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가 회당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게 되고, 그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0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너희는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지 그 시각에 말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12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13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석

12 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것 같은 괴로움 가운데, 가족이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시간 보내기 

성경 말씀 가운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영성 훈련의 기본이다. 

AI가 순식간에 컨텐츠를 양산해내는 세상이다.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일잘러의 행동양식이다. 

모두가 효과적으로 일하라고 말한다. 

그러다보면 자칫 우리의 존재도 밀착된 시간에 갇히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존재양식이 된다. 

모든 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 그 강박이 존재 양식이 되어 매순간 우리를 압박한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성경에 머무는 것이며, 말씀 안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존재 양식을 연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2. 증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경험한 것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증언이다. 

소설을 쓸 필요가 없다. 

각색이 굳이 필요 없다. 

그저 알고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법정에서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법정에서 말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알았고, 그분과 교제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특히 권력자들 앞에서 그분을 증언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바울이 어떻게 총독과 왕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지 보게 된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예수님을 권력자들에게 나눈다. 

증언하기 전까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맞고 구타당하고 모욕당했다. 

그러나 그는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과의 경험을 계속 상기하는 것, 정리하는 것, 그 관계를 더욱 생생하게 하는 것은 증언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생생할수록, 정리되어 있을수록 말하기가 쉽다. 

계속 기억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다. 

 

3. 생생함

바울은 예수님과의 만남의 생생함을 평생 간직했던 인물이다. 

다마스쿠스 언덕에서 만난 예수님을 항상 기억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는지 누군가가 물어보면 그 이야기가 툭 터져나왔다. 

그의 머리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내 인생 초기부터 일하셨다. 

나의 허약한 몸을 위해 기도해주셨던 금곡교회 목사님의 손길을 통해 예수님은 일하셨다. 

인생의 고비마다 기도로 나아가도록 이끄셨고, 은혜를 베푸셨다. 

내가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 

그 사실을 이 아침에 기억하니 감사가 넘치고, 동시에 증언하고자 하는 마음도 넘친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 그분의 사랑을 알리는 것,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 여전히 나의 부르심이다. 

생생함은 감사와 증언을 낳는다. 

 

4. 박해

생생한 복음의 증언에는 외압이 따른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유무언의 압력이 지속된다. 

조용히 지내라고 한다. 

공권력의 박해와 문화적 박해가 있다. 

법과 제도를 통한 박해가 공권력에 의한 박해다. 

사람들의 시선과 말로 인한 박해가 문화적 박해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욕망과 죄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현재 작동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수정을 가하기 때문이다.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고 지배/피지배 구조를 강화하고, 양극화를 극대화하는 사회 시스템에 돌을 던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박해가 찾아온다. 

예수님의 복음은 개혁적이고 혁신적이고 변혁적이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반대파들이 있다. 

그러니 박해와 압박을 디폴트로 여겨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도리어 제대로된 복음이 아닐 수 있다. 

전체주의, 다수주의와 싸우는 것이 복음이다. 

그렇다고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주의”로 끝나는 모든 것에 흠결을 발견한다. 

복음은 100% 따를 것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에 반발한다. 

 

5. 성령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우리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을 가장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법정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감옥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노래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억지로 외운 답변은 곧 잊어 버린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한 생생한 예수님 경험은 일관되게 증언하게 하는 힘이 있다.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울이 보여준 삶이 그렇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분이 이끄시는 삶을 따른다. 

인생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시는 것을 믿고 따른다.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앞으로도 그런 날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길을 걷겠다.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걷겠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 

당신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일상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많이 떠올리게 하소서. 

성령님의 역사를 확인하는 시간들이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이 아침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다시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자취를 발견하게 하소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의 인생을 축복하게 하소서. 

특히 학사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이끄소서. 

그들의 인생에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ttps://m.woodplanet.co.kr/news/view/1065619177201445

 

핀란드 Kuokkala Church... 교회처럼 보이는 교회

이 건물 건축주의 바람은 ‘교회처럼 보이는 교회’를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교회의 다양한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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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교회 예배당을 보면 꼭 방문하고 싶어진다.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예배당은 이런 특징이 있다. 

  • 높은 내부: 예배당의 내부 높이는 신성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해준다. 높은 천장은 예배 중 소리의 반사를 도와주며, 공간을 더욱 웅장하게 만든다.
  • 나무 재질 마감: 나무는 따뜻한 느낌을 주며, 자연과의 연결을 상징한다. 나무로 마감된 예배당은 신자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한다.
  • 곡선형 천장: 곡선형 천장은 시각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공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이는 예배 중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아름다운 개신교 예배당은 높은 내부, 나무 재질 마감, 곡선형 천장을 통해 신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예배당은 예배의 경건함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해주며, 신자들에게 편안함과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된다. 

뤼튼이 그려준 이미지

이런 내부도 참 고풍스러우며 경건하다. 

쏟아지는 빛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 

조용히 기도하려고 할 때, 이런 예배당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도움이 된다.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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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7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4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7   또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놀라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며,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근이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주석

2 절. 주후 70년에 로마인이 성전을 파괴시켰다. 여기에 나오는 어법은 약간 과장이 섞인 것이다. 어떤 돌들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성전 대부분은 흔적이 사라졌던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4-5 절. 이 호기심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를 알아맞히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의 호기심과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곧바로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도전으로 바꾸신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 헤롯 성전  

헤롯 대왕은 아름다운 성전을 헌사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했다.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항상 사모하고 열망하는 예루살렘에 멋진 성전을 지어주면 인기가 급상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헤롯 성전에 환호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완전히 돌아오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아오신다는 것의 상징이 성전의 재건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성전의 외형은 다른 고대 건축물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공들여 건축한 성전을 바라보며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순례자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나도 멋진 공간에 들어가면 나도 몰래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건축 공학 기술에도 감탄하지만, 곳곳에 담겨 새겨져 있는 예술적 감각에도 놀라곤 한다. 

이런 건물에서 일도하고 예배도 드리고 공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 

가평 생명의 빛 예수 마을의 예배당이 그런 곳이다. 

http://www.jesusville.org/html/main.asp

필그림 하우스도 참 멋들어진다.

예배당에만 들어가도 경건함이 느껴진다. 

샌프란시스코의 예배당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예배 공간이 높고 울림이 좋으며 심플한 스타일이 좋다. 

그런 공간을 만들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외형에 대한 관심 그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외형을 만들고 유지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는 항상 살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고자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빨고 있는 기득권자과 그 시스템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걸 오랫동안 봐 오셨다. 

성전의 테이블을 뒤엎으신 이유가 있다. 

이방인도, 가난한 사람도 어떤 사람도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곳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그들은 멀어지고 있다. 

돈 많은 사람들만 성전에 모인다. 

전 세계 유대교 부자들만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올 수가 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먼 거리를 쉽게 여행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성전 장사 테이블만 뒤엎으신 것이 아니다. 

결국 성전의 모든 것들이 망가지게 뒬 것이다.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 순례 행렬은 마감될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성전이라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성령님은 한 공간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오고가며 전 세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게 하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전쟁과 기근과 종교 사기는 계속 될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은 곳곳에 즐비할 것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를 과연 찾아 볼 수 있을까! 

점점 찾기 어렵다. 

외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예너지와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 

그걸 잘 운영하려는 행정주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행정주의에 빠지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 외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 버리고, 거기서 본말의 전도가 일어난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사람들의 변화는 점점 일어나지 않고, 조직의 유지만 남게 된다. 

 

교회도 선교단체도 비슷하다. 

하나님의 뜻보다 기관의 유지가 더욱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다수의 목소리가 예언자의 목소리를 눌러버린다. 

민주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다수가 느끼는 불편함이 하나님이 느끼는 우려를 넘어선다. 

성경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 구절로 전락한다. 

말씀이 자신을 바꾸는 경험을 거부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말씀을 재구성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의견으로부터 나온다. 

다수의 의견이 다 맞다고 생각하는 한, 성경의 메시지는 초라하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날 것 그대로 씹는 것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나의 정념과 선호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난도질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경험이 성경을 찢어 덕지덕지 모자이크 추상화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오늘의 기도]

하나님, 

외형보다 내부를 건실하게 만드는 일에 우선을 두게 하소서. 

어떤 건물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얼굴도 나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부르심에 집중하게 하소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주님의 혁신을 기대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돈이 있다고 자랑하지 않게 하소서. 

가진 것이 조금 있다고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보다 내일 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게 하소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주석

42 절. 그 과부가 낸 ‘동전’ 혹은 ‘렙돈’은 당시의 가장 가볍고 가장 값어치가 없는 동전이었다(IVP 성경배경주석)

 

44 절. 요지는 그 가난한 과부는 적은 헌금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적은 금액이 그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지만, 큰 금액을 헌금하는 부자는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과부의 적은 헌금은 약자를 너그럽게 대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해 온 성전 기득권자들의 착취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 헌금함 맞은 편  

예수님이 이상한 행동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을 비판한 뒤에 갑자기 헌금함으로 가신다. 

헌금함이 뻔히 보이는 곳, 헌금함에 얼마나 많은 돈을 내는지 훤히 보이는 곳,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으신다. 

이렇게 자리를 잡으시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마가는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적고 있다.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가르치시다가 말고 헌금함에 집중하고 계신다. 

 

지각있는 현대 교회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 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성도들을 돈으로 평가하는 버릇이 생기기 때문이다. 

돈에 예민한 목사로 소문나는 것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현금 인출기 쯤으로 보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 누가 얼만큼 헌금 하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유심히 관찰하셨다.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하기 좋아하고 상석에 앉길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탕진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도리어 빼앗기도 한다. 

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함이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 가장 보잘 것 없는 동전 두 개를 주목하신다. 

그 여인의 믿음은 훌륭하지만, 그를 돕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은 더욱 불거진다. 

 

예수님이 헌금함을 주시하자 제자들은 어리둥절이다. 

가르치다 말고 시선이 헌금함에 꽂히자 제자들도 덩달아 쳐다보게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율법학자 및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정말 때가 왔구나 싶었을 것이다. 

사실 그분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성전정화 사건을 일으키셨던 분이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과 논쟁하셨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는 헌금함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제자들 중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온갖 생각과 상상이 그려 졌을 것이다. 

이제 논쟁이 아니라 돈을 빨리 챙겨서 혁명 자금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누가 헌금을 많이 하는지를 확인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생각이 제자들의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의외다. 

돈 많이 내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장 적게 낸 사람에게 주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대체로 그렇다.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관점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신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사람이 누군가? 

세례 요한도 아니고, 제자들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온 재산을 갖다 바쳐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이 가난한 과부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적은 누군가? 

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그 작은 돈도 갖다 바쳐서 종교 시스템을 유지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은 충격 그자체다. 

그분과 여행할 때는 청심환이라도 챙겨야 한다. 

아님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할 수도 있다. 

가까이 있다가는 충격과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오늘의 기도]

의외의 주님, 

주님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리고 저도 놀랍니다. 

조용히 살고 싶은 저에게 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주여 이끌어 주소서. 

저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소서. 

지평을 열어 주소서. 

 

깨끗한 그릇으로 빚어 주소서. 

깨끗한 나무 그릇으로 조각해 주소서. 

가능하면 더 큰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물과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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