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6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9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13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14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두고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NIV

Thanks be to God for his indescribable gift!(15절)

 

주석

12절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사람들은 주후 46년경에 시작된 팔레스타인 기근의 여파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여파가 얼마나 멀리 미쳤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금을 모으는 일은 매우 궁핍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요점을 한 번 더 강조하며 정리합니다.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7절). 이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 온갖 넘치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을 통해 구제받는 이들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8-15절).

 

하나님은 가장 선한 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도우시며, 이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를 모두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구제의 대상은 극심한 기근을 겪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봉사는 이방인에게도 화해의 직분과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됐습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메마른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화해와 생명을 증언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이 요점을 명확히 밝혀 주니 참 고맙다. 

바울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제 헌금을 많이 하라.

다른 하나는 각자 정한대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

기근 속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돈을 모금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부유한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의 부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부를 한 곳으로 모은다. 

사람들의 기호가 부의 이동을 부른다. 

사람들의 기호는 사회적 현상이며, 때로는 조작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기호를 통해 상품이 판매되고 돈이 움직인다. 

연예인이든, 대기업이든 자신들의 부는 어찌보면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니 사회적 인정과 사랑이 그들의 부가 되는 것이다. 

출발점도 다 다르다.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물론 환경이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 

어쨌든 부는 사회적 산물이다. 

부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이 유지, 관리, 혁신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부를 나누는 행위는 사회 시스템의 유지, 관리, 혁신에 도움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으로는 현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매정하고 냉혹한 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일반 사회도 이렇게 복지를 위해 애를 쓰는데, 하나님 나라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나눔을 권면하고 있다. 

많이 내는 사람들을 통해, 그 헌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누린다. 

사회적 부가 공유된다.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재정적 서포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억지로 무리해서 내서는 안된다. 

기쁘게 낼 수 있을 정도로 내는 것이 합당하다. 

억지로 기쁨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구제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이 봉사의 일은 사람들의 궁핍함과 핍절함을 돕는데 크게 사용된다. 

동시에 이 봉사가 하나님께 감사가 되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교회가 최선을 다할 때,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다. 

 

억압받아 고통 속에 있으면 자연스레 가난해 진다. 

재물을 축적하기가 어려워진다. 

정부의 압박은 시장에서 퇴출될 정도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억압받는 사람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그래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친일파들이 축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존심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에 끌렸던 사람들이다. 

일본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권력가의 편을 드니 재물이 모인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재산을 잃는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출하기를 원하신다. 

억울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기를 원하신다. 

갇힌 사람들이 다시 풀려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자유로이 사람 살 만한 공간을 창출하기 원하신다. 

이 일을 위해 돈을 쓰고,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시선이 머문다. 

좀 과장하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억울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가장 오래 가장 밀도있게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자신이 가진 돈을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는 최상의 방법이다. 

성경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레 삶으로 이어져야 하며, 성경공부가 지향하는 삶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동식사다.  

 

** 목회데이터연구소, Numbers 183.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단어가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보육원을 졸업하고 자립준비하는 청년들 중에 50%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얼까 다시 고민해 본다. 

우리 교회 바로 옆이 “송죽원”인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 주시는 주님, 

억압받는 백성들 곁에 계셔 주시는 주님, 

주님을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하길 원합니다. 

내면 속에서, 기도 속에서 만나는 주님도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상한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더욱 기쁘고 감사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상처입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깊이 파였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믿기지 않습니다. 

주님, 고통받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셔서 위로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2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3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이 겹쳐서, 우리는 더욱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분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던 것입니다.

14 내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말한 자랑도 진실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5 디도는,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순종한 것을 회상하면서, 사랑하는 정을 더욱더 여러분에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16 나는 여러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받습니다. 여기에 디도의 기쁨까지 겹쳐서 더욱 기뻐합니다.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습니다(13절). 바울의 근심이 무색할 만큼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극진히 영접한 것입니다(14-15절). 바울은 무엇보다 고린도 교인들과의 신뢰가 회복된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16절).

 

실의에 빠졌던 바울은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으로 인해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셔서 바울과 디도를 위로하십니다. 이제 바울과 디도는 고린도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풀기 어려운 갈등과 긴장이 있다면, 더 깊이 사랑하고 신뢰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바울의 정서 상태는 매우 좋음이다. 

바울과 디도는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디도는 더욱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교인들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있다. 

관계가 회복되었다.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고, 그래서 회복되었다. 

위로, 환대, 기쁨, 신뢰… 

이런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바울의 오랜 노력과 분투 위에 하나님이 주신 멋진 선물이다. 

 

교회에서 웰컴팀을 시작했다. 

예배 전에 커피와 과자를 먹으면서 예배에 오시는 분들을 환영한다. 

그것만으로도 예배에 오는 분들의 마음이 조금은 열린다. 

다들 조금 일찍 교회에 오게 되었다. 

예배 시작 시간에 조금 더 많은 청년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건 꽤나 멋진 변화다. 

환대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위로와 기쁨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환대가 있다. 

환대의 의미의 그 풍성함을 더 많이 발견하면 좋겠다. 

 

성도간의 서로 위로가 있고, 환대가 있으면, 당연히 그 안에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이 점점 커지고 확대되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도 위로를 받는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다. 

세상에서 받지 못했던 위로다.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와닿는 것은,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바울의 마음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분열이 있었고, 죄가 있었고, 바울의 대적자가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계가 회복되었고, 신뢰가 회복되었다. 

신뢰는 한쪽만의 변화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신뢰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교인들도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과 상통한다. 

이런 상호 신뢰가 마련된 교회, 공동체를 참 갈망하게 된다. 

 

한국의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많이 깨어져 있는가? 

너무 많은 갈등과 긴장이 존재한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목사와 성도 사이에, 장로와 장로 사이에, 성도 간에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법정에 가기도 한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뢰가 깨어진 공동체는 위로와 기쁨을 주기 어렵다. 

서로의 진정성을 믿고, 환대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게 잘 안되니까 사이비가 득세한다. 

사이비는 뇌 한쪽의 정상적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하게 되고, 성도간의 갈등은 최소화된다. 

그러니 얼핏보면 사랑과 환대가 넘쳐난다고 보여진다. 

자아가 망가진, 정상적인 이성 활동이 정지된 사람들은 기계처럼 웃고 살갑게 대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곳에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세상에서, 전통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미끼가 되어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이끈다. 

교회는 말씀과 신뢰가 회복되어야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사이비를 능가할 수 있다. 

 

기독 공동체들의 시작은 대체로 원대하다. 

좋은 꿈과 이상을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대체로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그림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되기가 어렵다. 

작은 상처를 다뤄야 하며, 상호 신뢰를 줘야 한다. 

위로와 환대와 기쁨이 공동체에 흘러야 한다. 

이것은 비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사랑, 헌신, 인내 등의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 

성숙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불가피하게 어려움이 찾아온다. 

너무 이상적이지도 말고, 너무 자조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달인의 경지다. 

 

디도가 찾아오길 바라게 된다.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는 디도가 왔으면 좋겠다. 

위로와 신뢰가 더욱 커지는 하루 하루가 되길. 

마음 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이 치유받길… 

 

[오늘의 기도]

위로를 주시는 주님, 

공동체에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관심으로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기쁨을 주시는 주님, 

주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공동체의 관계가 회복되기에 갖게 되는 기쁨을 주소서. 

서로 환대하기에 서로의 존재가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더욱 늘어가길 원합니다. 

서로 신뢰하기에 가족 같은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해 기도해 주는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7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1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알고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6예수께서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라부니!하고 불렀다. (그것은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천사들은 우는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고, 어디에 있는지 없다고 대답합니다(11-13). 마리아가 찾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는 동산지기로 생각하여 예수님의 시신의 행방만을 묻습니다(14-15).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익숙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습니다(16).

 

주님은 자신을 붙잡고 있으려는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전하라고 하십니다(17).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것과 예수님께 들은 말씀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18). 예수님의 부활은 슬픔과 절망에 있던 마리아에게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

기쁨의 탄성, 라부니

 

1. 천사들의 위치 

오늘 본문엔 질문거리가 많다. 12절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위치가 의아하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천사들은 무덤 속에 있는가? 천사들 명은 예수님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명은 발치에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가? 굳이 다르게 앉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넣은 장소도 아닐 텐데,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추측을 해본다. 주석들을 찾아보는 노력과 열심을 기울이지 않고, 기존 정보와 상상을 통해 추측해 본다. 

아마도 예수님의 삼베옷과 머릿수건을 벗겨 가지런히 개켜 놓은 존재가 천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천사는 예수님의 머릿수건을 벗겨냈다. 다른 천사는 예수님의 삼베옷은 목에서부터 발까지 걷어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도운 존재들이 바로 천사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명확하게 증언한다. 자신들이 시신을 감싸는 옷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었으며, 그것도 명이나 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드로나 요한도 열심히 달렸지만, 어제 오늘 본문의 사건 전개를 재구성하면, 막달라 마리아도 상당히 많은 거리를 열심히 달렸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가서 사실을 알렸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열심히 달려가던 길을 쫓아 다시 무덤에 도착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시신 도난 사건에 대해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혼자 남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11). 그러다가 던지시 무덤 속을 쳐다본 마리아는 깜짝 놀라게 된다. 천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절실하다. 새벽녘 마리아의 울음을 상상한다. 슬픈 울음 소리에 천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마리아의 슬픔에 대한 반응이었다. “여자여, 우느냐?”(13)

 

2. 라부니

결국 베드로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무덤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던 그였다. 천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함께 계셨다(14). 슬픔과 눈물에 젖어 있었던 마리아는 그토록 애정하던 예수님을 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설마 예수님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던 며칠 전에 로마의 병정이 옆구리를 찌르던 모습을 보았던 , 몰약과 침향을 바르던 모습을 지켜봤던 , 돌무덤에 가두고 돌로 막던 모습을 봤던 , 마리아는 도저히 상상할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야를 부르신다. “마리아야”(16). 

마리아야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부르심에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다정하고 위엄있고 따뜻하고 권위있는 음성이 들린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의 목소리, 어투였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라부니”, “선생님

목숨을 눈물에 그는 보답을 받았다. 가장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라부니라고 부를 있었다. 

 

3. 부활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궁금한 하나가 17절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사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제자들을 찾아 만날 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마리아 때는 안되고 도마 때 되었다면, 사이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단 말인가? 부활하시자마자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았지만, 곧바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으로 정리할 수는 있겠다. 

 

그렇게 정리는 되지만, 쉽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승천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쉽게 일어날 있는 일인가? 아님 승천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서인가? 

여튼 질문이 많아지는 구절인 것은 확실하다. 

 

질문과는 별개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와락 끌어 안으려고 했다는 데에 만원을 걸겠다. 

애정하던 예수님을 실제 다시 보았다. 

그토록 찾고 바라던 예수님이 눈앞에 살아서 계신 것이다. 

손이라고 잡고 싶었다.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감동의 눈물로 더욱 강하게 흐른다. 

제자들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의 드라마다. 감정의 곡선이 요동친다. 

 

예수님을 경험하고 싶다.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싶다.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시는 그분을 오늘 만나고 싶다. 

 

——

예수님, 나의 라부니,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셨던 드라마를 저에게도 보여주세요. 

슬픔으로 가득찬 시공간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도와주세요. 

 

미얀마의 시민들이 결국 수류탄을 던지게 되었답니다.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 2. 11. 

 

0. 들어가며 

-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 두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성화 점화를 위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선수 두명(박종아, 정수현)이 성화를 함께 들고 경사도 가파른 12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저렇게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제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두번째는 2018개의 드론이 만들어낸 오륜기였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지만, 금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드론이다. 확신에 찬 감탄사로 “드론이다. 드론”하고 아내에게 외쳤습니다. 정말 Fantastic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블로그를 봤는데, ‘2018명의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드론을 운전할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표했더라구요. 저는 알았죠. 그건 2018명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1명이 컴퓨터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평화를 통한 하나됨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 친선 도약’입니다. 그중에서도 평화가 으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도시 국가간에 전쟁 중이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에는 휴전을 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고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평창 올림픽이 그 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의 소원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2주전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악한 세력은 사단, 예루살렘 성전종교 지도자들, 회당 중심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대제국 로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세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지키다도 중요하지만, 왜 지키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Keep from 도 중요하지만 Keep for도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영어공부 한번 하면 좋겠는데요. 목적을 나타내는 so that may  구문을 찾아봅시다. 

 

1. 하나됨 (11절)

이건 우리가 지난 2주간 계속 다루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연합해 계시듯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자들, 즉 사단을 비롯한 그의 하위 권세자들은 위협과 유혹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제자들의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 철저히 유린된 교회의 하나됨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의 유혹에 철저히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분열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네트웍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이단의 발흥으로 분열합니다. 로마교회는 교리 문제와 교황권 싸움으로 동로마교회와 서로마교회로 분열됩니다. 유럽대륙의 카톨릭교회는 구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없다? 

교인들은 하나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의 기도의 한계와 허약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신 걸까요?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일까요?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도가 AD80년 중후반 요한의 글에서, 요한의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함께 드려졌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됨은 현실에서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분의 기도는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퍼집니다. 하나됨을 해치려는 수많은 세력들과 욕망들 앞에서 온몸으로 막고 계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한 그분의 기도와 수고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한 공동체 

저는 진실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큰 적은 가식, 부정직, 외식, 겉과 속이 다름입니다. 마피아게임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로간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하다보면 인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낳습니다. 건전한 게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딕싯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과 느낌을 알도록 기획된 보드게임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게임에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나눔과 정직한 반응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세상은 속이고 반전으로 놀래키고 배반으로 돈을 벌지만, 즉 일종의 투자와 사기사이의 애매한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 하나됨을 위해_삼위일체 신학, 용서, 그리고 경청과 공감

이렇게 진실되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위한 신학 내지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이해한 삼위일체 신학과 묵상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상의 많은 부분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원리가 기독인의 영성의 근본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시가 매일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행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용서를 실행할 용기를 내면 참 좋습니다. 과거 학생 수련회 때마다 용서의 밤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난 학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 나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를 서로 구하고 서로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감하며 경청하기는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사회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콘서트에서나 있는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김제동의 톡투유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경청과 공감듣기가 작동합니다. 기독 공동체에서 일어나야 할일이 교회 밖에서 기획되어 대중화됩니다. 

 

=> 도전! 진실한 하나된 공동체

평생에 걸쳐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진실하며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는 겁니다.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크고 작든 그런 공동체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보는 게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우리 크리스찬들의 자세일 겁니다. 

 

2. 기쁨(13절)

무엇을 위해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가? 두번째는 기쁨입니다. 13절에도 so that may 구문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이 구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장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세상에 머물게 될 제자들을 지켜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립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 공동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13절이 정말 뜬금 없습니다. 갑자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한번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답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는 겁니다. 

 

-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의 기쁨(13절)

13장에서 17장까지가 고별설교및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바로 제자들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핍박이 찾아옵니다. 이 유혹과 핍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내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로 단절되었을 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천국을 보화와 같이 간직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누룩을 가져오는 신앙,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크다고 확신하는 신앙,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도 악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이 더 큰 신앙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회의 분열에 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 기쁨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스마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 제자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은 쥐어짜내어 헌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지의 남은 하나까지 쥐어짜내어 인상을 찌푸리며 종교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에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배수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 빨래를 했는데, 청바지를 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손빨래를 했는데요. 있는 힘을 다해 청바지를 비틀었습니다. 청바지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안쓰던 근육도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쥐어짜내는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 나온 분들로 족합니다. 모든 근육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건 그들이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기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우리는 내면의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근심이 가득해도,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 기쁨의 근원

이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연합안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이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위의 말씀에서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성한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부담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요 자발적이요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자 

유명한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한분 계십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그분을 만족해할 때,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으신다고 역설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분의 존재가 기쁘십니까? 그분의 존재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하신 일로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신 일에 만족하십니까? 감정고양으로 흥분되는 상태말고요. 주변 교인들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는 거 말고요. 교회 봉사나 구제로 인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거 말고요. 정말 삼위 하나님이 기쁘십니까? 삼위 하나님이 만족스러우신가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행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신앙의 여행은 수많은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여행의 특징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흐릿하게 합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분이 기쁩니까? 그분으로 만족합니까? 

 

3. 진리로 거룩(17-19절)  

이제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됨과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거룩입니다. 사단을 필두로 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쩌면 거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의 규정만으로 거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거룩의 실제가 무엇이며, 그 실제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 거룩의 실재_보냄받는 일상(18절)

거룩의 실제는 분명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상한 삶의 방식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산과 시내를 벗삼아 조용히 기도의 집중하는 삶이 거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의 실제 모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엄마, 설겆이를 하는 순간, 화장실 청소 하는 순간, 밀린 빨래를 하는 순간,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점검하는 순간, 회사 직원 회식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순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회의를 하는 순간, 올림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순간.... 모든 일상의 순간이 거룩의 실제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모든 일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속에 있듯이 지내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모든 일상이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미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의 실재입니다. 

 

- 진리로 거룩하게(17절)

그럼 어떻게 일상에서 거룩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겁니다. 위엄있는 척 하는 모습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해 보이는 옷과 신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 기도를 오랫동안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경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17절)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고 외우시고 연구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 전체일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다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스러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맞습니다.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격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잠잠히 거하는 것, 순전히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30살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잔뼈와 잔근육이 발달했던 그분을 따라 사는 겁니다. 종교권력과 맞서 예루살렘 이방인의 뜰에 펼쳐져 있던 장사 테이블을 뒤엎었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환대하시고 힘있고 신학적으로 갑질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설을 베푸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던 것처럼 사회적 계급을 무시하고 의전을 무시하고 약자를 섬기는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손을 올려 주님을 외치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거룩의 기역자도 쓸 수 없습니다. 

 

-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나눠질 때, 거룩함에 이른다. 

 

“너희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절)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Transformed by the Holy Scripture. 이게 되어야 합니다. 과연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때문에 내 삶에 새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나요? 말씀 때문에 던져진 인생의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나눠져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4. 나가며 

몇 주간의 걸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연합 안에 있다는 개념에 집중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기도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으로 그분이 무엇을 목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하나됨(one), 기쁨(joy), 거룩(holy)

맞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일 겁니다.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과 영성에 깊이 천착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청과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목적은 제자들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의 일상속 세상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길 목적으로 삼습니다.  

 

-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분의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AD30년에 드려졌던 그 기도는 초대 교회에 면면이 흘러 지속적으로 드려지다가 AD85년 어간 요한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도 좋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좋습니다.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따라 적용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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