 꿈꾸는 자연과 닮았다. 

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Global Goals 2030 줄임말이 P4G이다. 

자연의 회복을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모아지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도자들이 어디에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문제는 오랫동안 세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수많은 선언을 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회복시키겠다는 지도자들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목에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역에서도 분명히 필요하다. 

 

다윗의 딜레마를 이해한다. 

그의 어정쩡한 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태도도 이해한다.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국 분열과 전쟁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찌보면 다윗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도할 밖에 없는 날이다. 

 

——

인간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은 한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원과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수많은 이슈와 문제는 옴짝달싹 없이 만듭니다. 

하나를 결정하면, 결정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받습니다. 

고통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결정이 과연 공동체의 미래에 좋은지도 헷갈립니다.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주님, 우리의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최종결정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5 08 토요일

 

여는 기도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5-6월호

22 때에, 다윗의 부하들이 요압을 따라 습격하러 나갔다가,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브넬은 때에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않았다. 다윗이 이미 그를 보내어서, 그가 무사하게 곳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23 요압이, 함께 데리고 나갔던 군인을 모두 데리고 돌아오자, 누군가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이 임금님을 찾아왔는데, 임금님이 그를 그냥 보내셔서, 그가 무사하게 곳을 떠나갔습니다."

24 말을 듣고, 요압이 곧바로 왕에게로 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실 있습니까? 아브넬이 임금님께 왔는데, 임금님은 어찌하여 그를 그냥 보내어서, 가게 하셨습니까?

25 넬의 아들 아브넬은, 임금님께서 아시다시피, 임금님을 속이려고 것이며, 임금님이 드나드는 것을 살피고, 임금님이 하고 계시는 일도 모조리 알려고 것입니다."

26 요압은 다윗에게서 물러나오자마자 사람들을 보내어서 아브넬을 뒤쫓게 하였다. 그들은 시라 우물이 있는 곳에서 그를 붙잡아서,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윗은 일을 전혀 몰랐다.

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니, 요압이 그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성문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요압은 거기에서,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으려고, 아브넬의 배를 찔러서 죽였다.

 

28 다윗이 소식을 듣고서 외쳤다. "넬의 아들 아브넬이 암살당하였으나, 나와 나의 나라는 주님 앞에 아무 죄가 없다.

29 오직 죄는 요압의 머리와 아버지의 집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 요압의 집안에서는, 고름을 흘리는 병자와, 나병환자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다리 저는 사람과, 칼을 맞아 죽는 자들과, 굶어 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브넬이 그들의 동생 아사헬을 기브온 전투에서 죽였기 때문이다.

31 다윗은 요압을 비롯하여 자기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백성은 옷을 찢고, 허리에 굵은 옷을 두른 뒤에, 아브넬의 상여 앞에서 걸어가면서 애도하여라." 그리고 다윗 왕도 몸소 상여를 뒤따라갔다.

32 백성이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지내니, 다윗 왕이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고, 백성도 울었다.

33 다윗 왕은 아브넬을 두고, 이렇게 조가를 지어 불렀다. "어찌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죽듯이, 그렇게 아브넬이 죽었는가?

34 그의 손이 묶이지도 않았고, 발이 쇠고랑에 채이지도 않았는데, 악한들에게 잡혀 죽듯이, 그렇게 쓰러져서 죽었는가?" 그러자 백성이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시 울었다.

35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을 때에, 백성이 다윗에게 와서 음식을 들도록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였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내가 빵이나 어떤 것을 맛이라도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리셔도 마땅하다."

 

36 백성이 그것을 보고서, 일을 좋게 여겼다. 다윗 왕이 무엇을 하든지, 백성이 마음에 좋게 받아들였다.

37 때에야, 비로소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님을, 백성과 이스라엘이 깨달아 알았다.

38 그런 다음에 왕은 신복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아는 대로, 오늘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장군이 죽었소.

39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강하니, 비록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고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약하오. 그러므로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주님께서 죄악에 따라 갚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오."

 

주석
22-39: 아브넬이 살해되어 다윗은 매우 곤경에 처했다. 그를 살해한 자는 다윗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 하나였으며, 따라서 다윗이 아브넬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의심스러운 소문이 멀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다윗이 있는 유일한 변호는, 자신이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무죄하다는 사실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었다(IVP 성경주석).
요압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입니다(22-27). 요압의 행동은 다시 이스라엘에 위기를 초래합니다. 다윗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아브넬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밝히며 요압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백성과 함께 슬피 울며 아브넬을 장사합니다(28-35). 이로써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다윗을 향하고, 신복들에게도 동정을 얻게 됩니다(36-39).
왕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려보냈지만 요압은 아브넬을 평안히 돌려보낼 없었습니다. 일차적 동기는 동생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개인적인 감정과 원한이 눈을 가리었고, 그로 인한 행동은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삶을 들여다봅시다. 개인적인 서운함과 원망, 복수심으로 그릇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분별

 

1. 꿈을 꾸다. 

굉장히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데, 상당히 생생했다. 

아는 목사님이 등장하셨는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가셨다. 

그의 메시지는 개인적 맞춤형 메시지였는데, 나만을 위한 개인 포스터를 만들어서 그분의 메시지를 담아 주셨다. 

영화의 장면들을 활용해서 메시지를 만들었는데, 매우 강렬했다.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워딩이 그대로 생각나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떠오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목사님이 꿈에 나타난 것도 신기했지만, 메시지가 나의 영성생활을 때로 가로막는 대중문화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실감났다. 

꿈에 등장하는 메시지 전달 방식(개인 맞춤형 포스터) 내용(대중문화에 매이지 말라) 하나님에게서 왔을지 아니면 나의 내면의 소리인지는 분별이 필요하다. 

형식과 메시자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다. 

꿈에서 깨자마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오랜만에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꿈을 통해서 전달하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깨자마자 주변의 나를 오랫동안 후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웃사랑의 방향으로 마음의 흐른 것이다.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로 판단하고자 한다. 

 

어제 마음의 피곤함이 있었다. 

고질적인 성향의 약점이 순간순간 드러난 하루였다. 

남과 비교하기 

동안 비교로부터 조금 멀어졌다고 여겼는데, 어제는 여러 대화와 읽은 속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나를 스스로 초라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요사이 영적으로 예민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느끼는 순간부터 자신에게로 몰입하는 경향이 다시 보인다. 

5월들어 조금 속도가 붙고 있다. 

무조건 좋다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제어할 것도 아니다. 

신앙은 여정이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5월에 좀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집중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너무 매몰되어 자신의 강점과 은사를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고 싶다. 

억지로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가 되지 않도록 도우심을 구한다. 

 

2. 요압의 충성 vs. 사심

본문은 요압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다윗이 그동안 전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요압은 사심으로 아브넬을 사살, 암살했다고 성경 저자는 기록했다. 

다윗의 전국 통일을 뒤로 후퇴시키는 개인의 앙갚음이었다. 

이런 성경 저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요압이 내건 정당화 근거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25 넬의 아들 아브넬은, 임금님께서 아시다시피, 임금님을 속이려고 것이며, 임금님이 드나드는 것을 살피고, 임금님이 하고 계시는 일도 모조리 알려고 것입니다.

 

충분히 타당한 근거다. 

아브넬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반란군의 수괴라고 생각했다.

다윗에게 찾아와서 그동안 이스보셋과의 일들을 이야기했겠지만, 그게 사실인지 꾸민이야기인지 방도는 별로 없다. 

사실 다윗 자신도 아기스 왕에게 찾아가 거짓으로 미친 하지 않았는가!

히스기야 시절, 바빌로니아 사절단에게 왕궁의 모든 것을 보여준 그의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은 남유다의 멸망을 확정지으셨다(왕하 20:12-19)

다윗이 적의 장군을 왕의 진지 안으로 들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압의 말은 상당히 타당하다고 있다. 

 

공동체에는 저마다의 사정 속에서 각자의 근거가 있다. 

근거는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 듣기에 따라 매우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개인적 욕심과 동기가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분별하는 것이 리더십의 역할이다. 

개인적인 욕심과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전체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요가 있다.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살펴야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서도 동기를 면밀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온전히 수야 없겠지만, 그동안의 행동의 결과가 그의 동기를 파악하는 도움이 것이다. 

그것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면밀하게 정보를 들어야 한다. 

사람의 역사를 알고 기억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충성인지 사심인지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

 

꿈을 통해서도 알려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게 주세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과민하여 자신을 해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사람이라도 깊이 기도하고 사랑을 표현하게 해주세요.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거짓된 동기들을 파하시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품게 해주세요. 

우리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이 주님 나라를 위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