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04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26 그 뒤로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27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29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다. 30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31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32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33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ESV

And Mary said, “Behold, I am the servant of the Lord; let it b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And the angel departed from her(38절).

 

주석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31절)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와 같은 말로서 ‘구원자’를 뜻한다(IVP 성경주석).

 

마리아의 나이(34절) 마리아는 여자인 동시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사람(아마도 열두 살 혹은 열네 살)이었으므로, 사실상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IVP 성경배경주석).

 

마리아의 반응(38절) 마리아는 사가랴가 염려했던 의심의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약속을 담담히 받아들인다(IVP 성경주석).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이번에는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의 한 소녀를 향합니다. 그의 이름은 마리아로 다윗 가문의 요셉과 약혼한 자입니다(26-27절). 천사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30-31절), 그가 장차 다윗의 왕위에 올라 그 백성을 다스릴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31-33절). 마리아는 믿기 어려웠지만(34절),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입니다(37-38절).

 

천사가 전한 소식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38절).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자가 오신다는 기쁜 소식은 자신의 삶을 내어드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많은 대가가 따르고 때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삶을 내어 드릴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헌신하며 살아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묵상]

마리아가 사는 곳은 나사렛이다. 

나사렛은 그렇게 유명한 동네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 소개받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었다. 

지역을 봐도 그렇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많은 마을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쪽에 몰려 살았다. 

강이 있고 호수가 있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다. 

허나 나사렛은 분지 지형이다. 

인구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이나 여리고 가버나움 같은 마을들은 유명했었다. 

그러나 나사렛은 작은 촌동네라고 볼 수 있겠다. 

 

작은 마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마을, 그곳에 나이 어린 처녀가 살았다. 

그녀는 친척이었던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삶과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엘기사벳과 사가랴는 율법을 잘 지키고 신실하던 분이었다. 

당대에 의인이라고 불릴만큼 하나님에 대해서도 열심이었고, 율법 준수에도 최선을 다했다. 

율법의 큰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금식과 구제에 힘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율법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높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의인은 율법의 세부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래의 뜻을 따라 실천했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다. 

마리아는 의인을 친척으로 두었고, 그들의 삶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에 마리아도 깜짝 놀랐다. 

나이가 많아 그분들에게서는 태어나는 아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마리아는 임신 소식을 신비롭게 여겼으며, 특히 사가랴 삼촌이 저렇게 말을 못한다는 것이 정말 의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저 집안 어른들에 의해 약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은 처녀의 몸에 아기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어리둥절이다. 

이게 과연 축복인가? 기쁜 소식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최근의 사가랴에게 있었던 일을 어느정도 듣고 알았던 마리아 입장에서는 그저 환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예언이 사실이라면, 과연 결혼을 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파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약혼자인 요셉은 과연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다윗의 뒤를 잇는 영원한 왕으로 태어난다는 건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온다는 이런 스토리 속에 주인공이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신이 혼미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잘 기를 자신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믿음의 반응을 보인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나이는 어리지만, 도리어 굳은 믿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종이다.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면 그 일은 이뤄지는 것이다. 

누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어찌 인간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고, 나의 욕망과 열정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뜻이 우선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고, 정말 믿기 힘든 예언이지만, 믿음으로 반응했다. 

 

내게는 두 가지 마음이 든다. 

하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숨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께 멋지게 쓰임받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사가랴나 마리아처럼 신비경험도 많이 하고 싶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 켠에는 숨고 싶은 마음도 있다. 

자꾸 신비경험에 노출되면 그 경험이 가져다 주는 삶의 방향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가? 

그저 일상을 편하게 누리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소명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려운 길이라도 가는 거고, 

지금 이 상태를 잘 유지하라고 하시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다. 

억지로 할 수 없다. 

가브리엘이 나타나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억지로 주인공이라고 주장해 봐야 정신 승리일 뿐이고, 자의식의 과잉일 뿐이다. 

불러주셔야 가능하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20-30대에 나의 마음 속 열망을 가득 채우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주인공을 한 켠에서 바라보는 관객도 나쁘지 않다. 

주인공의 분장사도 괜찮다. 

굳이 무대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작은 기여라도 하면 그것도 만족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불러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도 한다.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로 불러주실지, 무슨 일을 감행하게 하실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막연하게 변화의 때가 가깝다는 느낌은 든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오직 그분의 뜻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필요하다. 

내 욕망이 아니라, 내 지식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더욱 밝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거나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지 살필 때이다.

 

 

[오늘의 기도]

나사렛 작은 마을, 마리아를 불러 주신 하나님, 

그에게 인류 최대의 축복을 부어주신 하나님, 

당신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든, 조연이 되든, 분장사가 되든, 카메라 맨이 되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제게 주신 꿈을 향해 전진하고 싶습니다. 

치어리더가 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더욱 빛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러 주시고 말씀해주세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세요.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NIV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13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있길 간구합니다(11절), 또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여 넘치기를, 그들이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도록 기도합니다(12-13절).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교회 너머로 넘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세워질 것입니다. 나와 공동체에 사랑이 풍성하게 넘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바울의 열망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꼭 가고 싶었다. 

그 교회 성도들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었다.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더욱 견고히 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탄이 그 길을 막고 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친히 열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열망이다. 

그리고 그 열망을 기도로 표현한다.

 

나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오랜 친구이자 믿음의 동역자인 김선교사다. 

현재는 미국에 있는데, 한 번 간다 간다 했는데, 아직도 못가고 있다. 

만나서 그간의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그에게 격려를 하고 또 받고 싶다. 

귀한 믿음의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오늘은 보고 싶은 친구들과 동역자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좋겠다. 

그들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다. 

 

2. 흠 잡을 데가 없게

바울의 열망 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과 온 성도들 앞에서 거룩함에 있어서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어렵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온다. 

거룩함에 흠 잡을 데가 없다는 말은 너무 완벽주의자의 말처럼 들린다. 

과연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문을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본문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야겠다. 

12-13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먼저는 사랑이 풍성해지길 기도하고 있다. 

바울 선교단도 그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 

주님도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넘치길 바울은 기도한다.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그것도 한 사람, 한 개인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전 문맥에서 주로 믿음에 대해 사용한 어구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공동체 속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 

마음을 굳게 함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포함한다. 

주님 오실 때,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게 하실 것에 대한 소망이다. 

이 소망이 믿음을 견인한다. 

 

사랑과 소망을 품은 믿음, 이 두 가지가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거룩함에 있어 흠잡을 데가 없게 하려면,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소망은 더욱 희망차고, 그에 따르는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주님 오실 날을 소망하고 있는가? 

나는 그 소망에 따라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있는가? 

나는 공동체에서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누고 있는가?

 

이것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 

거룩함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을 살펴서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온다. 

소망, 믿음, 사랑, 공동체 안에서, 주님 안에서…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주님을 소망합니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비판과 판단을 중지하게 하시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그때까지 믿음을 굳게 하고,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소서. 

 

주님,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는 간사들을 격려해주시고, 힘을 북돋게 하소서. 

저도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가게 하시고,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부어 주소서. 

재정 정리와 결산도 잘 마무리 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9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그러므로, 우리는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2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3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4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장차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고,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내가 참다 못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알아 보려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자가 여러분을 유혹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NASB

and we sent Timothy, our brother and God's fellow worker in the gospel of Christ, to strengthen and encourage you as to your faith(2절),

 

주석

믿음(2, 5절) 이것은 위험에 처한 그들의 삶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핵심 단어다. 이 단어는 종종 ‘믿음’으로 번역되지만, ‘신실함’, 또는 ‘충성심’ 또는 ‘신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에브리원 주석).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여 참을 수 없었습니다(1, 5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냅니다(2-3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4절). 예수님께 충성하는 이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미리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견디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예수님을 따를 때 미리 예상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그 고난을 회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바울의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준다. 

사탄의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굳건하게 하고 싶었다. 

방법을 찾다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디모데를 통해 성도들을 더욱 굳건히 세우려고 한다.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디모데를 보낸다. 

 

첫째, 믿음을 격려하여 환란 중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고난이 찾아오고, 환란이 찾아오면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과연 내가 제대로된 참 진리를 믿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말에 현혹된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현실적으로도 계속 이 신념을 붙들고 있을지, 버릴지를 결정해야 한다. 

고난은 재정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육체적인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영향을 준다. 

고난이 육체를 힘들게 하면, 그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일상이 망가지고 경제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자연스레 사회 생활도 문제가 생기고, 정서적인 외로움과 우울함에 시달린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또한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안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그분을 끝까지 신뢰하고 따를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바울과 그의 선교단도 유사한 환란을 당해봤기 때문에 더욱 더 잘 격려할 수 있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권면하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과 영향력이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성도들을 세우고 싶었다. 

 

둘째, 유혹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도들을 믿음에서 파산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에덴 동산의 뱀처럼, 솔로몬의 젊은 책사들처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외부적인 환란도 문제지만, 이렇게 내부적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갉아먹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다. 

외부적인 어려움은 때로 내부적인 단결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내부적인 유혹으로 인한 분열은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더 무서운 것이다.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고 그 진리로부터 멀어지지 말 것을 부탁하고 요청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혹하는 자들의 실체를 분명히 밝혀내고, 그 유혹의 실상과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혹의 말은 달콤할 수 있으니, 어디서부터는 사탄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바울이다. 

그러나 지금은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디모데를 보낸다. 

 

바울의 사랑이 다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이 장거리 여행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적격자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의 시간을 빼서 위험한 장거리 여행을 부탁해야 한다. 

목표도 만만치 않다.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유혹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디모데가 느꼈을 마음의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안된다.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다. 

정말 신뢰하고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믿음만한 사람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도, 부탁하는 것도, 계속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바울은 정말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가지의 성찰적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디모데 같은 신실한 동역자를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성도들을(교회와 IVF)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 

하루를 보낸다. 

 

[오늘의 기도]

믿음을 굳건히 하길 원하시는 주님, 

제 주변의 사람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는 일에 저를 사용하소서. 

가족, 교회 성도, 사역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게 하소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주님, 

디모데 같은 주님의 동역자가 더욱 많이 생기길 원합니다.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역자가 더욱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역자가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공동체의 어려움을 조금씩 풀어주시고, 서로 연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주세요. 

한 마음이 되는 것,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 그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는 것, 

이런 일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 일어나도록 도와주세요. 

 

오늘 하루도 주께 맡깁니다. 

간사수련회 일정도 주님께 맡깁니다.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0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믿음에 기반을 행함으로 입증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헬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하신 말씀( 15:6) 온전히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심으로 그가 의로운 자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21-24).

 

라합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행함을 통해 의로운 자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25).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분리할 없듯, 진실한 믿음은 행함과 분리할 없습니다(26).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동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

 

1. 진심

요사이 쓰는 중에 “~ 진심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행동이나 말에 진지함과 깊은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일치에 진심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실천이 뒤따른다. 몸이 움직인다. 근육이 사용된다. 무브가 일어난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율법과 상관이 없다. 

야고보가 율법에 국한된 실천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있다. 

라합의 경우도 그렇다. 정탐꾼들을 접대하는 것이 율법과 관련이 있다고 하기엔 조금 멀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믿음과 율법이라는 대치국면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하게되는 몸의 실천이다. 

사랑의 실천이요, 차별이 없는 공동체 운영이요, 가난한 사람들은 천대하지 않는 태도다. 

 

이신칭의, 이신칭의 하는데, 물론 야고보 시대에 이신칭의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하지는 않았겠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말은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들어가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발휘하던 바울의 강론을 고려할 광범위하게 적용되던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이기도 , 이신칭의를 야고보는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고 싶어했다. 

간략한 말은 오해를 낳는다. 

압축적인 말이 진리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다양한 해석은 결국 개개인의 상황에 적용될 , 지극히 주관적으로 흐르게 된다. 

시대의 흐름에 해석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이신칭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믿음의 고백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믿음의 고백만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신앙의 여정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야고보는 오해를 바꾸고 싶어했다. 왜곡된 해석/적용을 원래대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아니겠나!

 

야고보의 진심이 느껴진다. 

구약의 인물 , 유대인을 대표하는 아브라함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라합을 예로 든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구성이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믿음에 따르는 실천이 필수적이다. 

따로 떼어내려고 하지 마라. 

둘은 원래 하나다. 

의로움은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실천에 있다. 

고백에 따르는 실천이 결여되면 고백은 거짓이 된다. 

거짓은 다시 죄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다. 

거짓은 아비, 사탄에게도 접근하는 다리가 된다. 

그러니 진실한 고백, 실천과 함께 하는 고백으로 다가가야 한다. 

 

야고보의 말이 그래서 더욱 닿는다. 

그는 진심이다.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만 놓고 보면 처절하다. 

실천이 없는 고백, 행함이 없는 믿음을 철석같이 따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의 진심, 그의 처절한 항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니까요

 

——

주님, 

야고보를 통해 처절함을 느끼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 고백에 걸맞는 행함, 실천이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기 몸을 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주세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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