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니, 주님의 규례로 나를 살려 주십시오.

 

1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2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왔다. 3 나는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창녀가 되지도 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도 말고, 나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나도 당신을 기다리겠소.”

 4 이스라엘 자손도 많은 날을 이렇게 왕도 통치자도 없이, 희생제물도 돌기둥도 없이, 에봇도 드라빔도 없이 살 것이다. 5 그런 다음에야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서, 주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떨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NIV

They will come trembling to the LORD and to his blessings in the last days(5절).

 

주석

4절. 희생제물과 돌기둥은 신을 예배하는 도구를 나타내며, 에봇과 드라빔은 신의 뜻을 묻는 도구를 말한다(IVP 성경배경주석). 

4절. 4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이 정화의 시기를 가지는 동안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데 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또 다시 호세아를 부르신다. 

자신의 아내 고멜을 찾아 오라는 부르심이다. 

비록 다른 남자와 밤을 같이 보내고, 호세아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 찾아 오라고 부르신다. 

의지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신다. 

감정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신다.

가혹하지만, 그래서 피학적인 사랑, 변태적인 사랑 같다. 

이런 사랑을 하라고 하신다면, 과연 누가 순종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 마음으로 끝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에서 명한 규정, 제사제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욕망과 욕구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이 창녀와 세리를 부르러 온 것이다. 

죄인들을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할 값이 되셨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을 가지고 고멜을 다시 샀다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기 위해 자신을 드리셨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반영한다, 

호세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다. 

정죄하기보다 다시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구매한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공동체에 흘러야 한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기독 공동체는 용서가 흐르는 공동체다. 

하나님의 용서가 몸에 배어 자연스레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게 된다. 

분노를 품고 복수를 꿈꾸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맞지 않는다. 

공분은 죄를 지은 한 개인에게 풀기보다는 그런 죄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는 구조악과 배후악에게 쏟아부어야 한다. 

범법 행위는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인들은 죄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철저히 하나님께 회개하고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며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구조악과 배후악을 드러내고 피해자와 함께 싸워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체는 그렇게 세워진다. 

 

용서와 자비 그리고 인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예수님의 실천이다.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온전히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겠으나, 추구해야 함이 옳다. 

과연 우리는 용서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겠는가? 

 

용서, 겸손, 순종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세대다. 

의지적인 거부라기보다 무의식적인 거부감이다.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아예 이런 단어에 대한 개념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비판, 공정, 개성,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더욱 거세다. 

이런 단어들의 울림이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용서, 겸손, 순종, 헌신, 희생을 정말 포기할 것인가?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가 묵상하고 되새기고 결단해야 할 것은 결국 용서요 순종이 아닐까!! 

 

 

[오늘의 기도]

호세아를 부르신 하나님,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명령을 내리시기보다 사랑과 위로를 전하시는 하나님으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과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당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과 가이드를 주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그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라 하십니다. 

저의 이해를 너머 주께서 주시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신뢰의 마음을 주십시오. 

모든 것이 다 이해되어 따르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따르게 하소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감당할 명령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저에게 순종할 수 있는 용기와 힘도 공급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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