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0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한나가 기도로 아뢰었다. “주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2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3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4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5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6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7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8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

9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10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11 엘가나는 라마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으나,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곁에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

 

 

주석

8절. 하나님의 행위는 종종 세상에 역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같이 전도된 세계라는 모티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한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주님께서 깊이 돌아봐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런 개인적인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분명히 있다. 

한 개인에겐 전 세계의 구원과 맞먹는 기쁨이 찾아온다. 

인생 전체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겐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오랫동안 약자의 위치에서 고통과 고난을 당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한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나보다 더 큰 고난과 시련을 겪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노예 처럼 사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결혼도 못하고 소작농으로 평생을 땅만 일구다 죽는 사람도 허다했다. 

전쟁으로 찍소리 못하고 전장의 이슬이 된 사람은 얼마나 많았을까? 

 

왜 성경은 한나의 이야기에 이토록 주목하는가? 

한나가 고백하는 이 노래를 이렇게 길게 배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저자는 무엇을 강조하고 싶어한 걸까? 

이스라엘은 약한 나라 민족이었다. 

이집트의 노예 때도 그랬고, 가나안에 들어와 정복 전쟁이 끝난 상황에도 그렇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곧 그들은 주변국들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아주 강인한 나라, 강인한 민족이 아니었다. 

언제나 침탈을 당하는 민족이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여로보암 2세나 므낫세 시대에 부흥의 때를 경험하긴 하지만, 대체로 이스라엘은 연약했고, 주변국에 의해 고통을 받았고,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바로 약자의 하나님, 연약한 자를 돕는 하나님이어야 했다. 

한나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한다. 

고통과 시련을 겪는 이들을 도우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 오만한 자를 꺽으시는 하나님, 

 

지금도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연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고통받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가난한 자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억울한 자들을 주목하시는 하나님, 

약자들의 하나님. 

 

그렇지만, 이를 호도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은 곳을 아시는 분이시다. 

오랫동안 기득권으로 자신의 권력을 휘둘렀던 자들이 약자 코스프레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다. 

윤석열과 그의 일당은 자신의 권력을 무한 증식하기 위해 위헌적 계엄령을 내렸다. 

명분은 자유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서란다.

반국가단체, 체제전복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말 같지도 않다. 

위헌, 불법을 저지르고,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망상이다. 

스스로 약자란다. 

그는 약자가 아니다.

독재자의 숨은 야욕을 긍정하는 국민들이 별로 없기에 소수가 되었을 뿐이다. 

자신이 소수자라고 해서, 약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가 다수자를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독재다. 

 

진짜 약자는 따로 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따로 있다. 

그들에게 물적, 인적 자원이 공급이 필요하다. 

 

오늘 김혜령 교수님의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라는 책을 읽었다. 

인지저하증(침해)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며 깨닫게 된 것을 책으로 엮었다. 

“이 글은 치매 환자가 된 아버지와 하루하루 더불어 살기 위해 애쓰는
내 마음에서 쉬지 않고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삶 그 자체에 대한 경외감으로 아버지와 가족을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 생존의 해석학이다.”

가장 약한 자를 돌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치올라오는 짜증과 갈등, 폭력과 미움을 견뎌내야 한다. 

김병년 목사님은 식물인간이 된 그의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약자를 돌보는 삶은 일상에서 일어난다. 

그 일상을 버티는 힘을 잃어버리면, 권력과 돈과 폭력에 중독되어 버리면, 약자를 돌보기는 커녕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하나님은 약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도록 이끈다. 

일상의 숱한 짜증을 이겨내기를 요청하신다. 

 

약자 편이신 하나님을 교리에 묶어두려는 인간의 두려움을 들춰본다. 

인간은 관성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누리는 권한과 자유와 물질을 약자와 나눠야 하는 변화를 인간은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 때문에 관성적으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 두려움을 찢고 나올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성품, 그분의 뜻, 그분의 계획에서 얻을 수 있다. 

 

한나의 개인적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는다. 

이 땅을 고치소서!!

 

[오늘의 기도]

약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제가 좀더 주님의 시선을 갖도록 이끄소서. 

제 삶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하소서.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슬픔 속에 잠을 설칩니다. 

무안 공항 항공기 참사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유가족들을 비하하는 자들의 입을 막아주소서. 

하나님을 운운하며 이상한 설교를 설파하는 자들의 입술을 막아주소서. 

 

전광훈의 입을 막으소서. 

그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일하소서. 

하는 말마다 하나님을 욕보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행태를 보며 절망합니다. 

거악에 대해 말하지 않고, 소악에 대해서만 절규합니다. 

국헌을 문란케하고 내란을 획책하며 외환을 유치하려고 했던 자를 벌하소서.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나님을 폭력으로 전하려는 자들을 막으소서.

하나님은 비폭력,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고심해서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누군가의 강압이나 문화적 억압에 의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 방식으로부터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오염됩니다. 

십자군 전쟁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가 더렵혀졌습니다. 

식민지 선교로 인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왜곡되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 조금씩 자유 세계에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과거의 하나님 이미지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호하소서. 

진정한 당신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자기 희생의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 악에 대해 승리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소서. 

비폭력, 자율성, 인간의 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는 하나님, 억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충분히 질문하고 고심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 사람들이 만나게 하소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하시는 하나님,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시는 하나님, 

복종을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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