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1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주석
3절. 하나님의 등불과 하나님의 궤는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드물다.
주님께서 어느 시대나 똑같은 방식과 빈도로 출현하지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각 시대에 당신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나타나신다.
방식도 다르고 빈도도 다르다.
아마 지역에 따라서도 다르게 움직이실 것이다.
실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시고 환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신다.
모세에게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나셨다.
시내산에서는 구름 속 음성과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시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꿈에서 출현하시기도 하신다.
가장 확실한 것은 역사 속에 예수라는 한 인격으로 출현하셔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드러낸 것이다.
엘리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현하시는 것이 드물었다.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화되었기 때문일까?
사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매우 역동적인 시기를 보내왔다.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의 시기를 겪은 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고 이웃 민족들의 무수한 침범을 겪었다.
하나님은 위기에 빠진 그들을 구출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셨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 주셨고, 전쟁에 이기도록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당시에 전쟁에 실패하면 나라를 존속시킬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한 민족을 삭제하려는 동기는 차고 넘쳤다.
지금이야 인권이라는 것을 모두 인정하기에,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민족을 절멸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엔 이 모든 것이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고, 주변국들도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움이 필요했다.
생존이 필요했다.
그러나 엘리의 시대는 아마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출현은 드물었다.
엘리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어야 권위가 선다.
하나님의 출현이 있어야 아들들에게도 분명한 어조로 훈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제사는 드려야 하고, 과연 이 제사가 실제 하나님께 상달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자신도 그 의지가 분명하지 않은 선조들의 제도를 평생 수행하다보니 지쳤는지도 모른다.
아들들의 죄악을 그저 허용하기만 그도 하나님께 그 탓을 돌릴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출현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인 너무 적었고 드물었고 드라마틱하지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고,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제사장은 과거의 역사를 항상 돌아보며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웠는지 상기해야 했다.
말씀을 묵상하고 율법을 상고하고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직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백성들을 대하고 후배를 양성하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잘 양육하고 훈계해야 했다.
그 일에 실패했다, 아쉽게도.
2. 깨닫다.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처음에 엘리는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들은 사람들의 비난과 웅성거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사무엘은 순종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엘리의 말에도 순종적이었다.
오늘 본문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들리는 작은 음성을 엘리 제사장의 부르심으로 알고 자다가 달려왔다.
평소에도 이런 자세로 엘리를 대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무엘을 눈여겨 보았다.
일년에 한 번 엄마와 아빠를 보는 것을 손꼽아 기다렸다.
새옷도 기다렸지만, 그저 엄마의 손길과 사랑스런 음성을 기다렸다.
외로움의 정서를 엘리에게 순종함으로 이겨냈을 것이다.
사랑받는 사무엘을 보면서 엘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을 거다.
자신의 아들들과 비교된다.
사무엘이 참 사랑스럽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를 미움도 생긴다.
복잡한 감정으로 살아가는 중에 사무엘에게 찾아온 그 음성을 애써 부인했다.
그냥 꿈을 꾸었나보다 생각했다.
최근에 하나님의 등장도 드물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자신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말을 거신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에는 깨닫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을 걸고 계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인지, 사탄 혹은 귀신의 음성인지 구분해 줘야 할 책임이 엘리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무엘에게 그저 반응하라고 명령한다.
이건 책임을 방기한 행위하고 볼 수도 있다.
어른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 분별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물론 사무엘이 잠든 곳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회막)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으로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고대 사회에서 들리는 수많은 음성은 철저히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탄과 세상의 신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다.
어찌되었건, 엘리는 그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렇게 사무엘이 돌아가고 엘리는 많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망나니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제사장 가문이 아닌 집 자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슬픔과 분노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평생 쌓아 올린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이렇게 배신당했다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영적 임무에 대한 바통이 넘어가고 있었다.
3. 지금은?
구약의 본문을 일대일 대응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사무엘이 주님의 언약궤을 지키면서 그 근처에서 잤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 열심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
사실 과거의 내가 그랬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잤다.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회에서 공부하고 교회에서 잤다.
장의자를 침대삼아 새벽잠이 없으셔서 4시 30분만 되어도 예배당 등을 켜시는 한 권사님이 오시기 전까지 쪽잠을 잤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실인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당시의 신앙 그자체를 죄악시 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당시에 사무엘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며 외쳤던 부흥사 목사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어리석었다.
구약의 시대와 신약의 시대는 다르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없으며, 교회가 성전을 대체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어느 공간에 매인다는 주장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님으로 대체되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며 따라서 거룩한 성전이 된다.
어디에서 자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어디서든 주님을 찾고 주님과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물리적 소리로 들리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은 환상이나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드물다.
도리어 사탄과 귀신의 음성이 창궐한다.
너도 나도 신의 목소리와 그림과 느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내림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
지금이야 말로 영을 분별해야 할 때다.
과거와 미래를 맞추겠다고 앞장서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의 현혹으로 인해 자아식 과잉으로 온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자를 매일 대면한다.
슬프고 고통스럽다.
어떻게 신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있을까?
성경이 핵심 텍스트다.
삼위일체 신학이 분별의 뼈대를 이룬다.
교회사를 통해 분별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다양한 공부가 필요하다.
직감으로 확정하지 말라.
자칫 직감을 타고 들어오는 잡신들의 음성에 놀아날 수 있음을 인정하라.
주님을 부르고, 성경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신학 전통의 중심에서 무비판적으로 벗어나지 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향하는지 확인하라.
[오늘의 기도]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음성이 많이 가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더욱 크게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성경의 메시지가 더욱 확장되길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하소서.
성경과 바른 신학으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확하게 분별하게 하소서.
수많은 감정과 직감과 음성 중에 제 자신의 것과 사단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지혜와 힘을 공급하소서.
자고 일어나면 디폴트가 되곤 합니다.
일어나서 첫 시간에 마음과 생각을 몸을 깨우게 하소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윤석열과 그 옹호 세력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믿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은 폭력에 의한 종교 조직의 대형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대화된 예루살렘 종교 조직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절대화하여 성전을 선포하는 어리석은 기독인들을 막아주소서.
진리에 터 박아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코 폭력적으로 인화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기 희생과 사랑과 용납을 세상이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저도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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