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3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

 

1   주님, 나의 마음을 다 바쳐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놀라운 행적을 쉬임 없이 전파하겠습니다. 

2   가장 높으신 주님, 내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3   주님 앞에서 내 원수들은 뒤돌아서 도망쳤고, 비틀비틀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4   주님은 공정하신 재판장이시기에, 보좌에 앉으셔서 공정하고 정직한 판결을 나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5   주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문책하시고, 악인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 버리셨습니다. 

6   원수들은 영원히 자취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그 성읍들을 뿌리째 뽑으셨으므로, 아무도 그들을 기억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7   주님은 영원토록 다스리시며 심판하실 보좌를 견고히 하신다.

8   그는 정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백성을 판결하신다.

 

NRSV

He judges the world with righteousness; he judges the peoples with equity(8절).

 

[오늘의 묵상]

* 마음을 다 바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한다. 

도대체 마음을 다 바친다는 말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은 관심을 나누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욕망과 욕구들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 욕망과 욕구를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마음을 다 바친다”의 의미였다. 

카톨릭에서 분심이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이 나뉜다는 뜻이다. 

분심을 극복하고 오직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께 집중하는 것, 그것이 마음을 다 바친다의 의미로 보인다. 

솔직히 이 작업이 점점 어려워진다. 

핸드폰이 항상 곁에 있다. 

궁금한 것은 무조건 빨리 알아봐야 한다. 

내가 알아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분심의 반대가 향심이라고 한다.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향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계속적으로 시각자료가 들어온다. 

배경음악이 그치질 않는다. 

빛과 소리가 주변을 점령했다. 

그 감각을 닫고 마음을 오롯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 때로는 절실하다. 

시인은 마음을 다 바쳐서 주님을 찬양하려고 한다. 

마음을 다 바쳐서 주님의 행하신 일들을 전파하려고 한다. 

시인이 어떤 리더십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표제를 확인하니, 다윗의 시란다.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토록 명령할 수 있다. 

다윗은 왕으로서 외국의 왕들과 사신들과 교류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업적을 전할 수 있다. 

그의 결정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세상에서 그는 과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현대는 지혜로와야 한다. 

신정 혹은 왕정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교가 분리된 세상, 민주주의 세상에서 권한이 있다고 함부로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장하고 선포해야 한다. 

법적 지위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그보다는 그야말로 삶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야 한다. 

말이 아니라 삶이 중요한 이유다. 

말로 전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고 핵심이다. 

그러나 삶이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실망만 남고 다 떠나게 된다. 

실천이 받쳐주는 말이 핵심 중의 핵심이다. 

마음을 다 바쳐서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업적을 드러내는 것의 현대적 의미는, 향심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자기 부인, 자기 성찰에 있다. 

 

 *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

정의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온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본체는 정의를 품어낸다. 

용서하시는 삼위일체는 죄와 악을 벌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으로서는 복잡한 세계 구성체를 해독하기가 버겁다. 

복잡한 세계 구성체는 삼위일체 만큼이나 모순적이다. 

사랑하기에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시지만, 그렇다고 선택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선택도 존중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것을 요구하신다. 

그렇지만, 그분은 인간이 부족하다는 것, 인간이 홀로 다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아신다. 

그렇기에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 죄악의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신다. 

복잡한 세계 구성체는 이렇게 돌아간다. 

그분의 용서가 없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무존재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현재 세계 이전 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는 한 번 존재했다가 무존재 상태가 되었을지.

이전 세계는 현재 세계처럼 복잡하지 않은 구성체였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순적이지 않게 작동했다면, 그래서 죄인들을 무조건 죽이거나 아님 무조건 용서했다면, 그랬다면 그 세계는 무존재가 되었거나 하나님을 압도하는 교만한 세계로 남았을 것이다. 

현재 세계는 복잡한 구성체이기에 이제까지 살아남았고,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죄악을 싫어하시며, 정결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끝까지 죄악을 버리지 않는 자, 회개하지 않는 자는 파멸시키시는 분이시다. 

회개하는 자, 주님께 돌아오는 자는 환대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회개와 회심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지만, 끝까지 거부하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다. 

거부의 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이게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자. 

회개하지 않는 자의 죄를 도말하는 분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자. 

인류의 악을 방치하거나 방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결국 그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리고 그분의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분은 두려운 분이시다. 

십자가가 보여준다.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대속은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행위다. 

정의를 뺀다면, 대속의 필요가 사라진다. 

사랑을 뺀다면, 대속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너무나 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기에 역사 속 모든 인류 각 개개인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주를 보면 더욱 확신하게 된다.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주의 광대함과 신비로움을 느껴야, 모든 사람 개개인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함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분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오신다.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그분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양한다. 

위대하신 하나님. 

 

[오늘의 기도]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의 신비 속으로 안내해주소서. 

당신의 권능을 오늘도 깊이 경험하게 하소서. 

 

말과 삶이 일치되길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마음을 다 바쳐서 찬양하고 주님의 업적을 전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새깁니다. 

찬양할 때 목소리를 높여서 스피커보다 더 크게 찬양한다는 말이 아닐 겁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공적 지위를 이용해서 주님을 선포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며 그렇게 산 만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할 때는 꼭 주석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제 삶을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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