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9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10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되돌아가서 알렸으나,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처음으로 보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사실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었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지는 중요성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이 부활 후 처음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다. 

친모인 마리아를 만난 것도 아니다. 

일곱 귀신을 들렸다가 구출된 여인, 그래서 예수님의 경제적 후원자로 섬겼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 

사람들은 그녀를 예수의 여인이나 부인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결론 내릴 수 없는 상상이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과거의 아픔을 이겼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일곱 귀신에 걸려 삶이 마구 무너졌었다. 

예수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지켰다. 

그리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남성중심적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성경은 여성을 첫 증인으로 두었다. 

이것도 성경이 대단히 도발적인 책임을 보여준다. 

시대에 순응하는 책이 아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책이다. 

그러기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 

누군가에 의해 각색된 책이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본 예수님을 증언했다. 

남성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그가 여성이기에 믿지 못했을까? 

그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해서였을까? 

둘 다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슬피 울고 있었다. 

지난 삼일 내내 울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곳에는 남성 여성 제자들이 다 있었다. 

그들 중에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기진한 사람도 있었겠다. 

예수님이 살아 돌아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는 못했다. 

그분의 시체를 봤던 사람들, 그분의 장례를 봤던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리아의 이야기만 못 믿는 것이 아니다. 

엠마오 마을로 돌아갔던 제자가 다시 돌아왔다. 

밤늦게 돌아온 그들은 길가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했다.

이상했다.

왜 11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냥 깔끔하게 11명의 제자들(나중에 사도가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11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난 것을 부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고, 더 빨리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이라면 그분은 예수님이 아닐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게 영적 교만이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영적 교만에 빠지면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그랬고, 지금은 제자들이 그렇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각 안에 가두려는 자들은 그분의 자유로움을 부인하고 싶어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틀과 이데올로기에 가두려는 자들은 그분의 섭리를 믿지 못한다. 

영적 교만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길은, 적은 무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작은 양떼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 작은 양떼들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빠르게 다가가신다. 

그들을 향한 사랑은 빠르고 거침없다. 

크고 자애롭다. 

적은 무리의 소리에 언제나 귀를 열어 두어야 한다. 

그들이 항상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빠르고 크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우선순위를 떠올려 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프로토콜로 움직이시는 당신께 나아갑니다. 

자유로우신 분, 

인간의 계획과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 

당신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어떤 길이 있든지 주님을 신뢰하길 소망합니다. 

오랫동안 정박했던 배를 띄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1월 21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1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5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6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8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주석

1-2절. 예수님이 급히 장사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범죄자라는 예수님의 신분으로 인해 장례식을 치르는 데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 용감한 세 여자는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 무덤에서 조용히 울기 위해 일요일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간다(IVP 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안식일이 지났다. 

모든 사람들이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했다. 

남성 제자들, 여성 제자들 할 것 없이 무거운 침묵만 흐른다. 

눈물 흘리는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신들도 언제 잡혀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식일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 곧 안식일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밝으면 그 때부터 본격적인 색출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출입을 통제했다. 

그러나 몇몇 여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예수의 남은 장례를 치르길 원했다. 

예수에게 발라 드릴 향료를 샀다.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이니 토요일 저녁에 향료를 샀다.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일요일 새벽부터 부스럭거린다. 

무덤으로 가기 위해서다. 

예수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한 둘 일어나 갈 채비를 한다. 

그리고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를 뚫고 돌무덤으로 향한다. 

문제는 입구의 돌이었다. 

왠만한 장정들도 쉽게 옮길 수 있는 돌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할지 논의한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로마 병사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지, 

아님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지… 

로마 병사들이 들어 줄 것 같지가 않다. 

아직 새벽이라 사람도 많지 않다. 

난감하다. 

그래도 일단 무덤까지는 가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남성 제자들 그러니까 베드로나 요한을 데리고 갈 생각을 못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참으로 불쌍타. 

자신들은 예수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만, 예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로마 병사들이 안 보인다. 

지나가는 행인도 별로 없다. 

그런데 무덤에 돌이 옮겨져 있는 게 아닌가!! 

난처함은 당황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예수의 시체가 안식일 사이에 없어진 것은 아닌가?

큰 일이었다. 

무덤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들짝 놀랐다. 

처음엔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흰 옷을 입은 모르는 남성이 안에 있다.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알렸다. 

벌써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출발하셨단다. 

충격!!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다니! 

피로 범벅이었던, 아무런 생체 활동이 없었던 그 시체가 다시 살아나다니. 

놀라 뛰쳐나왔다. 

흰옷 입은 남자도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예수님의 소식도 충격이었다. 

과연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두려움에 떨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도망갈 준비만했다. 

 

갑작스런 일은 언제나 당황스럽다. 

올 한 해 갑작스러운 일이 참 많았다. 

그 와중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버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주님의 도우심이 컸다. 

마라톤으로 시작한 한 해, 

정말 마라톤 같은 한 해였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달리며 기도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영적으로 단단해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육체가 무너지면 정서와 영혼도 함께 무너진다. 

육체의 훈련과 영적인 훈련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부활을 경험하는 하루,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아직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부활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주님의 사랑이 더욱 흐르게 하소서. 

하나 둘 저의 실수로 인해 고통받았던 자들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저로 인해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더욱 건강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올 한 해 갑작스런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이 컸습니다. 

특히 마라톤을 통해 몸의 컨디션을 높여 주시고, 회복력을 증진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몸 뿐만 아니라 영혼도 더욱 단단해져서 

주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 가도록 이끄소서. 

주님의 음성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42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왔다.

43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44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45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주었다.

46 요셉은 삼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ESV

Pilate was surprised to hear that he should have already died(44절). 

 

주석

43절. 예수님에게 적용된 혐의들을 고려하면 로마 총독은 그 요구를 거절할 만도 하다. 그러나 유대 관습은 시신을 기둥이나 십자가에 밤새 매달아 놓는 것을 금지했고, 장사를 치러 주는 것을 경건한 행위로 간주했다. 게다가 빌라도는 공개된 장소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제거하는 편을 선호했을 것이다(IVP 비평주석). 

44절. 예수님이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빌라도가 놀라는 이유는,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틀이나 사흘, 혹은 그보다도 오랜 기간 고통당한 후에 죽기 때문이다(IVP 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예수의 시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영혼은 떠났고, 육체는 다시 밝아진 하늘 끝에 달렸다. 

오후 세시, 그 운명적 사건이 지났다. 

오후 6시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시체에서 떨어지는 피와 물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어떤 사람들은 남아 시체를 보고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명망 있는 의회 의원? 아마도 산헤드린 의회를 의미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곳,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결의한 곳.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예수는 죽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메시야일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가져온 진짜 메시야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던 그는 용기를 냈다. 

빌라도에게 찾아갔다.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 요청했다. 

감히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라면 겁이나서 절대로 하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어두워지고, 휘장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요셉은 확신했다. 

예수는 비범한 분이다. 

그의 시신을 십자가에 계속 달아 두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행위다. 

이런 생각으로 담대하게 빌라도를 찾았을 것이다. 

빌라도는 의아해한다. 

벌써 죽다니… 

자신이 사형을 허락하고서는 사형장에는 가보지 않았다. 

끔찍한 사형 현장을 매번 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사형이었다. 

예수는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그에게 예수가 그렇게 빨리 죽었다는 소식은 꽤나 놀라웠다. 

혹여 예수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기적과 능력으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작은 상상이 있었다. 

그런데 평균적인 생존 시간보다 너무 짧았다. 

몇 시간 만에 죽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부하 백부장을 시켜 사실인지 알아보았다. 

사실이었다. 

예수는 숨이 끊어졌고, 옆구리에는 깊은 창 자국이 나 있었으며, 십자가 아래에는 피와 물이 흥건했다. 

옆에 있던 다른 사형수들은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으나, 예수는 죽었다. 

 

요셉은 자신을 위한 무덤에 예수를 모신다. 

너무나 갑작스런 예수의 죽음에 자신과 가족을 위한 무덤을 내주었다. 

깨끗한 천으로 예수의 몸의 피를 닦고, 삼베로 몸을 감쌓다. 

시신을 동굴 무덤에 안치하고 굴 입구를 돌로 막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예수를 모셨다. 

 

그동안 많이 등장하지 않았던 여인들이 계속 거론된다.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순간에 이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를 사랑했던 그들은 어두운 밤에도 예수의 시신이 안치되는 것을 보았다. 

어디에 그를 두는지 알고 싶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 드리지 못했다. 

몰약이라도 발라드려야 했다.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며칠 동안 장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여인들은 그저 눈물로 시신 안치를 보았다. 

 

십자가 사건에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등장한다. 

제자들, 빌라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도망간 사람, 우는 사람, 보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 

저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경험 속에서 십자가 사건에 반응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를 떠올리면서 다양한 반응이 터져나온다. 

슬퍼하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 수치스러운 사람…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하신다. 

도망갔던 제자들도 이해하셨다. 

울고 있는 여인들도 이해하셨다. 

로마 군인들, 요셉도 이해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도 이해하신다. 

그럼에도 한 가지를 요청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

결국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에 대한 사랑이다. 

 

지난 일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지금 이 순간 그분을 사랑하는지만 확인하자. 

지난 일에 대한 치료와 회복과 격려와 칭찬 모두 그분께 맡겨드리자. 

그저 오늘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을 사랑한다 말씀드리자.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요셉처럼 담대하게 제가 확신한 바를 실행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행동을 더욱 확실하게 하도록 인도하소서. 

돈, 명예, 인기, 평판보다 예수님을 더 우위로 두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가능하면 끝까지 당신의 시신을 돌보게 하소서. 

저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소서. 

조직이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1월 14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6 그런데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 주곤 하였다.

7 그런데 폭동 때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8 그래서 무리가 올라가서, 자기들에게 해주던 관례대로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9 빌라도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

10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13 그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

 

주석

14절. 빌라도 재임기의 유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떠올려 보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따르는 이가 많았던 갈릴리 출신의 유명한 예언자를 그렇게 공개적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처형하기를 주저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빌라도는 바로 그것을 피하고 싶어 했다(IVP 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빌라도는 영리한 총독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명절 때마다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를 풀어 주곤 했다. 

이건 정치적으로 장단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정치적 인물이 풀려나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풀어주면 정치적 반대파가 늘어나고 또 다른 폭동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한 번 붙잡혀서 여러 고문과 심문을 받은 사람이 다시 정치적으로 재기하여 군중들의 규합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한 정보가 치안 담당자에게 다 노출되었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도 충분히 조사했을 것이다. 

출옥된다 한들 감시가 심하고 만약 그와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안전도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저런 유익들을 재가며 그를 풀어 주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다고 본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 때마다 죄수 중 한 명을 풀어주었다. 

 

빌라도는 눈치가 빠른 총독이었다. 

예수를 대제사장들이 고소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시기했기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10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의 고소는 예수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기보다는 유대인의 진정한 목자로 활동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백성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고 회복과 평화를 선언했다. 

원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틈에 예수님의 활동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원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 열망의 절정을 연출했다. 

빌라도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예수가 입성할 때 백성들이 어떻게 환영했는지, 성 안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빌라도는 자신들의 정보원들을 통해 다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고발하면서 그의 말과 행적인 유대인의 왕 같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그 어떤 왕보다도 더 나았다.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은 대제사장들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예수가 풀려날 수 있을 거라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보다 예수를 더 잘 따를 것이라는 내심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영악함과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언론 플레이를 할 줄 아는 영악함을 가졌다. 

생각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빌라도는 당연히 예수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이상하게 흘러갔다. 

백성들, 군중들이 갑자기 바라바를 풀어달아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폭동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사람들을 해한 적이 없었다. 

예수는 사형을 받을만한 죄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시키라는 군중들의 함성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재차 묻는다. 

“그러면, 당신들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 예수 그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기보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별명을 붙여서 불리웠던 사람, 그 예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무죄방면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중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정치적 감각을 가진 빌라도는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린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조용히 지켜만 볼 뿐이었다. 

저주를 내릴 수도 있었고, 이상한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게 할 수도 있었고, 엄청난 돌풍을 불게하여 거대한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 어떤 기적과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그동안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적이 없다.

사람들을 위해 병고치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을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사람들,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평온하게 사람들을 응시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리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야 할 자신의 소명을 더 깊이 묵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못 박으라”는 외침을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듣고 계셨다. 

그들의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예수님의 슬픔은 더욱 깊어지고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도 더욱 커져갔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킬 단 하나의 방법만이 남았다.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 

 

빌라도는 최선을 다했다. 

그는 백성을 이길 힘이 없었다. 

정치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중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여론을 무시해서는 통치를 이어갈 수 없다. 

빌라도가 이해가 된다. 

 

백성도 사실 이해가 된다. 

그들은 쉽게 현혹되는 사람들이다. 

제대로된 정보를 획득하기 어렵다. 

냉철하게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기 어렵다. 

군중심리에 현혹되기 일쑤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기한 셈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 싶었다. 

하나님을 빌미로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었다. 

백성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했던 그룹이다.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쇠락해가고 부패해 가는 한국교회에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부르시고 있나? 

계속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본받고 싶은 주님, 

주님의 길은 침묵의 길입니다. 

군중들의 외침은 당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구원을 갈망하는 부르짖음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면서 주님은 그 길을 걸으십니다. 

한국교회의 실태는 참담합니다. 

지도자들 중에 진실함으로 무장한 자가 많지 않습니다. 

생존이 급급하고 명예가 소중하여 타협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죄와 멀지 않고 사람들을 죄로 안내합니다. 

 

지금도 슬퍼하시는 주님,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이제까지 한 단체를 섬기면서 그 길을 찾아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단체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길을 도모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주님의 인도를 받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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