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25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제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놓아 주셨는데,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할례 때문이다.

27 주님께서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산에 가서 모세를 만나서 입을 맞추어 문안하였다.

28 모세는, 주님께서 자기를 보내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과, 자기에게 명하신 이적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아론에게 말하여 주었다.

29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았다.

30 아론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주석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24절) 이집트에는 모세를 죽이기 위해 찾는 이집트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피흘림의 죄를 지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정상 참작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도피성이 지어졌다. 하지만 모세는 미디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 피난처를 떠나게 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더 나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IVP 배경주석).

 

이집트로 가던 중에 모세는 뜻밖의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여정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십보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24-26절). 그 후 모세는 아론을 만납니다(27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은 모세에게서 아론에게로, 그리고 아론에게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해집니다. 말씀과 이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믿게 되었습니다(28-31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십보라의 도움과 아론과의 동역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모세의 부정적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합니다(31절). 짐을 나누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십보라와 아론 같은 동역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은 난해한 분문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 

기껏 조용히 숨어 지내던 모세를 찾아내서 위대한 부름에 응답하도록 설득하셨다.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그를 죽이려고 하신다. 

그래서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추정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언약 백성으로서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즉 히브리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약 백성임을 증명한다. 

모세 자신은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아직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 민족을 탈출시키라는 엄청난 부르심을 갖고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모세 스스로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고대 가족은 가장의 연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가장의 규정과 관례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가족 속에 계속 살 수 없다. 

혹은 가족 구성원의 탈주를 방치한다면 가장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제의 특징이다. 

언약 백성은 할례가 그 징표다.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들을 언약 백성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나님이 원치 않은 일이다. 

 

둘째, 배경주석에도 나왔듯이, 모세의 죄값을 치러야 했다. 

모세는 사람을 살인했던 사람이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일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도피성 규정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설명은 나에겐 설득력이 없다. 

미래에 있을 도피성 제도를 끌고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고, 죄 값을 아들의 할례로 속죄한다는 개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경 주석과는 별개로, 나는 첫째 이유가 좀더 타당하게 들린다. 

모세와 그의 가족은 이제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탈출시키는 민족의 리더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아들도 할례를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례의 민족의 리더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의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할 예식을 모세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이미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모세와 십보라는 과거에 이 문제로 부부 싸움을 했을 수도 있다. 

십보라 원가족의 문화는 아들에게 할례를 주는 것을 혐오했을 것이다. 

굳이 아들에 몸에 칼을 대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어느 부모인들 좋아하겠는가!

모세와 십보라의 의견이 대립되었을 것이다. 

처가 살이를 하며 이집트와 동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세 입장에서는 강력하게 대립하는 아내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자신의 민족 정체성,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로서의 자격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다른 히브리 사람들에게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은 약속, 언약에 집요하신 분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실하신 분이시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상대방도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를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사에 들어오셨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치와 모멸을 겪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인류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내고 약속의 피, 할례의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피를 흘리더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아니 과연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는가? 

하나님은 나와 무슨 약속을 하셨던가? 

성경을 통해 하신 최종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말고 개인적으로 나와 하셨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는가? 

과연 그런 것이 있었나? 

그분이 하셨던 약속과 내가 드렸던 약속을 계속 기억하고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며, 소홀히 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다.

 

모세의 말을 듣고 그의 형 아론과 동족의 장로들이 믿고 받아들인 것은 좋은 징조다. 

첫발은 잘 디뎠다. 끝까지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원래 일이란게 그렇다. 

좋다가도 나쁘게 흘러가고, 나쁘다가도 좋게 마무리 된다. 

앞으로의 모세과 히브리 사람들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대충은 알지만 다시 궁금해진다. 

자주 보는 영화처럼, 자주 보는 드라마처럼, 모세 드라마의 다음 장면이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오늘의 기도]

약속에 진심이신 하나님, 

저도 하나님과의 약속에 더욱 천착하게 하소서. 

신실하게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합리화, 정당화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동시에 사석화, 율법주의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않게 하소서. 

약속을 신신하게 지키시어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약속을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서 혹 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가 그 자리에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그 순간에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2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6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주석

불꽃, 신을 벗음(2, 5절)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출애굽 이야기 도처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불과 연기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하나님의 위엄 있는 본성 때문에, 신중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했다. 모세는 자기 신발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했다(IVP 성경주석).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나타납니다(1-2절). 신비한 현상에 주목한 모세는 떨기에 가까이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모세는 두려움 가운데 응답합니다(4-6절). 

 

하나님은 평소에 익숙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떨기에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2, 4절). 수많은 정보와 자극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떨기나무의 불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집트에서 40년, 미디안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이렇게 모세의 인생이 구분된다. 

40년간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치는 목자로 살아간다. 

야곱도 장인의 집에서 오랫동안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다. 

자기 본향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착하는 곳은 처가다. 

40년간 그는 이집트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다. 

성실한 목자로 살아간다. 

민족의 고통을 대변하는 대변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족에 대한 불의한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투사의 삶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양을 치며, 가족을 돌보며, 일상을 별 탈 없이 살아간다. 

 

지극히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항상 보오던 떨기 나무가 이상하다. 

불길이 올라 황급히 양떼를 불로부터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똑같은 양상으로 불이 머물러 있었다. 

번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색깔도 이상했다. 뭔가 특별한 빛이 흘러나왔다.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세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두 번 부르셨다. 

모세는 어떤 신이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기이한 이적을 행하시는 신이라면 일단 대답을 해야 했다. 

이어서 음성이 들린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네 신을 벗어라”

평소에 다니던 길이다. 평소에 보았던 땅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땅이 거룩한 곳이라 하시니, 놀라웠다. 

새롭게 발견한 땅이 아니었다. 평소에 못보던 깊숙한 동굴도 아니고, 산속 깊은 곳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처럼 양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에 왔을 뿐이다. 

지난 40년간 들락거리던 장소다. 

갑자기 거룩한 곳이 되었다면, 그것은 지금 그 곳에 신적 현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된다. 

 

지금 말씀을 읽고 성경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 그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 안만 거룩한 곳이 아니다. 

어떤 요일, 어떤 장소도 그분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모세에게 다가온 분은 히브리 민족의 신이었다. 

이집트에서도 많은 신을 보고 알았다. 

미디안의 제사장이 섬기는 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의 신은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신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었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들과 함께 했던 신,

그분들에게 약속을 주셨던 신, 

그래서 한 때는 그 신의 약속을 믿고 동족들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만들었던 신, 

그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가끔씩 그 신이 어디에 계시는지, 도대체 왜 히브리 민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지 궁금했었던 모세에게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타지 않는 불로 나타나신 것이다. 

 

몸이 굳는다. 입술이 떨린다. 소름이 돋는다. 그토록 마음 속에서 찾았던 그 신이 눈 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모세는 얼굴을 가린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두려웠다. 

혹시나 죽을까 두려웠다. 

너무 가까이 온 것이 무서웠다. 

존재가 흔들린다. 그간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신은 실재했던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나 동화가 아니었다. 실제였다. 

구전되어오던 민족의 역사는 진실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라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고? 교회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까마득히 아련히 잊고 지내던 일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이 풀어진다. 

의문을 품고 묻어두었던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분의 임재와 존재에 대한 확신은 그동안의 삶의 경험과 기억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삶이 해석된다.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니 모든 일상의 자리, 예배의 자리, 묵상의 자리, 기도의 자리가 다 소중하다. 

언제든 그분이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 그것을 좀더 자주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죽음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 

그제 DMC 지하철 역에서 숨이 멎은 분을 보았다. 

심폐소생술이 먹히지 않았다. 

축 늘어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지하철에서 숨을 거둔 듯 보였다. 

구급요원들이 와서 응급 조치를 취했고,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다음 열차를 타느라 다시 사셨는지, 아님 운명하셨는지 알 길은 없다.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말이다. 

10. 29 참사가 떠오른다. 

세월호가 떠오른다. 

죽음은 항상 내 옆에 있다. 

 

허망한 죽음, 사단에게 예속된 죽음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오셨다. 

모세에게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오늘도 주님의 개입하심을 꿈꾼다. 

 

 

 

[오늘의 기도]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제가 드렸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IVF 간사로서,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헌신했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약속해 주세요. 

제 삶을 가장 아름답고 선하게 이끄실 것을 저에게 약속해주세요. 

그리고 그 약속을 끝까지 기억해주세요. 

저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일상에 침투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삶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던져주세요. 

언제 당신께서 침투하시고 개입하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기 원합니다. 

감각을 깨워주세요. 

다시 와이파이를 연결하게 하소서. 

주님께 연결되는 순간 순간이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10. 24. 김혁수

 

[본문_창세기 37:5-11_새번역]

5 번은 요셉이 꿈을 꾸고서 그것을 형들에게 말한 일이 있는데, 일이 있은 뒤로부터 형들은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6요셉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야기를 들어 보셔요. 7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나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어요.” 8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성싶으냐?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9얼마 뒤에 그는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 보셔요.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10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었다. “네가 꿈이 무엇이냐? 그래, 나하고 너의 어머니하고 너의 형들이 함께 너에게로 가서, 땅에 엎드려서, 너에게 절을 것이란 말이냐?” 11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말을 마음에 두었다.

 

0. 들어가며 

- 약속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여러분, 약속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 무엇인 아세요? 그것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나폴레옹의 명언에서 나온 말인데요. 약속은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나요. 일상을 살아가면서 약속하지 않고 있습니까? 그럴 없죠. 놀러 가는 것도 약속이죠. 함께 먹으러 가는 것도 약속입니다. 게다가 자신과의 약속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결심이라고도 하는데, 나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 자신과의 약속을 합니다. 이런 것까지 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죠. 최근에 여러분이 하신 자신과의 약속은 무엇인가요? 

 

- 하나님의 통치 

10 동안 통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통치의 방향은 에덴 비전의 회복이요, 방식은 부르심과 은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통치의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죠. 구약은 하나님과 인류가 맺은 번째 약속이라는 뜻이구요, 신약은 번째 약속이라는 뜻이죠. 번째 약속과 번째 약속 사이에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다른 점이 조금 부각 되기에 구약과 신약을 나눴겠죠. 어찌되었건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을 만들어 가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셉의  

1) 요셉? 

요셉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은 많치 않을 겁니다. 고대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던 이집트의 총리까지 지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사실 요셉은 어머니들의 시기 질투,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 역기능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자매 둘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언니는 레아요, 동생은 라헬이었죠. 야곱이 사랑했던 여성은 라헬이었습니다. 

 

20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동안이나 일을 하였지만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며칠같이 느꼈다. (창세기 29:20)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7년을 즐겁게 일했습니다. 게다가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7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라반이 언니 레아를 먼저 야곱과 결혼시켰기 때문이었죠. 

 

30 야곱이 라헬과 동침하였다야곱은 레아보다라헬을 사랑하였다. 그는 또다시 동안 라반의 일을 하였다. (창세기 29:30) 

 

야곱의 이런 편애는 아들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레아는 많은 아들들을 낳았지만, 라헬은 뒤늦게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요.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이 요셉이고, 둘째 아들이 베냐민이었는데요,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라헬은 산고로 죽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나머지 11명의 형제들보다 아끼고 편애를 하게 됩니다. 

 

2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3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4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창세기 37:2-4) 

 

야곱이 어떻게 요셉을 편애하는지 보이시나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그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지어서 입혔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형들은 요셉을 미워할 밖에 없겠죠. 10명의 형들에게 따돌림은 당하고 있었습니다. 

 

2) 꿈과 요셉 

이런 와중에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게 만드는 사건이 생깁니다. 일곱 살의 요셉은 꿈을 꿉니다. 꿈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 있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주위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형들은 열받았습니다. 꿈도 꿈이지만, 그걸 대놓고 이야기하는 꼬락서니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는 형들의 모습을 그려 있나요?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해와 달과 11개의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하고 말았습니다. 형들의 분노에 꾸지람이 지난 이야기 있었는데, 다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눈치를 밥말아 먹었나 싶습니다. 이번에는 야곱도 안되겠는지, 요셉을 꾸중합니다. 

요셉아, 나랑 어머니랑 그리고 형들 모두가 정말 너에게 엎드려 절한단 말이냐!! 이놈!! 오냐오냐 해주니까 간이 배밖에 나왔구나!’ 야곱도 화가 나서 말이긴 하지만, 혼내지 않으면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것이 분명해 보였겠죠. 이쯤해서 그만 이야기하도록 막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이야기를 속에 담아 둡니다. 원해 고대 사회에서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야곱도 그의 에서에게 도망칠 , 베델에서 자다가 하늘 사다리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꿈을 꾸었잖아요.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요셉의 이야기에 신경을 곤두 세웠던 겁니다. 야곱은 요셉의 꿈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께 물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번도 아니고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3) 요셉의 이해

저는 형들과 야곱의 태도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오히려 요셉의 태도가 쉽게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17세라면 아는 나이고, 고대에서는 결혼도 있는 나이잖아요. 그런데 눈치 없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싫어하니까 이야기로 기선제압하려고 하는 걸까요? 어차피 따돌림 받는 인생, 갈때까지 가보자 이런 태도인가요? 

 

저는 요셉과 야곱의 친밀함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사는 , 밧단 아람, 혹은 하란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려고 했을 , 가족들은 다들 힘들어 했을 겁니다. 왜요? 아버지!! 우리가 가나안으로 가야 하나요?’ 이렇게 물어볼 , 야곱은 베델의 하늘 사다리 이야기를 종종 했을 겁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했단다. 하나님께서 다시 베델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해주셨지 꿈에서 말야 아마도 애정을 가졌던 요셉에게는 자주 하늘 사다리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요셉은 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꿈으로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인생을 이끄셔서 약속하셨던 베델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요셉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것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해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것이죠. 요셉은 꿈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해했을 겁니다. 모든 꿈이 하나님의 약속은 아니겠죠. 그러나 인생의 하나님은 꿈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요셉은 개의 꿈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해했습니다. 

 

2. 약속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 중에 가장 돋보이는 개념이 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약속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명령보다 약속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맞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1) 인격적 관계의 중심 

첫째로, 약속은 인격적 관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사회화 과정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약속한 것을 배우고 지키면서 자기의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전세계 인류가 지켜야할 약속이 있고, 국가의 시민으로서 지켜야 약속있습니다. 반면에, 각각의 개인들이 서로 맺은 약속도 많이 있습니다. 약속이 없으면 깊이 있는 관계로 발전할 없습니다. 하다못해 만나려면 만날 약속을 잡습니다.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도 약속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데이트를 위해서도, 건강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도 서로 약속을 합니다. 약속은 상호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심지어 왕과 신하 사이에도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합니다. 약속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주인과 로봇 종과 같은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약속을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으십니다. 

 

2) 하나님의 자기 제한 

둘째, 약속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설교 처음에 약속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명언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약속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권한이 제한됩니다. 당신 맘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약속, 노아에게 하신 약속,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최선의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바로 자신이 인간의 육체가 되어 사람들 속에 거하면서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는 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거기에서도 엄청난 자기 제한이 일어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3) 상호 신실성 요청

셋째, 약속은 서로 신실할 것을 요청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약속을 했으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대담한 행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에게도 신실함을 요청하십니다. 그분을 주인으로 아버지로 받아들인 이상 관계에 신실하길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3. 사단의 통치 vs. 하나님의 통치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과의 약속을 통해 통치하십니다. 자기를 제한하시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세상을 회복시켜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사단의 통치와 다른 지점들입니다. 

 

1) 정복, 징집, 경쟁, 그리고 확장

그럼 사단의 통치는 어떻게 구성될까요? 사단의 통치의 방향은 정복입니다. 세상을 자기 맘대로 주무를 있는 장난감이 되도록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자기 휘하에 들어올 군대를 징집하는 겁니다. 회유, 강제, 중독 등을 통해 사람들을 징집합니다. 그리고 경쟁 시키죠. 사람들 사이에 미움이 싹트고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정글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무한 확장시켜나갑니다. 끝에는 파국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격성이 파괴되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2) 회복, 부르심, 은혜, 그리고 약속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다르게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은 정복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징집이 아니라 인격적 부르심입니다. 경쟁이 아니라 은혜의 문화 중심이 됩니다. 자기 권한의 무한 확장이 아니라 약속을 통한 자기 제한과 신실한 실천입니다. 에덴의 비전을 회복하기 위한 그분의 방식은 이렇듯 기묘합니다. 인격적으로 부르시고, 그들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과 약속을 하시면서 그들과 지속적인 신실한 관계를 맺어가십니다. 이런 방법으로 세상을 다시 아름답고 보기 좋은 에덴으로 회복시키시는 겁니다. 

 

4. 나가며 

-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가?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야곱 일가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단순히 부모와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상하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동안 형들에게 당한 많으니 이제 반전을 일으켜 네가 형들을 못살게 만들 있는 위치에 올려 놓겠다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믿었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같습니다. 

요셉아 너를 통해 너의 가족을 세계적 기근으로부터 구출하려고 한다. 과정에서 너는 부모와 형들로부터 감사의 절을 받게 것이다.’ 

이런 약속이었던 겁니다. 꿈을 통해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요셉은 엄중한 하나님의 약속을 부모형제에게 말하지 않을 없었던 겁니다. 그들 가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꿈으로도 약속의 말씀을 주실 있는 분이시죠. 하지만, 이미  위대한 약속들을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도록 말씀하셨죠. 그것이 역사 예수님이요, 또한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다시 오셔서 세상을 온전히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을 이미 주셨습니다. 이런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신뢰하고 있나요? 신실하신 그분은 약속을 지켜나가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약속을 신뢰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인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 그분의 통치로 들어오세요. 

 

이번 그분의 약속을 여러 가지로 되새길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나요? 약속을 기억하고 있나요? 약속을 자주 되새기나요? 아님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약속을 기억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실하게 지켜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분과의 교제를 위한 시간을 떼어 놓을 있게, 그분을 예배하는 시간을 지킬 있게, 신실하게 그분과의 관계를 지켜나갈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여러분은 평소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가요? 약속을 지키는 못한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2.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약속을 하실 , 그분이 겪게 되는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2021년 09월 2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14그런 다음에, 왕은 얼굴을 돌려 거기에 서 있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둘러 보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15그는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친히 말씀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6'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내 이름을 기릴 집을 지으려고,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어느 성읍을 택한 일이 없다. 다만, 다윗을 택하여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17내 아버지 다윗께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고 생각하셨으나,

18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품은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19그런데 그 집을 지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날 네 아들이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20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렇게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이 성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21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궤를 놓아 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는 가족이 별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특히 그 자녀의 직업 선택권이 제약되는 것은 최악이라고 보았다. 

자녀는 각각의 고유한 주체로서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최근 대를 이어 맛있는 빵을 만드는 가게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자녀가 대를 이어 부모의 전통을 물려받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정말 보기 좋았다. 

부모도 자녀도 행복해 보였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에서 그동안 주목했던 부분은, 그들이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들은 훌륭한 일을 해냈다. 

왕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업적과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구원자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약점으로 인해 왕국이 위협을 받았다. 

그러기에 강점은 강점대로 인정하지만, 약점을 배제하지 않는 오히려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약점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을 묵상자의 책임으로 알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오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이어져서 결국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대를 이어 부모의 약속을 자신의 약속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아버지의 소원을 아들의 소원으로 삼았다. 

 

20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렇게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이 성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어 충실하게 가족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뤄내는 모습이 귀해 보인다. 

우리 가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명절 직후라 그런지 더욱 가족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삶을 기대하고 계시는가? 

나는 과연 남편과 아빠로서 우리 가족의 소명을 어떻게 성취하고 있는가?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가족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대를 이어 전수하고 전수받는 전통과 정신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다. 

이것이 대를 이어 잘 전달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신간훈의 훈련 담당자로 섬기고 있다. 

신입간사들이 우리의 가치와 전통과 소명에 대해 더 깊이 각인하고 체화되도록 돕고 싶다. 

억지로 함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그 소명에 반응하고 기쁘게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21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궤를 놓아 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솔로몬이 기억하는 근원적 이야기는 출애굽이다. 

다윗에게 약속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와 약속하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도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경제사를 위시로한 엘리트들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있고, 백성과 서민들의 소소로운 삶의 단편들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있다.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역사 공부의 목적이 드러난다. 

모든 역사를 알 수 없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다 기록한다고 한다면 수퍼컴퓨터가 수조개 있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개인의 역사까지 다 저장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역사를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일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맺어졌고,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둘째, 약속의 점진적 성취를 위해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어떤 역할들을 감당했는가? 

셋째, 그 약속의 성취가 가져온 현실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둘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때로는 기념하며 또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소망하는 태도… 

오늘도 그분의 약속을 기억한다.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어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사랑을 주시고 또한 약속도 주시니, 사랑받아 감사하고 소망을 품게 되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성품을 기대어, 주님의 약속을 강렬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시고,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날을 죽기전에 보고 싶습니다. 

 

제 주변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함께 꿈꾸는 일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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