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1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5 사무엘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누워 있다가, 주님의 집 문들을 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가 환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였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다. 그는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17 엘리가 물었다. “주님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하였다. 엘리가 말하였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Message

Eli said, “He is GOD. Let him do whatever he thinks best.”(18절)

 

[오늘의 묵상]

1. 두려워하다

사무엘이 두려워했던 것은 아주 당연하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들었던 말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비관적인 이야기였다. 

사무엘이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사실을 엘리에게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알았더라면… 

엘리에게 물어보지 말고 조용히 그 음성에 집중했더라면… 

이런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은 복된 일임과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그 메시지는 누군가에게는 복음이지만, 반응하지 않는 누군가에는 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섬기는 왕이신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 나라로 들어오라고 초대했다. 

서열 체계와 경쟁 구조의 사회 속에서 섬김의 왕이신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그 나라로 들어오라고 전했다. 

 

이 복음이 우리 학생들 마음에 깊이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저주의 말

엘리는 사무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저 작은 아이에게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직접적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자신도 점점 확신을 잃어가던 그 때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입양아같은 사무엘에게 임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말하기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단단히 이른다. 

니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 말은 저주의 말임과 동시에 자신이 벌을 줄 수도 있다는 위협의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사무엘에게 할 말이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했어야 했던 말이다. 

‘너희들의 그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심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엄히 꾸짖으셔야 했던 말이다. 

양아들에게만 할 말이 아니라, 친아들들에게 더 엄중하게 해야 했던 말이다. 

엘리는 궁금한 것은 못참았지만, 죄악은 참았다. 

이게 그의 죄악이었다. 

 

3. 그분은 주님이시다

사무엘은 모든 말들을 털어 놓았다. 

과연 엘리가 사무엘의 말들을 예상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 추측한다. 

그는 자기 가족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의 메시지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전과 번영에 대한 메시지일 거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새벽부터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떤 음성이 사무엘에게 들렸을지,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었을지 궁금해서 잠을 설쳤을 것이다. 

막상 사무엘로부터 전달 받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 음성은 분명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렇게 될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가 이렇게 순순히 넘어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 마음의 작동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든다. 

자신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소리에 이렇게 평안하게 반응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좀더 극으로 몰고 가면,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죽을 힘을 다해 회개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요나가 니느웨 성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 성의 백성들과 왕은 진심으로 회개했다. 

그들의 회개는 일상을 포기한 회개였다. 

일상에서 벌여야 할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한 회개였다.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일상을 멈추고 하늘의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겠다는 저주를 내리지 않으셨다. 

 

엘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어차피 죽을 몸,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행동을 고치고, 아들들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그들의 행악을 밝히고, 그들의 직무를 정지했어야 했다.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회개에 전념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그저 태연했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천하태평이다. 

이래서 아들을 제대로 혼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때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 될 때, 어느 순간엔 최선을 다해 그분께 엎드려야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일이다. 

때로는 일상을 멈추고 회개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섬김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시 그려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학생들에게 조금은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라고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다고 용서해 주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전달되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들은 학생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거하도록 도와주소서. 

매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세요.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찌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거짓됨과 위선을 폭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나태하게 반응하지 않게 하소서. 

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당신께 나아가도록 도우소서. 

 

당신의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14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12 때가 오면, 내가 엘리의 집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겠다. 

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을 두고 맹세한다. 엘리의 집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것이다.” 

 

Message

He knew what was going on, that his sons were desecrating God’s name and God’s place, and he did nothing to stop them(13절).

 

[오늘의 묵상]

1. 대화의 적절성?
사무엘은 엘리의 조언을 듣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언약궤가 있는 성전 안, 사무엘은 일종의 경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음성이 들린다. 

이미 세 차례 부르셨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이 알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부르셨다. 

사무엘은 엘리가 시키는 대로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분에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무엘에 대한 칭찬도 축복도 아니다. 

그의 열심과 노력과 성실함에 대한 인정도 아니다. 

사랑한다라는 고백도 아니다. 

시작하자마자 사무엘이 섬기고 따르고 있는 엘리 제사장에 대한 저주요 심판이다. 

 

과연 이 대화가 적절한가?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이렇게까지 무섭게 말씀할 필요가 있었나?
성경에 모든 대화 내용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부담스런 이야기를 다짜고짜 꺼내시는 것이 불편하다. 

사무엘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의 인생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졌다고는 하나, 실제적으로는 엘리의 돌봄과 보호 아래 있는 것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와도 같은 분이 바로 엘리제사장이었다. 

그런 그가 저주받게된다는 것, 심판받아 영영 없어지게 된다는 소리는 충격과 공포였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대화를 시작하셨어야 했을까?

앞으로 이어질 대화까지 꼼꼼히 살피고 싶다. 

 

2. 엘리의 죄악

사무엘에게 처음으로 내뱉으시는 말씀이 무시무시하지만, 그렇다고 엘리의 죄악이 가볍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민족의 지도자이며, 종교 지도자이다. 

그의 아들들도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되어 있다. 

자기 자녀들이 죄악을 저지를 때, 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강하고 엄격하게 훈계해야 했다. 

 

오은영 씨를 비롯한 육아 전문가들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훈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영역에 대해서는, 설득이 아니라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안전의 문제, 부모 권위의 문제에서는 부모가 통제권을 갖고 명령해야 한다고 한다. 

‘이래야만 해’(당위), ‘이렇게 해줄래?’(설득)의 표현으로는 부족하단다. 

‘이렇게 해’라는 명령이 필요하고 그 명령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단다. 

 

어찌보면 엘리는 아이들 양육, 훈육에 실패했던 모양이다. 

제사장 직분은 잘 감당했는지는 몰라도 아이들 양육, 훈육, 교육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것은 큰 죄로 보신다. 

 

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어기는 아들들을 혼내지 못한 엘리는 그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혼내지 못한 이유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한번 꼬아서 다시 생각해보면, 왜 이토록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지도 의문이긴 하다. 

정말 엘리의 잘못이 그렇게 큰 죄악인가? 

자녀 양육이 쉬운 일인가?
아이들 교육과 훈계가 말처럼 그렇게 되나?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이라는 자녀의 양육에 실패하신 것 아닌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시니 나도 불편하다. 

엘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엘리와 제사장 가족에게 너무 많은 권한과 권력을 집중시킨 구조의 문제 아닌가? 

사법 시스템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도록 구조를 만들어서 제시해주셨다면 이런 죄악에 대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극히 현대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3. 영영 씻지 못한다

이런 현대적인 질문은 고대 사회에 그대로 던진다는 것이 부적절한 일인지 알기에, 당시 하나님의 관점을 다시 고려해본다. 

하나님은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악은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고 단정하신다. 

엘리와 그 아들들을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엘리 가족의 죄악은 제사, 제물, 예물로도 씻을 수 없다고 하신다. 

무섭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라니… 

 

당연히 이 순간의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정말 화가 나신 것이 분명해보이며, 엘리의 가문을 제사장직에서 내려오게 할 계획을 세우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라는 것이 일차원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판 메시지의 의도는 진정한 회개이다. 

그렇다면 엘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엘리가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었다면, 그래서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회개했다면 그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영영 씻지 못한다’는 그분의 말씀은 성경 전체로 놓고 볼 때, 수사적 기능을 한다. 

그분은 마음이 변할 수 있는 분이시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그분만의 섭리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그분만의 계획이야 누가 바꿀 수 있으랴!!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바꾸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만만히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여 다시 그분께 나아가라는 말이다. 

 

 

[오늘의 기도]

죄악을 싫어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성품을 다시 묵상합니다. 

거룩한 나라를 계획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상상을 재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또 다시 당신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매일 매일 마주치는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리고 죄악들 앞에서도 

당신의 돌보심과 안아주심을 기대합니다. 

 

주님, 

악한 자들을 벌하소서. 

그리고 가능하면 그 악한 자들도 철저히 회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죄로 인해 고통받았던 자들에게 2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피해보상을 하고 잘못을 참회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평생을 살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정의로움에 부담을 갖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정의로움을 기대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1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주석

3절. 하나님의 등불과 하나님의 궤는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드물다.

주님께서 어느 시대나 똑같은 방식과 빈도로 출현하지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각 시대에 당신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나타나신다. 

방식도 다르고 빈도도 다르다. 

아마 지역에 따라서도 다르게 움직이실 것이다. 

실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시고 환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신다. 

모세에게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다. 

시내산에서는 구름 속 음성과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시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꿈에서 출현하시기도 하신다. 

가장 확실한 것은 역사 속에 예수라는 한 인격으로 출현하셔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드러낸 것이다. 

 

엘리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현하시는 것이 드물었다.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화되었기 때문일까? 

사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매우 역동적인 시기를 보내왔다.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의 시기를 겪은 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고 이웃 민족들의 무수한 침범을 겪었다. 

하나님은 위기에 빠진 그들을 구출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셨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 주셨고, 전쟁에 이기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당시에 전쟁에 실패하면 나라를 존속시킬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한 민족을 삭제하려는 동기는 차고 넘쳤다. 

지금이야 인권이라는 것을 모두 인정하기에,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민족을 절멸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엔 이 모든 것이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고, 주변국들도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움이 필요했다. 

생존이 필요했다. 

 

그러나 엘리의 시대는 아마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출현은 드물었다. 

엘리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어야 권위가 선다. 

하나님의 출현이 있어야 아들들에게도 분명한 어조로 훈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제사는 드려야 하고, 과연 이 제사가 실제 하나님께 상달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자신도 그 의지가 분명하지 않은 선조들의 제도를 평생 수행하다보니 지쳤는지도 모른다.

아들들의 죄악을 그저 허용하기만 그도 하나님께 그 탓을 돌릴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출현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인 너무 적었고 드물었고 드라마틱하지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고,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제사장은 과거의 역사를 항상 돌아보며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웠는지 상기해야 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상고하고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직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백성들을 대하고 후배를 양성하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잘 양육하고 훈계해야 했다. 

그 일에 실패했다, 아쉽게도. 

 

2. 깨닫다.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처음에 엘리는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들은 사람들의 비난과 웅성거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사무엘은 순종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엘리의 말에도 순종적이었다. 

오늘 본문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들리는 작은 음성을 엘리 제사장의 부르심으로 알고 자다가 달려왔다. 

평소에도 이런 자세로 엘리를 대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무엘을 눈여겨 보았다.

일년에 한 번 엄마와 아빠를 보는 것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옷도 기다렸지만, 그저 엄마의 손길과 사랑스런 음성을 기다렸다. 

외로움의 정서를 엘리에게 순종함으로 이겨냈을 것이다. 

사랑받는 사무엘을 보면서 엘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을 거다. 

자신의 아들들과 비교된다. 

사무엘이 참 사랑스럽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를 미움도 생긴다. 

복잡한 감정으로 살아가는 중에 사무엘에게 찾아온 그 음성을 애써 부인했다. 

그냥 꿈을 꾸었나보다 생각했다. 

최근에 하나님의 등장도 드물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자신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말을 거신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에는 깨닫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을 걸고 계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탄 혹은 귀신의 음성인지 구분해 줘야 할 책임이 엘리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무엘에게 그저 반응하라고 명령한다. 

이건 책임을 방기한 행위하고 볼 수도 있다. 

어른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 분별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물론 사무엘이 잠든 곳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회막)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으로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고대 사회에서 들리는 수많은 음성은 철저히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탄과 세상의 신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다. 

어찌되었건, 엘리는 그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렇게 사무엘이 돌아가고 엘리는 많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망나니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제사장 가문이 아닌 집 자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슬픔과 분노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평생 쌓아 올린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이렇게 배신당했다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영적 임무에 대한 바통이 넘어가고 있었다. 

 

3. 지금은?

구약의 본문을 일대일 대응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사무엘이 주님의 언약궤을 지키면서 그 근처에서 잤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 열심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 

사실 과거의 내가 그랬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잤다.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회에서 공부하고 교회에서 잤다. 

장의자를 침대삼아 새벽잠이 없으셔서 4시 30분만 되어도 예배당 등을 켜시는 한 권사님이 오시기 전까지 쪽잠을 잤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실인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당시의 신앙 그자체를 죄악시 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당시에 사무엘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며 외쳤던 부흥사 목사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어리석었다. 

구약의 시대와 신약의 시대는 다르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없으며, 교회가 성전을 대체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어느 공간에 매인다는 주장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님으로 대체되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며 따라서 거룩한 성전이 된다. 

어디에서 자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어디서든 주님을 찾고 주님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물리적 소리로 들리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은 환상이나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드물다. 

도리어 사탄과 귀신의 음성이 창궐한다. 

너도 나도 신의 목소리와 그림과 느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내림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 

지금이야 말로 영을 분별해야 할 때다. 

과거와 미래를 맞추겠다고 앞장서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의 현혹으로 인해 자아식 과잉으로 온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자를 매일 대면한다. 

슬프고 고통스럽다. 

 

어떻게 신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있을까? 

성경이 핵심 텍스트다. 

삼위일체 신학이 분별의 뼈대를 이룬다. 

교회사를 통해 분별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다양한 공부가 필요하다. 

직감으로 확정하지 말라. 

자칫 직감을 타고 들어오는 잡신들의 음성에 놀아날 수 있음을 인정하라. 

주님을 부르고, 성경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신학 전통의 중심에서 무비판적으로 벗어나지 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향하는지 확인하라. 

 

[오늘의 기도]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음성이 많이 가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더욱 크게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성경의 메시지가 더욱 확장되길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하소서. 

성경과 바른 신학으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확하게 분별하게 하소서. 

수많은 감정과 직감과 음성 중에 제 자신의 것과 사단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지혜와 힘을 공급하소서. 

자고 일어나면 디폴트가 되곤 합니다. 

일어나서 첫 시간에 마음과 생각을 몸을 깨우게 하소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윤석열과 그 옹호 세력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믿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은 폭력에 의한 종교 조직의 대형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대화된 예루살렘 종교 조직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절대화하여 성전을 선포하는 어리석은 기독인들을 막아주소서. 

진리에 터 박아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코 폭력적으로 인화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기 희생과 사랑과 용납을 세상이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저도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01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네 조상의 집이 이집트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지 않았느냐? 

28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네 조상 아론을 선택해서, 나의 제사장으로 삼아, 나의 제단에 올라와 분향을 하게 하며, 에봇을 입고 내 앞으로 나아와 내 뜻을 듣도록 하지 않았느냐? 또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불살라 바치는 제물을 모두 너희의 몫으로 차지할 권리를, 네 조상의 집안에 주지 않았느냐? 

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나에게 바치라고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멸시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30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지난 날 나는, 너의 집과 너의 조상의 집이 제사장 가문을 이루어 언제까지나 나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만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1 내가 네 자손과 네 족속의 자손의 대를 끊어서, 너의 집안에 오래 살아 나이를 많이 먹는 노인이 없게 할 날이 올 것이다. 

32 너는 고통을 받으면서,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에게 베푸는 복을 시샘하며 바라볼 것이다. 네 가문에서는 어느 누구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33 그러나 나는 네 자손 가운데서 하나만은 끊어 버리지 않고 살려 둘 터인데, 그가 제사장이 되어 나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되고, 희망을 다 잃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변사를 당할 것이다.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한 날에 죽을 것이며, 이것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35 나는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을 따라서 행동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겠다. 내가 그에게 자손을 주고, 그들이 언제나 내가 기름부어 세운 왕 앞에서 제사장 일을 보게 하겠다. 

36 그 때에 너의 집에서 살아 남는 자들은, 돈 몇 푼과 빵 한 덩이를 얻어 먹으려고, 그에게 엎드려서 ‘제사장 자리나 하나 맡겨 주셔서, 밥이나 굶지 않고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할 것이다.”

 

주석

31절. 놉에서 발생할 대량 학살(22장 참조)을 예언한다.

35절. 사무엘의 사역을 넘어 다윗 시대의 제사장 사독의 사역까지 내다보는 예언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구약을 적용할 때 항상 유의해야 할 점은,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이다. 

물론 연속되는 부분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 특별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정수이며 이것은 구신약 할 것 없이 계속 이어져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불연속되는 지점도 있다. 

구약의 대제사장직분은 신약의 예수님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구약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적용되는 것을 무비평적으로 현대의 그리스도인 신자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그 이해 속에서 새롭게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두 세 번의 해석과 필터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할 때, 하나의 헌법 기관을 만드셨다. 

바로 제사장 직제였다. 

제사장을 세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를 맡기셨다. 

모든 사람들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셨다. 

그 헌법 기관의 수장이 대제사장이며, 엘리는 그런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 중재의 역할을 하는 자의 중심엔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잡아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아들들을 귀히 여겼다. 

그 죄악이 자연스레 아들들에게 이어져, 그들이 규정을 어기고 망나니 짓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 기관은 최고의 윤리의 기준을 가져야 하며, 깨끗한 통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엘리의 가족은 실패했다. 

하나님보다 자녀가 우선이었다. 

 

엘리와 그의 가족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성공하셨다. 

구약 제사장(그리고 왕)의 실패는 온 민족의 실패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제사장과 왕이신 예수님의 성공은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정결예식은 신약의 예수님의 완벽하고 영원한 제사를 통해 더는 반복될 필요가 없다(히브리서). 

제사장과 그의 가족에게 요구되던 직무와 윤리적 기준은 예수님이 만족시키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던 윤리는 어떻게 되는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가? 

쉬운 질문이 아니다. 

약화되는 측면과 심화되는 측면이 있다. 

약화되는 것은 예식과 행위다. 

심화되는 것은 마음과 태도다. 

제사제도, 절기, 정결예식, 종교 행위는 약화된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마음과 태도, 무엇보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서 보이는 높은 윤리적 기준은 심화되고 강화된다. 

약화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만으로 지키는 예식과 행위이다. 

강화되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과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사랑과 겸손과 희생의 태도(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 등)이다. 

구약과 신약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아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마음과 태도도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약의 대대적인 변화, 즉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태도는 강화된다.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소중히 여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 공히 적용되는 명제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더 소중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분을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아가게 한다. 

그것이 우리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라는 명령은 사실 우리를 위해서다. 

우리 인간이 제대로 살 길은 하나님께 우리의 우선순위를 둘 때이다. 

 

엘리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둘 때 했어야 할 일은 아들 제사장들이 제물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허나 신약의 우리가 하나님을 최우선을 둘 때 해야 할 일은 주일 예배 시간에 우리 아이들을 예배당에 앉아 공손히 예배드리도록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그 이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우선을 둘 때 해야 할 일은,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돕는 일이다.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제사 제도(예배나 절기 등)와 윤리적 행위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과 바울의 설교를 통해 드러난 바,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구신약의 불연속면이 여기에 도드라진다.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께서 충족시켜주셨다. 

이제 예수의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요구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에 집중하면 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 

마음과 태도를 변화시켜 삼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 

벌 받을까 두려워하기보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사랑을 누리고 사랑을 나누는 삶.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구약의 하나님을 더 이해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우선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오직 삼위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며, 당신과의 연결과 연합에 더 집중하도록 도우소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점차 변하도록 도우소서. 

그 일에 부모로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도록 도와주세요.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것, 종교 행위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 본질에 집중하도록 제가 잘 가르치게 도와주세요. 

가르침은 설교가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경건함을 허락하소서. 

 

여전히 사회는 내란 상황입니다. 

속히 내란이 진압되고 법과 질서가 확립되게 하소서. 

무도한 자들의 횡포를 막아주세요. 

 

오늘도 주님께 맡깁니다. 

지혜롭게 하루를 보내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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