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14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1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7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21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MESSAGE

“여러분 가운데 자만해서, 내 말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내가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허세가 가득하다는 것을 확인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능력 입은 삶이기 때문입니다.”(18-20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에는 바울이 어차피 자신들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그의 훈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18, 19절). 이들은 여전히 회개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속적 교사의 모습과 같이 권위를 세워 엄히 다가가도록 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온유하게 다가가도록 할지 선택하라고 말합니다(21절).

 

허영과 교만은 영적 아버지의 훈계를 거부하게 만들고 서로 간에 험담과 비난의 소리만을 키웁니다. 성도의 건강한 교제는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향해 권면과 훈계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피상적이고 분열된 친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의 말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교회내 파당을 없애고 오직 뿌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자고 했다. 

그런데 4장 마지막에 이르자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하며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고 있다. 

 

15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편안한 말은 아니다. 

영적 아버지라는 태도조차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가 영적 아비라는 말을 쓰는 것을 막아야 할 듯 싶다. 

만약에 베드로나 아볼로도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오직 우리의 영적 아버지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시다. 

이것만 계속 강조해도 될 일이다. 

굳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훈계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같은 성도로서, 교회의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훈계하면 될 일이다. 

그정도도 충분히 권위가 있으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바울은 일반적인 상황을 넘어서서 반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듯 싶다. 

 

18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교만해진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9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20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 몇몇은 마음과 생각이 교만해졌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개척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인다. 

바울이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하다. 

게다가 바울은 말 뿐만 아니라 여러 능력과 기적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듯 싶다. 

바울을 공격한다. 다른 사도나 스승의 이름으로 바울을 깎아 내리고 있다.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서 대면하여 일종의 대결을 하겠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영적 대결이다. 지식과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누구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성품의 열매로 드러난다. 

엘리야 때는 능력 대결로 등장했다. 

예수님 때는 소명 대결로 등장했다. 

바울의 때는 열매 대결로 등장하는 것 같다. 

말씀이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교회와 사람들의 변화를 얼마나 일으키고 있는가. 

전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바울의 선교와 교회 개척에 대해 바울의 반대자들은 대답할 말과 보여줄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대단히 큰 결심을 했다. 

여차하면 큰 분노를 가지고 고린도에 방문할 계획이다. 

교회의 분열이 가라앉고 교만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채찍을 들고 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바울이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내세우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반대자들, 특히 말은 많지만 능력과 열매는 없는 자들을 다시 되돌리려는 데에 있다. 

그들을 채찍질해서라도 원상복귀시키고 싶어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지고, 바울의 반대자들을 결국 놓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엄중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구약의 하나님 이미지를 가져와서 대처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이 편지에 반응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몇몇은 회개하였던 걸로 보인다.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호통이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자들에게는 무섭게 다가갔고, 옹호자들에게는 교회 일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두 그룹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도후서(2:1-11)에 등장한다. 

교회내 치리(처벌)과 회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은 자신이 영적 아버지임을 밝힌다. 

그런면에서 오늘 바울을 이해할 수는 있겠다.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영적 아버지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동체에는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방치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악일 것이다. 

사랑으로 끝까지 품으려고 해야 하지만, 분열과 싸움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에 대한 분별과 적절한 조치는 필수적이다. 

죄로 인해 공동체는 무너질 수 있다. 죄 자체도 무섭지만, 죄를 다루고 조치를 취하는 공동체에 모습에서 성패가 갈린다. 

권위에 대한 근원적인 반감이 많은 세대.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워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바울의 말이 남는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결국 성령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하는 것. 

그렇지 않고서는 젊은 세대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기독 공동체가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하나님, 

바울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영적 아버지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영적 아버지라고 인식하기보다 공동체를 돌보는 청지기요 관리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정당하고 공정한 조치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에 의해 판결되는 일이 아닌 공정한 공동체적 분별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조치에 순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님, 공정함과 순종이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게 해주세요. 

성령님께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가득한 공동체가 되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