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였다.
13 제사장이 백성에게 지켜야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도 무시하였다. 누군가가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고 있으면, 그 제사장의 종이 살이 세 개 달린 갈고리를 들고 와서,
14 냄비나 솥이나 큰 솥이나 가마솥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서, 그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사장의 몫으로 가져갔다. 실로에 와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이런 일을 당하였다.
15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기름을 떼내어 태우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의 종이 와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제사장님께 구워 드릴 살코기를 내놓으시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요!” 하고 말하곤 하였다.
16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 종에게 “먼저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원하는 것을 가져 가시오!”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오. 당장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가져 가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17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NASB
Now the sons of Eli were worthless men; they did not know the LORD(12절).
주석
13-15절. 실로에서는 끓는 솥에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부분을 제사장이 갖는 것이 통상적인 관행이었지만,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가지겠다고 우겼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비난을 해도 그 가족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후임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지적할 때도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된다.
대통령이라하더라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면 그에 응당한 처분이 기다린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하나님의 기준이다.
사실 제사에 드리는 고기는 나중에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먼저 고기를 가져가는 행위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큰 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다.
어차피 드려져야 할 제물, 불태워져야 할 제물, 조금 일찍 가져가고 원하는 부위를 가져가는 것이 그렇게 나쁜 죄라고 볼 수 있는가?
17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악들을 중한 죄로 보셨다.
핵심은 주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 정착하고 온갖 이방 민족들의 침략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출해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함부로 대한다.
이 때만 해도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도 그렇고 초대 왕 사울에 대한 것도 그렇고 다윗왕 시절 웃사를 대하시는 것도 그렇다.
무언가 하나님의 엄중한 기준과 규정을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알기를 요청하시는 것 같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이렇게 엄격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성경을 다시 전체적으로 훑어 보아야 하겠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뉘는 시점부터는 하나님이 더 많이 참으신다는 느낌이 든다.
법의 기준이 약화되었다기보다 하나님의 인내가 더 많아진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어찌되었건 하나님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구약의 선과 신약의 선은 또 다르다.
신약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바로 성령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가르침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신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 선을 넘으면 하나님도 기소절차에 넘기신다.
이 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다.
사랑의 하나님을 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한계선이 저 멀리 있다.
공의의 하나님을 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한계선이 이쪽 가까이 있다.
선이 가깝고 분명하면 그만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선이 흐리고 멀리 있으면 그만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말씀 속에서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의 하나님과 내가 인식하는 하나님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 주관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객관성과 보편성의 가혹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약자와 회개하는 자에게 폭넓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신 하나님.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약자에 대한 폭력과 구조적인 악을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끝까지 붙들되, 무엇보다 성경 속 이야기로부터 끌어올려진 세계관에 젖어있는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엘리의 두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한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도 동시에 고려한다.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 성경을 묵상하는 자의 몫이다.
[오늘의 기도]
신학함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끄시는 하나님,
여전히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여전히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한 순간 이해되었다고 넘어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당신의 성품과 각각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당신의 성품을 조화시키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주를 관찰하고 또한 지구를 관찰하듯이 하나님을 관찰하고 또한 예수님을 관찰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신 그 확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신을 유지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게 하소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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