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7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고 믿음에 따른 행함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묻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주변 이웃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 자체도 가짜일 있습니다(14-17). 믿음은 삶을 통해 나타나며 증명됩니다(18). 진정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행함과 분리될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에 변화들을 만들어냅니다(19-20). 믿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생의 어려움들이 찾아올 그것을 풀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은 삶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

어리석도다

 

1. 어리석은 사람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구절은 어디서 많이 같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훈계하면서 했던 말과 유사하다( 3:1).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진리 위에 율법의 행위(절기법, 정결법_특히 할례)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렇게 혼합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고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없는 사람은 그의 믿음도 의심스럽다고 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데에 있다.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규정에서 다루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의롭게 되는 것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 온당한가? 

당연히 아니다. 이건 의에 이르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믿음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존재적이다. 따라서 지식, 동의에 머물지 않고 의지, 의욕, 실행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여 따라가는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믿음은 신뢰라고 하는 거다.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였다. 

공동체의 상황에 가장 예민한 사람이었다. 

세계 공동체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자/빈자의 대립이 생겼나? 그건 빈자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부자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의 배신자 프레임도, 로마/헬라인들의 일신교 프레임도 공동체 내의 빈자/부자 프레임보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빈자/부자 프레임이 작동해서 공동체가 분열되면, 그건 하나님 나라의 내적 원리 자체에 공격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렇게 흘러가게 없었다. 

 

2. 행함 없는 믿음

 

점점 야고보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2장에 접어드니, 야고보와 당시 교회에 닥친 시련과 시험은 외부에 있는 것보다 내부에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방치를 넘어 차별을 한다( 2:1).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만약 이것이 심화된다면,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에 예수의 정신이 남아 있다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다. 

그분에게 구원받았냐라고 물어 있다면, 그분은 어이가 없어 하겠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우리의 언어로 대답할 수도 있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나는 구원받았어요 

그렇다. 그분은 구원의 중심이기에 이미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확실히 말할 있다. 그분은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어린이와 여인들을 공정하게 대하셨고, 부자/빈자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주셨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건 믿음이 아니다. 그건 믿는 하는 지적 속임수다. 합리화, 정당화, 논리 함정이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고 말하는 세계 교회 지도자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걸 갈라디아서의 바울과 대척점에 일이 아니다. 

바울이 믿음에 따르는 행동과 실천을 무시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게으름의 소치다. 

모든 편지에 들어 있는 바울의 권면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를 포괄한다. 

야고보가 십자가와 믿음의 신학적인 측면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개인/공동체 윤리를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해서, 그를 바울과 대척점에 두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교회 지도자가 것은 철저한 회심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들을 섬기기로 했기 때문이리라. 야고보가 당시 유대교와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수는 없다. 

예수, 바울, 야고보는 근본적인 신학적 일치가 있었다. 그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율법의 일부가 폐기된 것은 맞지만, 율법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야고보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체가 좋다. 

예수님 이야기, 제자들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가 묵상과 상상에 도움이 된다. 

서신서의 권면과 설득은 상황보다 논리 전개가 중심이다 보니, 상상보다는 사고의 정밀함과 확장이 본문 묵상에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말이 길어진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칫 팍팍해진다. 

건조하다고 멈출 수는 없다. 

건조함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건조함을 넘어서서 야고보가 처한 상황에 좀더 집중해서 상상력이 첨가될 있다면 묵상이 풍성해 있을 같다. 

 

——

 

몸소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신 예수님, 

당신의 실천을 배우고 싶습니다. 

믿음은 머리의 작용이 아니라 전존재의 작용입니다. 

주님을 따라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인도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4. 11. 

 

[본문_요한복음 20:19-31_새번역]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설교]
0.
들어가며
이번 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을 가져다 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공은 제자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과연 이들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1. 도마의 열망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잡아다가 사형까지 집행한 유대인들의 무도함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알고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을 살피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숨죽이며 유월절, 무교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평안, 평화가 있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극도의 자기 보호를 낳고, 극단적 자기 보호는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를 낳습니다. 배척과 혐오는 결국 전쟁의 굴레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두려움의 결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두려움은 살인을 낳지만, 국가의 두려움은 전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서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신(이스카리옷 유다가 배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으로 가득 제자 공동체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살아 났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숨으로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23) 

 

그러나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오니 다락방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다락방에 오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기쁨에 얼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믿을 없었습니다. 몰래카메라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마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놀리는 같아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빠진 같아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도마의 말은 그의 정서를 대변해 줍니다. 

 

25_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도마는 악에 받친 같습니다.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믿을 없으니,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도마는 정말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제자만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마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는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만져보라고 말했을 , 도마는 만져보기는 커녕, 자기를 지명하시면서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께 감격하여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2. 꾸짖음 vs. 격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장면에서 도마를 꾸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27)라거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8) 말씀을 비추어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꾸짖음 보다는 격려의 늬앙스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체 제자들 앞에 번째로 오신 상황에서 도마에게 정색을 하며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도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 도마에게 엄하게 꾸짖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28절의 말씀은 일종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30-31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요한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마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역해야 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요, 앞으로 보지 않고 믿게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축복이었던 겁니다.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쌍벽을 이룹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대적 배경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의그리스도메시야 헬라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신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유대식 어법입니다. 그에 반해, ‘나의 나의 하나님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최고의 칭송입니다. “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있는 표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어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죽였던 로마의 권력의 무서움을 뒤로하고 이제 진정한 세상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무수한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최고의 모델이 됩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4. 나가며_나의 고백은?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참조 20:16). 그러나 이제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오직 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 이제나의주님으로나의하나님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호칭의 변화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를 나의 신랑/신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아빠/엄마로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사장/대표로 부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실된 고백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종교 문화 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고백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제자들의 정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중에서도 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 도마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어조와 말투로 말씀하시는지 서로 나눠 봅시다.    

 

3.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요?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 종교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으로 부르고 있나요? 그분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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