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07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니,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입니다.

 

43 그런데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곧 왔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왔다.

44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신호를 짜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45 유다가 와서, 예수께로 곧 다가가서 “랍비님!” 하고 말하고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다.

47 그런데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성전에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주석

45절.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제사장들의 대리자들이 예수님을 붙잡는다. 밤에 체포한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지도자를 빼앗아 조직된 반격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IVP 비평주석).

48절.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의 비겁함과 악함을 조롱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매일 집권 제사장들의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성전 경내에서 가르치셨음을 상기시키신다. 그들이 그를 잡고자 했다면 왜 그 때 잡지 않았는가? 그들은 성난 군중이 그들에게 반발할까 봐 예수님을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잡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은밀하게 뇌물을 통해 속임수를 써야만 했다. 그들이 쓴 수단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드러낸다(IVP 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랍비님!”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랍비에 불과했다.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은 유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유다는 어떻게 예수님을 팔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었을까? 

복음서 이야기 전체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 일이지만, 일단 오늘 본문에서만 보면 하나는 짐작이 간다. 

“랍비님!”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님은 이제 없다. 

그저 다른 율법 선생님들처럼 랍비일 뿐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으니 그를 배신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어떤 사건,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발표할 때만 해도 기쁨과 감격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 재정과 회계를 맡아 처리할 때도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쟁반에 손을 넣어 음식을 먹을 정도로 가까웠다. 

물론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이 예수님과의 핵심 미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에 못지 않은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예수님이 향유를 붓는 여인을 칭찬하시는 것을 보면서 유다가 배신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가복음 14:4-6
4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6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높냐는 논쟁이 있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이 인사 청탁을 했을 때,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분노하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유다의 마음이 차갑게 식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시작하셨다. 

제자 공동체를 만들어 마치 그곳이 하나님 나라인양 말씀하셨다. 

병이 고쳐지고 귀신이 쫓겨나고 먹을 것이 공급되고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나라를 끌고 들어와서 완성해 나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제자들은 서로 싸우고, 예수님은 죽는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이 바로 유다다. 

예수님은 정말 죽는다. 

그러니 더는 같이 하기 힘들다. 

제자들은 갈갈이 분열될 것이다. 

예수님이 있으니 그나마 연결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없으면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유다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사람이었다. 

돈 계산이 빨랐고,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인식도 빨랐을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이 잡히자마자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다. 

한 사람도 남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여전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만난 풍랑,’ 그 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란 불가능했다. 

 

불쌍한 제자들, 그리고 가련한 나 자신… 

나라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유다 처럼 배신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허나 다른 제자들처럼 누가 더 크고 높은지에 대해 논쟁을 했을 것이고, 

향유 옥합의 값어치에 대해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실 때, 예수님을 떠났을 것이다. 

갑자기 할 말이 사라진다. 

슬픔이 몰려온다. 

가련한 내 모습이 여기에 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죽음의 길로 걸어가시는 과정이지만, 실제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신의 제자들 아무도 당신 곁에 없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을 떠났습니다. 

당신의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의 연약함도 오버랩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과연 제가 제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풍랑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구합니다. 

마음과 몸을 지켜주소서.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합니다. 

제 아무리 잘 관리하려고 해도, 망가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공든 탑도 무너집니다. 

수백년의 건축물로 불에 탑니다. 

막강한 자연의 힘에 견딜 구조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부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1월 06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37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9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41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주석

37절.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의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졸고 있었다. 이미 여기서 유혹에 굴복했으니, 나중에 유혹에 굴복한 일도 이상할 것이 없다(IVP 성경주석).

38절. 제자들은 13:34-36의 비유에 나오는 문지기들, 문을 맡은 종들처럼 ‘깨어 있어야’ 했다(IVP 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독 베드로에게 한 마디 하신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마지막 식사 시간 예수님은 배신자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건 매우 큰 사건이다. 

제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으며, 그 배신자로 의심받던 사람이 식사 자리를 뜬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철처히 예수님을 지켜드리는 것이 제자의 본분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은 자고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베드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크셨던 걸까? 

베드로는 워낙에 다혈질에 성격이 급했다. 

작금의 위기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 같은 캐릭터다. 

파도가 높은 바다로 뛰어든 인물이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잘랐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수석 제자였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을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을 보게 되면,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세 번 졸고 있다. 

예수님은 기도하고 베드로는 잔다. 

이것이 운명의 시간을 맞이하는 두 사람의 차이다. 

 

소명을 다하는 순간이 있다. 

운명의 시간이 있다. 

깨어서 그 시간을 영원으로 경험해야 하는 타임이 있다. 

꿈으로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오롯이 느껴야 하는 시간이다. 

그 순간을 위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며, 사건의 전말을 기억에 담는다.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선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그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래도 이 사건을 기억할 수 있었다. 

깨우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그저 자신만의 시간으로 기도를 채워가실 수도 있었다. 

깨워서 이 상황을 인지하도록 이끄셨다.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자고 있었음을 모두가 알도록, 

그리고 이 운명적인 시간을 그들이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알도록.

 

마음이 있어도 몸이 약하면 운명의 시간에 깨어 있을 수 없다. 

힘들어도 예수님 옆에서 끝까지 기도하려면 마음 뿐 아니라 몸의 건강도 유지해야 한다. 

마라톤 대회 전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모든 컨디션을 대회 당일에 맞추는 것처럼. 

운명의 날을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끝까지 기도하기 위해서. 

 

한 가지 추가한다.

설혹 잠을 잔다해도 그분은 분노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신다. 

그분의 계획을 우리가 그분의 수준으로 100% 알 수 없다는 사실도 주님이 아신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말 일이다. 

최선을 다해 운명의 날을 준비하되, 부족한 부분은 그대로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주님은 나와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 

운명의 날이다. 

그 운명의 날에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다. 

가능하면 깨어서 기도함으로 맞이하고 싶다. 

새로운 세상이 완성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결정적인 운명의 순간에 주님과 더불어 함께 있고 싶습니다. 

깨어서 기도하며 주님의 현존 속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그럴 마음과 몸의 건강을 허락하소서. 

평생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소서. 

자녀로 인해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듯한 사람들을 위로하소서. 

어려운 길을 걸을 때 주님의 위로가 더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4년 11월 04일 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3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4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5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묵상]

관계의 깊은 곳에는 어둠이 존재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환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 

서로의 어둠이 느껴지는 순간, 웃음기는 사라지고 무표정한 응시만 남는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깊은 침묵과 어둠이 시간이 존재한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그분의 침묵이 느껴진다 

그분 안에 있는 어둠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무한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 그 철저한 타자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두려움과 함께 어두움이 느껴진다. 

그분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감에 있어 그분이 나를 잊으셨다는 느낌, 외면하신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지금 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영혼이 아프다. 

고통과 괴로움에 휩싸여 있다. 

그 고통의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원수들의 의기양양함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침묵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원수를 제거해 주실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시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친하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그분을 섬겨왔다고 믿었는데, 원수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그분에 대해 실망과 서운함이 느껴진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계획이 있으시며, 그것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 

한계적 인간이 보기엔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 느리거나 너무 뜬금없다. 

그러니 서운하다. 

감사한 것도 있겠지만, 가끔씩 그분이 자신의 방식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을 보면, 서운함과 때로 분노가 차오른다. 

 

주님이 내 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엄밀히 말하면 내 편이 아니라, 당신 편이다.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 중이시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맞지만, 내 계획을 따라야 하는 존재는 아니시다. 

따라야 할 존재는 바로 나다. 

그분의 계획을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감정이다. 

기다리는 동안 고스란히 느껴지는 수 많은 감정들은 어쩌란 말인가?
분노, 슬픔, 짜증, 실망…

시편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온갖 종류의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는다. 

나 대신 미리 쏟아 낸 것 같다. 

그 시를 통해 나도 감정을 쏟아낸다. 

하나님께 감출 것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난 이제 그렇게 믿지 않는다. 

거룩한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정직이 최선이다. 

그분은 마음의 깊은 곳도 통달하여 아시는 분이시다. 

내가 가진 모든 욕구와 바램과 욕망을 아신다. 

그러기에 그분께 숨길 필요가 없다. 

 

주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드는 자들을 벌하소서. 

 

 

[오늘의 기도]

모든 생각과 감정에 대해 아시는 주님, 

주님께 저의 마음을 올려 드립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서류를 잘 구비하도록, 

서류 심사에 어려움이 없도록 

주님 순적하게 인도하소서. 

 

지인의 아들이 사춘기를 겪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엇나가지 않도록 그 아들을 지켜주세요. 

부모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무속 뿐만 아니라 사적 관계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듯 보입니다. 

무엇보다 전쟁의 단초가 마련될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막아주소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드는 자들을 벌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7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가셨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주석

20 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고’ 그 사람을 배반한다는 것을 들은 고대의 독자들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손님 접대 및 식탁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친밀한 유대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왜 배신자를 특정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누구신지 아셨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 제자를 붙잡아 포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을 통해 그 한 명의 배신자를 처단할 수도 있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사람을 특정해 주신다. 

이 정도 말씀하셨으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가룟 유다를 붙잡아 추궁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도 가룟 유다를 막지 않는다. 

분명히 예수님이 특정했음에도 다른 제자들은 그저 자신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 하는 듯 보인다. 

아님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가?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을 빨리 색출하는 것이 다른 제자들의 의무 아닌가? 

이게 참 의아하다. 

예수님도 배신자가 있고 그가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혈기왕성하던 제자들도 가룟 유다를 그저 방치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점점 미궁에 빠진다. 

가룟 유다가 공동체의 회계로서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이기에 그가 배신자일 리 없다고 다들 믿고 있었던 걸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회개를 기회를 주신 것일까? 

예수님은 왜 이런 이상한 말씀만 하시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으시는지 알 길이 없다. 

 

21절이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예수님은 무고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가룟 유다는 그 예언의 성취를 촉발시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막을 생각이 없으시다. 

이미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거라고 믿고 계셨고, 예고도 하신 바 있다. 

예언대로 가고 있음을 모든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셨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신가? 

 

의문이 남는 말씀이다.

 

2. 근심에 쌓인 제자들

자신들 중에 한 명이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한단다. 

순간 제자들 사이에 적막이 흐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신은 아니라고 장담한다. 

그렇지만 내 옆의 동료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근심과 걱정이 온통 가득하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가끔 제자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과연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신가? 

아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불편하다. 

그분은 뭔가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요청한다. 

자신은 곧 죽겠다고 하시질 않나, 예루살렘 성전 마당의 기물을 파손하질 않나, 제자들 그것도 12명 중에 배신자가 있다고 하질 않나…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것도 불편하기 매 한가지. 

예수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불편함고 주신다. 

그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영성 훈련의 과정이라 믿고 있다. 

마냥 편한 것이 과연 성령님의 역사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을 떠올리고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면, 불편하다. 

평안과 불편이 교차한다.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벅차고 힘들고 지친다. 

그분과 동행하면 여행을 다니는 것도 에너지 빨리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 관련된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버겁다. 쉽지 않다. 

끝까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도, 완벽주의적 이상향을 그리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피곤하다. 

그 속에서 성령님도 나를 더욱 몰아세우기도 하신다. 

그것은 다 나를 위함이다. 

나의 성숙과 성장을 위한 성령님의 배려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