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15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0 사람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살며, 고통과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1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비틀거려도 돕는 사람이 없었다.

13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그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14 어둡고 캄캄한 데서 건져 주시고, 그들을 얽어 맨 사슬을 끊어 주셨다.15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16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

 

17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18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19 그 때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20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21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22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주님이 이루신 일을 즐거운 노래로 널리 퍼뜨려라.

 

ESV

Some sat in darkness and in the shadow of death, prisoners in affliction and in irons, for they had rebelled against the words of God, and spurned the counsel of the Most High(10-11절).

 

주석

고통과 쇠사슬에 묶임(10절) 이 시를 바벨론 포로 귀환과 연결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IVP 성경주석).

 

인자하심(15절) 이 개념은 성경에서 여러 용어로 표현되었다. 구약의 주요 용어는 헤세드로, 이는 친절이나 은혜를 의미하며, 그의 백성을 자비롭게 대하도록 되어 있는 은혜로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킨다(IVP 성경사전).

 

시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어두운 과거를 언급합니다(10-11절).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17-19절).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덕분에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13-16절). 시인은 이러한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사람 모두에게 주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21-22절).

 

이스라엘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격으로 포로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렇기에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까요? 감사의 마음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부르짖는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도와 줄 사람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대상은 사람이나 귀신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인자하심이 영원하며 자비로우심이 위대하다. 

그분은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로 인해 멸망했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내 주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도록 인도하신다. 

 

피곤이 고난이 되는 경우는 그 피곤으로 인해 몸이 점점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 때다.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들의 중대성, 의무감 등으로 멈출 수 없을 때, 고통스럽다. 

노동이 고난이 된다.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의 삶이 그러했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최근 몸이 고되다는 것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배워야 하고, 소통을 증진시켜야 하고,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고, 읽어야 하고, 만나야 하고, 그리고 기획해야 한다. 

나이 들면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바뀌고, 인구 구조가 바뀌니 과거에 내가 봐 왔던 어른들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난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일들에 매달리고 있다. 

아이는 어리고, 가정은 여전히 챙겨야 할 것이 많다. 

쉬고 싶지만, 쉴 수 없는 환경… 

사실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라이프 스타일 혹은 성격일 수 있다. 

성격상 조용히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환경이다. 

조용히 기도하고 싶고, 조용히 하나님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이게 점점 어려워진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든다. 

그나마 이렇게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시간이 나를 잡아준다. 

고난 같지 않은 이 일상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나의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조용히 글을 적지만, 마음은 불이다. 

 

책임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분의 은혜가 절실하다. 

인자하심이 크신 그분의 도움이 절실하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노래를 부르라고 요청한다. 

22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주님이 이루신 일을 즐거운 노래로 널리 퍼뜨려라.

주님이 하신 일들을 노래로 표현하고 그 노래를 널리 퍼뜨리는 것.

그래서 시인도 이런 시들을 많이 쓰고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주님이 하신 구원의 역사를 즐겁고 기쁜 노래로 부르는 것은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다. 

뒤늦게 찬양사역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찬양이 즐겁고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싶은 열망이 크다. 

하나님의 역사를 즐거운 찬양으로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는 광경이 참 좋다. 

 

부르짖음과 노래가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예배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과 심사가 쏟아져 나오는 곳,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를 상기하고 기념하는 곳, 

그곳이 예배다. 

제발 그 예배가 더욱 치열하고 아름답게 드려지길 고대한다. 

솔직한 마음들이 쏟아지고, 그 마음 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뒤덮는다면, 

인간은 살 용기를 얻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의지를 다진다. 

 

주일의 예배든, 일상의 예배든 상관없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심사+하나님의 구원 역사… 이 둘이 만나는 곳… 

그 예배를 지금 드린다. 

 

 

[오늘의 기도]

사람의 모든 감정과 마음의 일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 

지금 이 순간 피곤함을 잠시 뒤에 두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 마음을 아십니다. 

연약함을 아십니다. 

다시 시작할 힘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그 놀랍고 신기한 일들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을 바꾸시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그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게 하소서. 

선명하다 못해 깊은 찬양으로 터져나오게 하소서. 

저의 일상을 구원하소서. 

수 많은 일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지켜나가게 하소서. 

그 모든 중요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3 그들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4 이집트의 왕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들어라.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어서 물러가서, 너희가 할 일이나 하여라."

5 바로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집트 땅의 백성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들이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 드는구나."

6 바로는 그 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령하였다.

7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이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주지 말아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8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같게 하여라.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수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

9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

 

주석

그 주가 누구인데(2절) 바로는 모세와 아론, 특히 하나님을 향해 철저한 모욕을 드러냈다. ‘여호와가 누군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호와’를 아는 주제가 이후의 장들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IVP 성경주석).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는 주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지만, 바로는 그 ‘주’가 누구냐고 모욕하며 비꼽니다(1-2절). 모세는 바로의 거절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지만 쫓겨나고 맙니다(3-4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전보다 더 강도 높은 노역을 시키도록 명령합니다(6-9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무능함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넘어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바로에게 당당하게 나아갔지만, 강력한 반대를 마주합니다.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다가 강한 반대에 직면한 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파라오는 역시 왕이었다. 

왠만한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신이라고 여기고 있다. 

수 많은 신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들의 노예를 데려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신이 신전을 짓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을 데려간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렵다. 

안그래도 인구가 늘어 산아제한 정책을 펴기도 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가며 통제하고 있는데, 

그들이 광야에 나아가 몇십만명이 집회를 가지면, 그동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성토 대회를 가지면, 

그 위력과 위협이 얼마나 클 것인가? 

파라오 입장에서는 결코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모세와 아론이 뭐기에… 

모세는 왕궁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이지만, 과거에 살인을 저질러 광야로 도망친 작자 아닌가? 

아무런 권세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와서 몇십만명의 노동자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니, 이건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라오 입장에서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 두 사람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집트의 왕은 역시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묻는다. 

도대체 그 주가 누구냐고. 

도대체 히브리 백성을 끌고 나오라고 말하는 신이 누구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의 명령을 들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더 강력한 노동명령을 내린다.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도록 강경책을 구사한다. 

모세와 아론의 말들이 파라오의 화를 돋구었다. 

 

상황은 더 악화일로다. 

자칫하면 파라오의 근위병에게 잡힐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소식을 접하면 모세와 아론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박해고 고난이다.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 

며칠 동안 모세와 아론이 겪었을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가족들은 챙길 여력이 없다.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 

겨우 몸을 일으켜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그대로 진행하려고 해도, 모든 일이 다 수월하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꼬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묶인다. 

꿈과 비전을 말하고, 미래의 소망을 말해도 꿈쩍도 안한다. 

도리어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어렵고 힘든 길을 제시하는지 묻는다. 

마음이 떠나고 몸도 떠난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하나됨이 무너진다. 

갈등과 긴장이 증폭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진다. 

한 팀이 되어야 할 사람들끼리 와해되고 분열되어 산산히 흩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도 왜곡되고 저 운악산 꼭대기에 버려진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 말할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혹시 잘못된 것이라고 회의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헬륨 풍선처럼 북녘으로 사라진다. 

 

절망의 순간, 실패의 순간, 비통의 순간, 원망의 순간. 

우리 인간이 겪는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순간들이다. 

기대가 낭패가 되고, 소망이 원망이 되며, 비전이 허상이 된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원래도 그렇게 예상했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했었고, 그 중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원망의 마음이 돌아간다. 

왜 나를 부르셨나? 왜 나를 이곳으로 이끄셨나? 

모든 것이 그분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날이 있다. 

그런 일주일이 있다. 

그저 그럴 때는 그냥 있어야 한다. 

그분이 일하시길 멍하니 쳐다본다. 

하늘이 조율해 주시길…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길… 

기도의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흩어졌던 꿈들이 다시 모이기를 바라며 운악산 정상을 쳐다본다. 

 

 

오늘 본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사실과 적용이다. 

 

1. 세상은 효율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 파라오는 일의 관점에서만 히브리 백성들을 대한다. 

- 모세와 아론에게도 너희가 할 일이나 하라고 말한다. 

-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 원래도 그랬지만, 당시에는 안식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 

-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 예배드리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3. 한 번의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마라. 

- 파라오에게 한 번 협상해서 실패했다고 그것이 실패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 원래 큰 일일수록 오랜 걸리는 법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라. 남북의 통일은 아직도 달성되지 못했다. 

- 실패로 여길 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으로 전환하라. 

 

구정이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세상의 효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그리고 실패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말고 다시 그분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새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 명절을 통해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새로운 다짐들을 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세상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예배드려야 살 수 있는 예배자의 관점으로 보게 하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졌을 때,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처량한지 알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변화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게 하소서. 

그 올바른 관계에서 올바른 변화가 일어남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9월 16일 목요일 

 

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사 년째 되는 해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2솔로몬 왕이 주님께 지어 바친 성전은, 길이가 예순 자이고, 너비가 스무 자이고, 높이가 서른 자이다. 3성전의 본당 앞에 있는 현관은, 그 길이가 스무 자로서, 그 본당의 너비와 똑같고, 그 너비는 성전 본당 밖으로 열 자를 더 달아냈다. 4그리고 그는 성전 벽에다가 붙박이창을 만들었는데, 바깥쪽을 안쪽보다 좁게 만들었다. 5그리고 그 사방에 골방을 만들었다. 성전의 벽 곧 본당 양 옆과 뒤로는, 쭉 돌아가면서 삼층으로 다락을 만들었다. 6아래층에 있는 다락은 그 너비가 다섯 자이고, 가운데 층에 있는 다락은 그 너비가 여섯 자이고, 삼 층에 있는 다락은 그 너비가 일곱 자이다. 이것은 성전 바깥으로 돌아가면서 턱을 내어서, 골방의 서까래가 성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다.

7돌은 채석장에서 잘 다듬어낸 것을 썼으므로, 막상 성전을 지을 때에는, 망치나 정 등, 쇠로 만든 어떠한 연장 소리도, 성전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8가운데 층에 있는 골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성전의 남쪽 측면에 있으며, 나사 모양의 층계를 따라서, 가운데 층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또 가운데 층에서부터 삼층까지도 나사 모양의 층계를 따라서 올라가게 하였다. 9이렇게 해서 그는 성전 짓기를 완성하였다. 성전의 천장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빤지로 덮었다. 10또한 성전 전체에다가 돌아가면서 높이가 저마다 다섯 자씩 되는 다락을 지었는데, 백향목 들보로 성전에 연결하였다.

11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12“드디어 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13또한 나는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살겠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

14 솔로몬이 성전 짓기를 마쳤다.

 


모든 것이 구비되었다. 

국제적인 협력 속에서 나무와 돌이 준비되었다. 

솜씨 좋은 건축 기술자들을 대거 불러 모았다. 

당시에 가장 보기 좋은 성전으로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험한 성전 모양 중에 가장 좋은 모습을 선택했을 것이다. 

물론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회막을 지으라고 하실 때 알려 주셨던 길이, 너비, 높이 등을 고려하면서 지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화려한 성전이었다. 누가봐도 당시 최고의 기술과 아름다움을 가진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듯 보인다. 

 

12“드디어 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13또한 나는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살겠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

 

오랫동안 준비되었던 성전 공사가 약 7년뒤 완공되었다(왕상 6:38). 

길이가 27미터, 너비가 9미터, 높이가 14미터였다. 

사실 현대 고층 빌딩같은 건물이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이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불러, 최고의 자재들을 사용해서,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7돌은 채석장에서 잘 다듬어낸 것을 썼으므로, 막상 성전을 지을 때에는, 망치나 정 등, 쇠로 만든 어떠한 연장 소리도, 성전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채석장에서 돌을 치수에 맞게 잘 다듬는다. 

정확하게 치수에 맞추었기 때문에 공사 도중에는 망치, 정 등의 연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돌을 다듬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밀한 설계와 도면, 그리고 기술자들의 노고가 들어 있다. 

사전에 정밀하고 치밀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이런 방식으로 일할 수는 없다. 

먼저 시뮬레이션을 다 해보고, 몇번이고 검토를 한 뒤에,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만큼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감독관인 아도니람이 대단해 보인다. 

솔로몬도 최종 의사 결정권자로서 그 때 그 때 지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도니람은 인력 사용과 구체적인 설계와 재정 운용 등 아주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일들을 잘 감당했다. 

감독관으로서 너무 일을 잘 하고 있다. 

 

7년 동안 아도니람은 어떤 생각과 마음이었을까? 

어떻게 7년동안 이 큰 공사를 진행시켰을까? 

한번 그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계획도 있고, 설계도 있고, 자재와 인력도 있지만, 사실 이런 공사는 언제 끝을 낼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변수가 많다. 

사고도 많이 일어날 것이다. 

채석장에서도 사고가 나고, 나무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돌을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사고가 난다. 

돌을 올리고 나무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당시 최고의 기술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불의의 사고는 항상 뒤따른다. 

설계대로 잘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7년을 한결같이 집중한다. 

매일 매일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관련있는 모든 사람과 자재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 

최고의 신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장난이 아니다. 

솔로몬 왕의 최고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이다. 

실무 책임자로서 아도니람은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잘 해냈다.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닮았다. 

빛과 어둠을 만들고, 하늘, 땅, 바다를 만들고, 해달별과 생물, 동물들을 만드셨다. 

에덴을 지으시고 사람을 두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이 거할 아름다운 성전을 만드셨다.  

최고의 걸작품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이 너무 좋으셨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성전이 조화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와 자연이라는 하나님의 성전은 이제 솔로몬과 아도니람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는 상징적 건축으로 압축된다. 

신축된 성전을 보면서 온 우주 가운데 왕으로 거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성전에서의 활동으로 더 깊게 맺어진다. 

성전의 모습과 그 안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머리와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각인하다. 

그렇게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 자연이라는 하나님의 성전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이 성전의 기능이다. 

인간의 건축물로서의 성전의 역할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 성전으로 인식의 확장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이 창조 행위에 솔로몬과 아도니람이 참여한 것이다. 

 

지금도 교회와 예배의 기능은 성전의 기능과 유사하다. 

교회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자연 성전을 마음 속에 각인한다. 

하나님은 교회당 건물에 갇혀 계시지 않는다. 예배 시간에만 일어나 앉아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연 성전에 계신다. 

성전으로서의 우주와 만물에 계신다. 

매주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우주 성전이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장소와 시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만난다. 

이것을 계속 각인해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쉽게 부패해서 자꾸 각인시켜주지 않으면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정기적인 예배의 중요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자연 성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큰 성전, 바로 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의식 뿐인가? 

아니다. 

다시 12절을 본다. 

 

12“드디어 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13또한 나는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살겠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 삶,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지키는 삶.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주목하는 삶일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계명에 순종하고, 약속 성취에 주목하는 것…

자연 성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법도와 율례와 계명을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을 위한, 우주와 만물을 위한 그분의 계획과 약속이 어떻게 들어맞고 성취되는지를 보면서 더욱 활성화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더욱 그분의 계명을 따르고 싶어진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법도를 더욱 지키고 싶어진다.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일상의 삶이 있다. 

진행해야 할 모임이 있고, 논의해야 할 안건들이 있다. 

그리고 돌봐야할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일상은 자연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이다. 

마치 주님 앞에서 행하듯 더욱 겸손하게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을 음미하고 싶다. 

그렇게 평안하고 꽉찬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계신 하나님, 

오늘도 주님을 부릅니다. 

아도니람처럼 오랜 시간 감당해야 할 프로젝트 앞에서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버겁고 힘들고 지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길 원합니다. 

내 의지와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감당하길 소망합니다. 

 

자연 성전에 계신 하나님,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 속에서 온 우주에 계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일상의 삶을 살 때, 곳곳에 배어있는 당신의 숨결과 손길을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당신의 일하심을 주목하길 원합니다. 

당신의 일하심을 감지하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약속을 이루시는 당신의 신실함을 보길 원합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고쳐주소서. 

마음과 정서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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