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17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14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똑같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15 유대 사람은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우리를 내쫓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16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NIV

in their effort to keep us from speaking to the Gentiles so that they may be saved. In this way they always heap up their sins to the limit. The wrath of God has come upon them at last(16절).

 

주석

유대 사람(14-15절)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 특정 그룹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로마서 9-11장에 표현된 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응답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다(IVP 성경주석).

 

바울이 고난을 겪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게 되었다고 위로합니다(14절). 또한 그들이 겪은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13절). 한편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5-16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겪은 고난은 유대 교회가 겪었던 고난과 동일했습니다(14절). 바울 역시 이 고난을 경험했고,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 오히려 우리는 고난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고난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어떤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1. 실제 그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자랑스러운 일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울 선교단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풀 때, 그걸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 하며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놀라운 장면이다.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취사선택할 수 있었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 말씀이 권면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이 성도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칭찬은 참으로 소중하다.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자신들이 따르고 섬겼던 신과 그 민족 특유의 문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의 증거들이 바울에게도 전달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하게 된다. 

 

2. 똑같은 고난

성도들 속에서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듯이, 이방인들도 그들 가운데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듯이, 이방인들도 그들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을 잡아 가두고 협박하고 위협한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잘 인내하고 있다. 

바울이 감사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도 신앙생활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 기술은 고도화되고, 종교인에 대한 오해와 혐오가 커진다.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고, 이단/사이비들이 기름을 붓는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매주 교회당에 모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느낀 교인들이 대다수다. 

유럽 교회들처럼, 한국 교회들도 고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살아남기도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겨우겨우 교회만 나와도 감지덕지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성도, 나와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길 기도한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실제 삶에 적용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나와 우리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한 주, 전국의 캠퍼스 사역자들이 모이는 시간, 

긴장되고, 부담될 수도 있지만, 그들 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능력을 보길 원한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평화를 빌며 사랑을 전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고후 13:11-13_11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12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부분도 귀하다. 

 

살전 1:2-3_2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서로에게 고백되는 순간이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대화를 이어가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격려하는 순간들이 더 늘어나게 하소서.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마음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부담보다 사랑이 이기는 하루, 한 주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0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25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27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28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30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31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아십니다.

32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리가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33 교우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의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나는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주석

29절 바울이 자신을 ‘약한 자들’과 동일시한 것은, 그러한 것을 비천한 신분의 상징으로 본 사회적으로 강력한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못마땅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은 그의 대적들의 입장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합니다. 바울 또한 거짓 교사들과 같이 히브리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22절). 그리고 그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약해질 때, 함께 약해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습니다(23-30절).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은 바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십니다(31절).

 

바울은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의 약점들을 늘어놓습니다. 수고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은 모두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일꾼임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수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이런 이야기까지 자신의 입으로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바울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이라고 쓰고 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스스로 말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잘 알려줘야 한다. 

바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시간들을 견디고 버티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려줘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들을 버티는 사람들이다. 

감옥살이, 돌에 맞음, 채찍에 맞음, 파선당함, 표류…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단이 바울을 어떡해서든 막아서려고 한다. 

그의 선교가 미치는 영향이 너무 막대해서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마다 살아난다.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 

선교 여행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위협을 당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족의 위험이다. 

같은 민족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당한다. 

좌절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해받고 사랑받고 적극적으로 후원받으면서 해도 할까말까하는 일들이다. 

이 일을 이렇게 감당하는 것만으로 대단하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을 넘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삶은 아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이 그러했다. 

선교사님들의 삶은 항상 위험 속에 놓여 있다. 

적대적인 국가에서의 선교는 더욱 그렇다.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사로 사는 것, 중국에서 복음전도자로 사는 것… 항상 위험을 안고 산다. 

어느 나라에서는 소리없는 찬송을 합창하기도 한단다. 

모임 시간 두 시간 전부터 2명씩 건물에 입장해야 한단다. 

감시가 심하고 걸리면 추방이 일상이다. 

입국심사때부터 공안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이기에 그 일을 감당한다. 

각자마다 자신의 부르심 속에서 고난을 당하기 마련이라지만,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내가 당하는 고난은 고난 축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고난, 물리적인 고난을 당하고 있다. 

1세기에 이렇게 자주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야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난을 받지만,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받는다. 

그렇다고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를 생각하며 밤낮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염려가 크다.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가 크게 다가온다. 

전광훈이라는 자가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더럽히고 있다. 

언제나 정치목사가 있어왔지만, 이렇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조찬기도회 나가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지만, 전광훈은 하나님도 우숩게 여긴는 작자다. 

총회때 권총을 들고 설쳤었다. 

빤스내리라는 말에 순종해야 자기 성도란다. 

정치개입은 기본이고, 공당의 공천권이 자신에게 있는 모양으로 말한다. 

걱정이다. 염려가 크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의 이런 노력에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바울을 인정했을지는 미지수다. 

어떤 사람들은 설득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바울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은 요구하는 것도 많다고 그러는데..’ 등등

‘이런 고난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다’ 등등

주장이 강하면 비판도 강하게 돌아오는 편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끝까지 진실을 말한다. 

고난 당한 것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난다면, 굳이 숨길 일이 아니다. 

약점 속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더욱 약점을 드러낼 일이다. 

 

정직하게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말자. 

오늘의 다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약점과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여전히 약점을 안고 삽니다. 

육체의 통증이 의지를 약화시킵니다. 

피곤함이 생활 리듬을 깨뜨리고, 깨진 리듬이 피곤을 더합니다. 

악순환이 돌아갑니다. 

 

주님, 

더욱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고, 

피곤함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살고 싶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해 도전하고 싶습니다. 

몸의 피곤을 감하시고, 의욕과 의지를 더하소서. 

일상을 잘 관리할 수 있게 하소서. 

조금만 관리가 느슨해져도 이제는 몸이 아파지는 나이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벗꽃이 다지기 전에 꽃향기를 맡으러 나가야 하듯이, 

안따까운 젊음과 생명이 다지기 전에 사랑의 향을 더욱 진하게 더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4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7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석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1절) 인사의 대상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다. 이 말은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인 성향이 같은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IVP 성경주석).

 

묵상도움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됐습니다(1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도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3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지만, 이를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5-6절).

 

바울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6-7절).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고난을 견디는 공동체와 동역자를 통해 하나님께 위로를 얻습니다. 고난으로 연약해질 때, 서로에게 거는 든든한 희망으로 견디어 냅니다. 나는 어떤 고난에 동참하고 있나요? 어떤 위로를 주고받고 있나요?

 

 

[오늘의 묵상]

새달, 새학기를 맞아 묵상 본문이 바뀌었다. 

출애굽기에서 고린도후서로.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2월 묵상이 마무리되었다. 

좋은 점은 그 뒷 이야기가 기대된다는 점이요, 아쉬운 점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찬양의 글을 묵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민족 모든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했을지 천천히 묵상해보고 싶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이스라엘을 따라 나왔던 타민족 사람들도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노래로 찬양했을지 감히 상상이 잘 안간다. 

 

오늘 본문은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확신하는 장면이다. 

이야기에서 논리적인 편지글로 옮겨지는 것이 순간 적응이 안된다. 

이야기는 장면의 흐름이 연상되는데, 편지글은 논리적인 구성이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요사이 이런 단정하듯 말하는 주장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바울은 거의 선포하듯 주장하는데, 그 예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건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사건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건 속에서 울고 웃고, 어떤 감동과 메시지를 받는 것이 익숙한 우리들에게 단정적 문장 하나로 그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마음과 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 

그러니 편지글을 읽을 때는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이 편지를 쓰는지, 그 배경을 미리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린도 도시 상황은 어떠한지,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등등 미리 알고 있어야 묵상의 깊이가 더해진다. 

앞으로의 묵상을 위해 고린도교회 상황을 더 알아야겠다. 

 

당장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래도 오늘 본문에 집중해 본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특히 바울같은 선교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선교지에 방문할 때마다 죽을 위기를 넘긴다. 

옥에 갇혀 비명횡사할 뻔했다. 

유대인들의 모함과 폭력에 죽을 뻔한 적도 몇번이나 된다. 

각 사건 하나 하나 깊숙히 살펴봐야 한다.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당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는지도 말이다. 

자신이 경험했기에 제자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고통받는 자들 편에 서서 위로를 주신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돌봐주신다. 때로는 물질적으로, 물리적으로 도움을 주신다. 

그분의 도움과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감정이 풍부한 나에게는 그분이 정서를 건드시는 순간, 위로를 경험한다. 

자연을 보고, 그분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분이 행하셨던 사랑의 행위들을 기억하고, 기도 속에 경험했던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돈을 많이 주시는 것,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것, 그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나에겐 그분의 임재와 그분이 주시는 감동이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의 위로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 위로가 없이는 삶을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고, 괴롭다.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고, 악은 그 괴력을 더욱 뽐낸다. 

전쟁과 재해는 언제나 생지옥을 만들고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천지를 진동시킨다. 

그러니 이런 삶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선교 현장은 더할 것이다. 

러시아의 강선교사, 캄보디아의 양선교사… 어디에 있든 그들은 고난 속에 있다. 

익숙한 곳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고 세계로 간다. 

언어도 문화도 새로움이 주는 신선함 이면에 고통이 뒤따른다. 

그들이 있는 곳에 성령님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의 위로가 성령님을 통해 그들 가운데 임한다. 

 

오늘 영종도의 1박 여행은 하나님의 위로다. 

갑작스런 결정이었지만,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꺄르르 웃는 아들 녀석이 그저 사랑스럽다. 

집에 있었으면 TV나 볼 것을, 이렇게 나오니 보드게임도 온 가족이 같이 한다. 

일상 속에 들어오는 위로의 빛이다. 

3월의 시작을 위로로 연다. 

 

 

 

 

[오늘의 기도]

위로의 주님,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1박 여행도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순간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소서.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기억합니다.

익숙함을 던지고 당신의 부르심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매일 매일 당신의 위로가 넘치게 하소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역을 이뤄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21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9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 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서,

10예루살렘을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할머니는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이다.

11아사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12그는 성전 남창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렸다.

13그리고 그는, 자기 할머니 마아가가 아세라를 섬기는 혐오스러운 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자기의 할머니를 왕 대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아사는, 할머니가 만든 혐오스러운 상을 토막내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렸다.

14그렇다고 해서 산당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사모하는 아사의 마음은 평생 한결같았다.

15그는 자기의 아버지와 자기가 거룩하게 구별해서 바친 은과 금과 그릇들을, 주님의 성전에 들여놓았다.

16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늘 전쟁이 있었다.

17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고, 어느 누구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18그러자 아사는, 주님의 성전 창고와 왕실 창고에 남아 있는 모든 은과 금을 모아, 그의 신하들의 손에 들려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시리아의 헤시온 왕의 아들인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면서 말하였다.

19"나의 아버지와 그대의 아버지가 서로 동맹을 맺은 것과 같이, 나와 그대도 서로 동맹을 맺읍시다. 여기에 그대에게 은과 금을 선물로 보냅니다. 부디 가셔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시고, 그를 여기에서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20벤하닷이 아사 왕의 청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려고 자기의 군사령관들을 보내어서, 이욘과 단과 아벨벳마아가와 긴네렛 전 지역과 납달리 전 지역을 치게 하였다.

2 바아사는 이 소문을 듣고는, 라마 건축을 멈추고, 디르사로 거처를 옮겼다.

22그리고 아사 왕은 모든 유다 사람에게 명령하여,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할 때에 쓰던 돌과 재목을 가져 오게 하였다. 아사 왕은 이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보수하였다.

23아사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권세와, 그가 한 일과 그가 건축한 모든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서, 발에 병이 났다.

24아사가 죽어서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도대체 아사는 어떤 인물인가? 

이렇게 개혁적인 일들을 일으킬 용기와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버지 아비야 왕도 우상을 섬겼고, 그의 할아버지 르호보암도 그릇된 길로 갔는데, 

어떻게 아사는 그 길을 버리고 다윗의 따라 평생 한결같을 수가 있었을까? 

정말 놀랍고 의아한 일이다. 

 

열왕기 저자는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가 미친 악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아가가 아세라 신을 섬겼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아세라 신을 따랐다. 

아사는 유다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사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평생 간직했다. 

그러하기에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막강한 할머니의 권력과 영향력을 이겨내고 그 일을 해 낸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을 해 낸 것이다. 

성전 남창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냈다. 

우상을 없애 버렸다. 물론 모든 산당을 없애거나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40년동안 그는 유다를 다스리며 마음을 지켰다. 

어찌보면 아사의 개혁과 그의 곧은 마음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믿음 좋은 사람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없던 질서와 구조를 만드는 것도 엄청 힘든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구조를 개혁하고 쇄신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고, 때로는 더 힘들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혁에는 항시 반대 세력이 있으며, 기존 권력에게 빌붙어서 단물을 빨아먹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사의 40년 통치는 실로 어마어마한 성과다. 

오롯이 하나님만 사모했던 그의 40년을 기억하고 싶다. 

 

그가 비록 하나님을 사모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그에게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북이스라엘 바아사의 침략이 있었다. 늘상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주님을 잘 섬긴다고 해서 긴장과 갈등, 고난과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한 번 어그러진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상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아사만 잘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데, 서로 길이 달라져버리면 그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아사는 어찌보면 계속되는 동족간의 전쟁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40년이면 결코 짧지 않는 기간인데, 그 기간 동안 민족간의 통합과 연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고 안따깝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멋진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다. 

그렇게 항상 기도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기도를 드린다고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뜻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꼭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모해도,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모해도, 외부의 지속적인 공격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을 사모해도, 어려움에 처한다. 

그것이 인생이며, 신앙 생활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그분을 붙드는 삶, 그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다. 

그것이 소명이다. 

 

남북한도 마찬가지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반백년 이상을 살았다. 

외부 세력들은 우리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그 길을 추구해야 한다. 

전쟁이 없는 세상, 평화가 깃든 세상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가장 많이 파괴하는 행위가 전쟁이다. 

전쟁 속에 피는 작은 사랑의 행위가 밝게 빛나는 이유는 전쟁이 너무 참혹하게 사람들의 사랑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드려도,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해도, 남북한이 하나가 되고 서로 존중하며 공존/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타임라인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어찌되었건 아사는 본받을 만한 인물이다. 


주님, 

평생을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사모하며 살았던 아사를 기억합니다. 

비록 어려운 일들이 많았고, 평생 전쟁하며 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저도 그런 길을 걷고 싶습니다. 

다윗처럼 정직하고, 아사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정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매력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성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저의 삶을 평가할 때, 내 앞에서 정직했으며, 나를 사모하던 사람이었다고 말씀해주신다면 그것도 정말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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