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2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ESV

Fear seized them all, and they glorified God, saying, “A great prophet has a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16절)

 

주석

관에 손을 대시니(14절) 죽은 사람은 관 뚜껑이 열린 채로 운구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지는 일이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장례 행렬을 멈추고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큰 무리 vs 많은 사람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더해졌다. 

가버나움 지역 치안담당관이었던 백부장도 예수님을 인정했다. 

여러 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오는 사람들도 끊임이 없었다.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계속 찾아왔다. 

가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지역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매일 매일 들렸다.

언제나 속보가 떴으며, 그 속보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러니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한 곳에 머물면 그 지역과 그 집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매일 집회를 열 수 있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계속 이동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이동하는 가운데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뒤쫓았다. 

 

하루는 나인 성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님과 동행하여 함께 나인 성에 들어간다. 

그런데 성 안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상여를 든 무리였다.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울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인 성의 사람들은 이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모두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과부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과부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과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 오느라 고생한 어머님의 눈물이 더욱 서럽다. 

마을 사람들은 이 어머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여인의 성품 때문인지, 아님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돈 때문이지, 아님 나인 성 사람들의 착한 마음씀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나인 성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여인에게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고 있으며, 그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큰 무리와 나인 성 과부와 동행하던 많은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한 쪽은 기쁨과 기대와 소망의 무리이며, 한 쪽은 실망과 슬픔과 절망의 무리이다. 

각각의 무리 앞에 놓여 있는 예수님과 상여꾼 및 어머니. 

예수님은 그들의 길을 막는다. 

어차피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쉽게 통과하기 어렵다. 

서로 길을 비켜주어야 하는 상황. 

예수님과 제자 무리가 길을 비켜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막고 상황을 살핀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울지 말아라” 

젊은 아들을 읽은 과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불쌍했고, 그 마을 사람들의 공감어린 행동도 인상적으로 보셨던 것 같다. 

 

관에 손을 대고 죽은 젊은이에게 명령한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런데 진짜 예수님의 명령대로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는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 상여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화들짝 놀란다. 

곳곳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상여꾼들의 곡소리와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기쁨의 탄성과 환호로 바뀐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방금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니다. 

완전히 죽었기에 상여꾼들이 관을 메고 나온 것이다. 

확실한 죽음 가운데도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병자가 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자들은 더욱 의기양양이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생겼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도 이 사건을 접해 듣고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사기꾼인가? 진짜 예언자인가? 아님 소문대로 정말 메시야인가? 

삽시간에 이 사건의 소문이 전 유대지역으로 퍼진다. 

병자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린다. 

모든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시다. 

길가다가 만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상황에서 살리셨다. 

 

오늘은 그 장면을 상상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기대가 넘친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슬퍼하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는 상황에서 길을 막으실 수 있는 용기는 나에겐 그저 신기할 뿐이다. 

예수님을 뒤에서 쫓아가든, 앞에서 만나든, 그것은 복이다. 

오늘 그런 복을 경험하면 좋겠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상상합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하셨던 일들을 다시 묵상합니다. 

예수님을 쫓아가는 무리와 슬픔에 젖어 성을 빠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 

주님께 오늘도 집중합니다. 

주님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5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NIV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18절).

 

주석

13절 독자들은 재림 전에 ‘자는’ 사람들(즉, 자기 교우들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어서 그 행사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거나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IVP 성경주석).

 

동료 그리스도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13절).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시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는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16절), 우리도 주님을 만나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17절).

 

바울은 슬퍼하는 이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새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기쁨을 나눕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1. 잠든 사람 

바울은 죽은 사람을 잠든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6절에는 죽은 사람이라고도 쓰는 걸 보니, 의도적으로 두 가지 표현을 함께 쓴다고 읽힌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서라기보다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예수님 안에서 잠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끊어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순간이다. 

오랜시간 예수님께 순종으로 살다가, 때로는 모진 고난과 슬픔을 당하다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품에서 평화와 평안을 경험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 자신이 다른 편지에서도 밝힌 바,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온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녕을 경험한 바 있다. 

일상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특별한 경험과 계시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그동안 죽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품안에서 쉬고 안식하고 잠들어 있음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단순히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망이 있다. 

다시 부활할 소망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육체로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실 때, 육체로 부활하셔서 부활체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망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와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무기력이 지배하고, 공허함이 넘치는 공간에서 소망과 기쁨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2. 재림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언제 성취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의 끝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있어왔는가!

세계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히로시마의 핵폭탄을 맞은 사람들은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세상의 종말과 같은 것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이 오시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이 바뀌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지구 위에 펼쳐질 것이다. 

주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서로를 그리고 온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돌보고 다스릴 것이다. 

그 날이 온다. 

 

바울은 그 날에 대해 좀더 자세히 기록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모두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실 것이다. 

지금처럼 개인 방송이 실시간으로 퍼지는 세상이 더욱 고도화되면, 예수님의 오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품에서 잠들었던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부활체로 바뀌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대 환영식을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17절 마지막이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순간이 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이젠 실제 눈으로 몸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한다. 

 

난 바울의 이 말들과 설명을 믿는다. 

그러기에 소망을 품고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능하면 빨리 오세요.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벗겨주세요. 

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알게 해 주세요. 

진실을 알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해 주세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주세요. 

미중러의 패권 경쟁으로 죄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속이는 자들을 벌하여 주세요. 

속아 넘어간 자들을 구출해 주세요. 

 

주님, 이 세상을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 일을 누가 다 알릴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누가 다 찬양할 수 있으랴?

3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4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5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번영을 보게 해주시며, 주님 나라에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며, 주님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주십시오.

6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8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 홍해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시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10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11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

12 그제서야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석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음(6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성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까지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의 이름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1-2절). 그 찬양은 은혜와 구원을 바라고 번영과 기쁨을 구하는 간구로 바뀝니다(4-5절). 시인의 세대 역시 조상처럼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6절). 조상의 불신앙과 거역에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7-11절), 그들은 다시 믿음과 찬양을 회복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시고 건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시인의 역사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7절이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홍해 앞에서 주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원망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절망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0개의 재앙으로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되돌리지 못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 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기적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사람들을 기적을 원한다. 

신비로운 것들을 원한다.

영적인 것들을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10가지의 위대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 10가지 기적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여정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린 속도로 배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적과 이적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충격 요법 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경세포만 키워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근육을 키워서 실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넘어 일상을 버티고 유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화려한 기적 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이래서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예수님은 줄곧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기존의 기적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기적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신비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일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알았다.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 말이다. 

 

내가 내세울 기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다. 

그저 다시 한 번 성육신을 떠올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순종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삶을 추구한다. 

그분 뜻에 따르고자하는 열망이 나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맏음을 더욱 자라게 해 주세요. 

눈 앞에 이적이 아니라 온 주에 영향을 주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그려 내는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러 회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6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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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주간의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그래서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둘이 함께 뛰었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주일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실을 전합니다(1-3). 베드로와 요한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무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예수님을 감쌌던 삼베옷과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믿습니다(4-8).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러 말씀하셨고 성경에서 약속한 부활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9-10).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은 잊은 자신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나도 생각에만 몰두해서 주님의 말씀을 잊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새벽 달리기

 

1.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의 자기 인식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요새의 용법에는필자”, “J” 등을 사용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같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배워야 자세다.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규정한 사람들은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의중, , 의도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요한은 정말 그랬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간다.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집중한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청한다. 

이게 사랑의 힘이다. 사랑받는 자의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다. 

 

2. 달리기

베드로와 요한이 달리기를 한다. 

얼마나 급한 상황인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여성들의 말에 혼비백산정신이 없다. 

뛰기 시작한다. 골목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가로지른다. 무덤이 있는 곳까지 울퉁불퉁한 돌산길을 뛰어 오른다. 

숨이 가쁘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같다. 마라톤처럼 숨을 고르면서 정신이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없었다. 

그냥 뛰는 것이다. 자신이 있는 최고의 속도로예수님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달린다. 

 

베드로보다는 요한이 빨랐다. 나이차이? 사랑의 차이? 

하지만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덤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베드로를 기다렸다. 

삼베가 보인다. 저건 예수님 아닌가? 어슴푸레 보이는 흰색 세마포에서 희망을 봤을 수도 있다. 아직 무덤에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문이 열린 것도 이상하지만,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이 보인다. 혹시 매복했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을 잡으려는 시도는 아닌가?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로마 병사들의 함정에 빠져서 예수의 시체 탈취 사건의 주범이 되는 순간, 예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있겠다싶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베드로가 도착했다. 

베드로는 생각이고 나발이고일단 무덤으로 들어간다. 그의 저돌성은 익히 알고 있던 ,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로마 병사가 있든 말든, 주변에 뭐가 있든 말든, 일단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을 헐떡이며무덤 안의 동굴의 울림은 소리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새벽의 달리기는 예수님의 제자 핵심이었던 명에게 마치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려움, 걱정, 불안 

멈출 없었던 달리기는 동굴 세마포 앞에서 산화된다. 

잊을 없는 그날 새벽의 전력질주. 

 

3. 수건과 삼베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의 몸을 싸맸던 삼베와 머릿수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돌무덤의 입구의 큰돌을 누군가가 옮겨놓았다. 시체 도둑이거나 로마 병정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시체를 싸맸던 삼베와 수건을 벗겨서 두었는가? 그것도 머릿수건은 곳에 따로 개켜 있다니 

 

7_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었다. 

시체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든, 시체를 감쌌던 삼베와 수건을 풀어 놓을 리가 없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체의 옷을 벗긴다?? 

썩어가는 맨몸의 시체를 들고 옮긴다?? 

사이에 머릿수건은 쪽에 가지런히 개켜 놓는다??

이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명할 방법이 별로 없다. 

다른 방식으로 추리해야 맞다. 기존의 시체 탈취 방법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 말했지만, 마음에서의 부활이지 육체적 부활일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었다. 

성경의 기록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흘려 보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확하다. 거짓이 아니다. 

저자는 그날의 새벽 달리기부터, 무덤과 세마포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명확한 부활사건을 철저하게 믿기를 바랬다. 

그날 새벽의 제자들은 믿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믿을 밖에 없을 정도로 분명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제자들이 시신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는 성립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시체의 옷을 풀어헤치고 예수님의 맨몸시체를 옮길 정도의 미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빈무덤의 부활의 증거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자신의 머릿수건을 차곡차곡 개켜서 곳에 두고 나오셨다. 

돌문이 마치 자동문처럼 손만 대자마자 굴러갔다. 

이미 부활체에 어울리는 새옷을 입고 계셨다. 

그렇게 유유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이제 쇼타임이다. 진정한 왕이 되셨다.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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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숨을 헐떡이며 전력질주 하던 제자들 옆에 계셨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부활을 믿듯, 당신의 재림도 믿습니다. 
오셔서 모든 고통과 슬픔 당한 사람들을 구원하소서. 

내전 중에 있는 모든 나라를 구원하소서. 

기후위기로 지구는 병들었습니다. 지구를 구해주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세마포와 머릿수건을 보여주소서. 

위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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