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10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11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ESV

And Jesus said to them, “I ask you, is it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9절) 

 

주석

예수를 고발할 구실(7절) 안식일을 벌한 죄에 대한 처벌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이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음을 전하고 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엿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살피고 엿보고 있다. 

직접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관찰하다가 이제는 좀더 가까이 와서 엿보기 시작한다. 

엿보는 것은 인류의 오랜 습관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엿보고, 정탐하고, 스파이를 보낸다. 

가까이서 봐야 원수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적대자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비판을 주의깊게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알았다. 

예수님은 자신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며 대적해야 할 대상이며 심지어는 사단에 속한 자로 인식했다. 

이제는 배척하고 살해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엿보기 시작한다. 

과연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은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신다. 

엿보든 말든, 그저 당신의 일을 하신다. 

도리어 당당하게, 대놓고, 고발할테면 고발해봐라 식으로 행동하신다.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사실 손마른 사람은 죽을 병이 아니다. 

다음 날 고쳐도 될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 

안식일 규정에 자유로우시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규정집으로부터 따로 걸어다니신다. 

 

언제나 사건은 안식일에 벌어진다. 

안식일 규정이 가장 눈에 띄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규정은 한 번 어기면 쉽게 눈에 띈다.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적극적으로 노린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는 일을 한다. 

예수님은 비록 죽을 병은 아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서로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허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새롭게 해석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누가 옳은가? 

 

2. 분노

예수님이 촉발한 측면도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도 그렇지만, 당당히 율법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예수님이 미치도록 싫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그 사실도 분노의 지점이다. 

왜 예수를 따르는가!! 

대중들은 그렇게 율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가!! 

그동안 율법학자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을 가르쳐 왔던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들의 활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페르시아 시대에 예루살렘 성이 회복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점일획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 오경(토라)에 등장하는 명령문을 총 613가지로 정리했 놓았다. 

하라 식의 긍정 명령 248개, 하지 말라 식의 부정 명령 365개. 

대단한 노력이다.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민족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율법을 어기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과 그분의 해석, 그리고 그런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을 격노케했다. 

 

결국 그 분노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모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분노는 심리적 살인 뿐 아니라 결국에는 물리적 살인을 낳게 된다. 

가인과 아벨을 보라. 

아벨에게 분노하고, 아벨을 받아들여준 하나님께 분노한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도 무섭지만, 속으로 삭이는 분노도 못지 않게 무섭다. 

다윗의 충복 요압은 분노가 많았고, 결국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바리새인들처럼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무턱대로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내 기준에 맞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나의 뜻에 그분을 맞추는 것은 에러다. 

그러나 나에게 맞추지 않는다고 그분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 

그 분노와 짜증은 하나님에게만 향하지 않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향한다. 

사랑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는 현장이 바로 가정이다. 

가족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때로 마음이 닫힐 때가 있다. 

분노가 일 때가 있다.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기독교가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매우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오늘의 기도]

인간의 높아진 기준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대로 성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잣대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기준 안으로 포섭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의 성이 만들어지고, 그는 하나님이 되어 갑니다. 

개인도 조직도 그 길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의 기준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더욱 딱딱한 개인과 조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게 도와주소서. 

주님과 더욱 따뜻한 대화를 많이 나누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아 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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