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19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주석

13-15절. 구원 행위는 “피”라는 용어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는데, 피는 희생 제사 곧 죄인과 하나님의 화해 수단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로써 믿는 이들을 위해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의 장애물이 제거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애물도 무너진다. 이 장애물은 모세의 율법으로, 모세 율법은 그 권위를 받아들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분리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따돌림 

할례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를 자신들의 몸에 품고 사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자랑스러움을 너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 정죄, 그리고 따돌렸다. 

판단과 정죄는 개인의 내적 활동이라면, 따돌림은 외적 활동이며, 타인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주는 행위다.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 가부장제의 공동체주의 사회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나마 유대인이 인구통계학적으로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따돌림 당하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교회로 들어오면 유대인의 비중도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에, 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이유로 이방인 출신들을 따돌린다면 이는 상당히 큰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삶의 기준, 윤리/도덕적 기준이 상당히 높고 확고했다. 

그들에게 판단받고 정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버거웠다. 

 

사실 바울조차도 이방인들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정죄적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약속과 무관하게 하나님도 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대로, 욕망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들이었다. 

 

2. 자기 몸으로 부숨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부서짐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으셨다. 

유대인은 정죄하고, 이방인들은 죄책감과 함께 저항감으로 반항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을 일이 없었다. 

교회가 하나되어야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실 교회는 이에 턱없이 못미쳤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 내에서도 싸웠다. 

바울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에 대한 강조였다. 

자기 희생으로 갈등의 두 집단을 하나로 묶으셨다. 

자기 몸을 부수고 망가뜨려서 막힌 담을 허무셨다.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셨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던 아담과 하와를 하나로 묶으셨다. 

두 그룹을 하나가 되게 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셨다. 

 

서로 갈등하는 두 그룹을 중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권한이 많아질수록 꼭 해야 하는 것이 중재다. 

서로 이해 관계가 팽팽할 때, 그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중재다. 

결국 갈등 중재는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가 없이는 중재가 불가능하다. 

 

그 마음을 다시 배운다. 

자기 몸을 부수어 한 몸을 이루신 그분을 바라본다. 

 

[오늘의 기도]

극단적인 두 그룹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님, 

주님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서로 싸우게 두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서로 싸우다 제 풀에 못 이겨 싸움을 멈추게 되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평화입니다. 

막힌 담들이 풀리게 하소서. 

불신의 담들이 무너지게 하소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이 놀라운 경험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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