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01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제는 그들이 죄값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제단들을 파괴하시고, 돌기둥들을 부수실 것이다.3 “우리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지만, 이제 임금이 있은들 무엇에다가 쓰랴?” 하며 한탄할 날이 올 것이다.

4 그들은 빈 약속이나 일삼고, 거짓 맹세나 하며, 쓸모 없는 언약이나 맺는다. 그러므로 밭이랑에 돋아난 독초처럼 불의가 퍼진다.5 사마리아 주민은 벳아웬의 금송아지를 잃고 두려워하고, 그 우상을 잃고 슬퍼할 것이다. 그것을 즐겨서 섬긴 이교의 제사장들은, 우상의 영화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 때문에 탄식할 것이다.6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앗시리아로 가지고 가서 대왕에게 선물로 바칠 것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대가로 받아 오는 것은 수치뿐일 것이다. 끝내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긴 일로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이다.7 사마리아는 멸망하게 되었다. 왕은 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다.8 이제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 올라서 그 제단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 때에 백성들은 산들을 보고 “우리를 숨겨 다오!” 또 언덕들을 보고 “우리를 덮어 다오!” 하고 호소할 것이다.

 

 

NIV

They make many promises, take false oaths and make agreements; therefore lawsuits spring up like poisonous weeds in a plowed field(4절).

 

 

[오늘의 묵상]

북이스라엘은 부유했다. 

농작물이 잘 자랐다. 

포도도 잘 자라고,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풍요가 가지고 온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가 아니라 우상 숭배였다. 

이교 제단을 곳곳에 세운다. 

둘기둥 우상을 허구한 날 만들어 세운다. 

돌기둥은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 아니다. 

돌을 깎는 것은 대단히 고된 작업이다. 

종교적 심성으로 만들게 된다. 

복을 내려줄 신을 상상하면서 돌기둥을 만든다.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과는 대조된다.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더라면, 우상들과 경쟁력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자신의 대표하는 조각을 만들지 말라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다. 

다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을 대변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략은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시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시는 것이다. 

조각품으로 당신을 표현하지 않으시고, 관계와 역사와 서사로 표현하신다.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며 따르며 사랑하며 살아갈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눈의 동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귀보다는 눈이 훨씬 욕망적이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확실히 욕망을 자극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순식간에 뇌에 찍힌다. 

소리는 오래 걸리며 뇌는 소리를 해석하느라 쉽게 피곤해진다. 

사람들은 한 눈에 들어오는 금송아지를 세운다. 

그게 하나님이라고 속인다. 

농경 사회에서 송아지만큼 귀한 것이 없다.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나르는 일에 소가 기여한다. 

그런 소의 형상을 한 반짝이는 우상은 모든 사람들이 염원하는 풍요를 욕망하게 한다. 

곳곳에 돌기둥을 세워 자신들의 부를 위해 기도한다. 

곳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부의 근원인 가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한다. 

그 옛날 모세 때의 금송아지 사건을 모를 리 없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는지 그새 잊었다. 

경제적으로 풍요해지니, 정신이 허약해졌다. 

돈이 사람들을 망가뜨린다.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거짓이 난무하다. 

빈 약속, 거짓 맹세, 쓸모 없는 언약(4절)이 퍼진다. 

결국 정보가 부족한 사람, 착한 사람, 타인을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죽음에 이른다. 

사기가 판을 치니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불의한 사회는 제어되지 않는 욕망 덩어리, 즉 우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금융 상품의 불완전 판매… 

죄다 사기다. 

남을 속여 자신의 잇속을 차린다. 

SNS 속에 포장된 거짓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필라델피아 켄싱턴의 마약 거리는 미국 제약 회사의 사기인 펜타닐의 결과다. 

돈을 잃고 신의를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불의가 땅에 가득하다. 

 

우상이 판을 치면 사회는 불의하게 된다. 

하나님이 참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물과 불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남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서로 싸우다 지옥을 만난다. 

지옥같은 사회를 위해 누가 지키며 누가 헌신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는 결국 외세의 먹이가 된다. 

침략이 잇따르고, 전쟁의 참화는 지옥의 지옥을 낳는다. 

 

현재 한국 사회도 우상이 판을 친다. 

지도자들이 우상 숭배자가 많다. 

점집이 여전히 방방곡곳에 있다. 

지도자들이 무당을 찾아간다. 

무당과 법사의 말을 듣고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맡긴다.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다.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나, 우상과 미신은 전근대적이다. 

그나마 아직은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남아 있다. 

그루터기들이 끝까지 남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성령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불로 태워주시길 기도한다. 

우상을 좋아하는 우리의 본성에 불로 태우시고 물로 씻어주시길 기도한다. 

지금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오늘의 기도]

우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 

불의한 세상을 혐오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겪고 계시는 딜레마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당신을 오늘도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내면, 속사람을 바꾸길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인지합니다. 

주님! 

저의 속사람을 바꾸소서. 

더욱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더욱 경건한 존재가 되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게 하소서. 

속이는 사람들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게 하소서. 

우상을 배척하고, 불의를 멀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19일 토요일


여는 기도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22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25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27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30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The Message

Put your mind on your life with God. The way to life—to God!—is vigorous and requires your total attention(24절).

 

주석

26-27절. 닫힌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또 그분이 자기들을 가르치셨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라고 부르신다. 이로써 이 비유는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기독교 전도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체 단락의 청중을 암시한다(IVP 성경비평주석).

 

29-30절. 여기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의 문맥에서 보면, 요점은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메시아의 잔치에 기대어 있는 자들이 되며, 거기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던 많은 사람은 배제되리라는 것이다. 동서남북이라는 말은 ‘모든 곳’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전문맥에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가 되어 새들의 안식처가 된다.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한다. 

얼핏보면 하나님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듯 싶다.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에 대해, 그 나라에 실제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큰 나라일까? 

그 나라의 인구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 

그 나라에는 누가 들어갔는가? 

등의 질문이 맴돌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러 성읍들을 두루두루 다니신다. 

어느 마을에 가니, 한 사람이 묻는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예수님은 예/아니오로 대답하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갑자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하신다. 

구원 받은 사람이 적은지 많은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리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수가 많다고 말씀하신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구원 개념의 전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입성”이다. 

구원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구성원이 되느냐의 문제다.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육을 가진 존재 자체의 구원이며, 새롭게 조성되는 피조세계의 구원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문이 닫히면 아무리 두드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의 선택에 의해 찾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 원하는 현실의 넓은 문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함정이다. 

 

좁은 문은 불의와 거리가 먼 문이다.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 앞에서 먹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길거리에서 들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할 사람이 등장한다. 

문이 닫힌 뒤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서 선처를 바라지만, 기회는 이미 충분히 주어졌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갔었다. 

불의를 거부하는 좁은 문은 피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정말 적은가? 많은가? 

예수님은 그 수에 많고 적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이 순간의 참석자들 중에도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계, 주의다. 

불의로 점철된 넓은 문을 피하고, 정의로운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좁은 문을 선택했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었다. 

그들의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좁은 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입성했다. 

 

우리도 모든 선택이 좁은 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들, 그리고 대부분의 문은 좁은 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는 방법이다. 

그 좁은 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과 성령님의 인도일 것이다. 

그것이 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사람들이 다 선택하는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야 한다. 

 

나는 좁은 문을 선택하고 있나? 

 

 

[오늘의 기도]

의로우신 예수님, 

주님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불의, 불법, 편법, 속임으로 가득한 넓은 문이 아니라, 

정의, 희생, 공평, 정직으로 속이 꽉찬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모든 선택을 바르게 할 수는 없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