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27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2여러분의 재물은 썩고, 여러분의 옷들은 좀먹었습니다.

3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할 증거가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4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5여러분은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으며,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6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악한 부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며 그들에게 닥칠 끔찍한 일들로 울며 통곡하라고 말합니다(1).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가난한 종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고 부정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사용하였고, 의로운 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였기 때문입니다(4-6).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돈과 옷을 자랑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2-3). 탐욕과 폭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를 쌓아둔 자들은, 종국에는 그들이 쌓아둔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것입니다. 나는 땅에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내가 쌓아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

공동체를 살리는 지혜

 

1. 부자들은 들으라

야고보가 편지의 수신자 중에는 부자들도 있었다. 

세계 그리스도인들 중에 부자가 없었겠는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중에도 부자가 있었고, 그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을 찾아 오곤 했었다. 

그런데 어떤 부자들은 심각하게 불의했다. 

 

4보십시오,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소리가 전능하신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이건 범죄에 가깝다. 

율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혹여라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런 부자가 있다면, 그는 복음 율법의 정신을 자신의 삶에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편지 내내 행위에 대해 야고보가 그토록 강조하면서 언급했는지 점점 밝혀지고 있다.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고, 부자와 빈자에 대한 대우가 다르고, 말로 사람들을 험담하고, 공동체의 분열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부자들은 단순한 말을 넘어 품삯을 가로채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지자의 목소리가 야고보에게서 들린다. 

고통의 아우성이 야고보 귀에도 들리고, 소리는 지금 하나님의 어전에도 들리고 있다.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했던 여러 항목 중에,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음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의 울부짖음이 야고보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새로운 기독 공동체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마지막은 자칫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모습이 수도 있었다. 

심각하다. 경각심이 필요하다. 

경고의 메시지를 세계 기독 공동체에 던진다. 

초대 교회 최고 지도자의 일갈이다. 

 

 

2. 의인을 죽이는 부자들

 

6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문장만 놓고 보면, 마치 실제 이런 사건이 벌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의인이 죽어나가고 있다. 

부자들의 탐욕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 

야고보가 육체의 욕심에 대해 언급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 4:2-3) 

 

결국 부자들의 탐욕이 사람들의 생명을 해한다. 

가인의 욕심이 동생 아벨을 죽였던 것처럼 

아합 왕의 욕심이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나봇을 죽였던 것처럼 

성경과 역사에서 부자들이 의인을 죽였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결국 백신의 기술을 빠르게 이전하지 않는 것도 미국이라는 부자들의 탐욕 때문아닌가!

제약사들의 배를 얼마나 채우면 기술 공유가 이뤄질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의 부가 사람을 살리는 쓰이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쓰인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야고보의 지혜는 결국 사람을 살리는 지혜다. 

야고보의 지혜는 공동체를 살리는 지혜다. 

단순히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가르치는 자기계발서와는 전혀 다르다. 

복음을 통해 형성된 기독 공동체를 살리는 지혜다. 

지금 교회에 정말 필요한 지혜다. 

 

부가 한쪽으로 쏠리는 시대, 

부동산으로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시대, 

수많은 정치인들이 양극화를 극복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여전히 더욱 심화되는 모순 

 

야고보의 지혜가 오늘 우리에게 너무 필요하다. 

 

——

공동체를 회복시키시길 원하시는 예수님, 

부자와 빈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부자와 빈자의 부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자가 자신의 부를 통해 공동체를 섬기고, 빈자는 자신의 필요를 통해 공동체를 섬깁니다. 

많은 지혜가 우리 공동체에 더욱 흘러가길 소망합니다. 

 

재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이해관계가 갈리는 공동체가 되길 원치 않습니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가는 공동체가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6 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32악인이 의인을 엿보며 그를 죽일 기회를 노리지만,

33주님은 의인을 악인의 손아귀에 버려 두지 않으시며, 판결을 내리실 때에 의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으실 것이다.

34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법도를 지켜라. 주님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네가 보게 것이다.

35악인의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무성한 잎을 뽐내듯 하지만,

36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모습 찾아볼 없더라.

37 없는 사람을 지켜 보고,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아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으나,

38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니,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을 것이다.

39의인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40주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에,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시인은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해치려고 하지만, 주님께서 의로운 자를 지켜주신다고 말합니다(32). 의인이 주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붙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으며, 악인이 심판받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33-34). 악인들은 지금 잎이 무성한 나무를 자랑하지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미래에 번성할 것입니다(35-38).

 

주님은 의로운 자들의 피난처이시며 그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39-40). 자신이 가진 힘을 붙들고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은 영화가 오래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금세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약한 같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을 붙잡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나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오늘은 말씀이 위로가 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신다.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악인들은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엿보며, 죽일 기회를 노린다(32). 

도대체 그들은 사람들을 해하려고 하는 걸까? 

그들은 악인이 되었는가? 

길이 없다. 답답하다. 서로 사이좋게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을까? 

사람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심지어는 죽이느냔 말이다. 

 

우리 주님을 평화를 사랑하시고,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신다. 

평화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선사하신다. 

 

마태복음 5장

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것이다.

9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너희가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예수님도 시를 발표하셨다. 

그분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받게 것이라고 축복의 말을 남기셨다. 

마태는 시가 특히 맘에 들었나 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시를 사용해서 시작했다. 

평화를 사랑하면 예수님의 시에서도 그렇게 적으셨지만,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다. 

슬픔도 있고, 목마름도 있다. 때로 박해도 있다. 

그럼에도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시편의 시인도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구약의 하나님도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보호하시고 미래의 전망을 열어주신다. 

 

혐오, 쿠데타, 전쟁

이런 뉴스들이 그치질 않는다. 

세계의 경찰이라고 불렸던 미국에서는 혐오 범죄가 늘고 있다. 

총기 사건이 그치지 않는다. 

미얀마의 군인들이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민간인들을 총으로 죽이고 있다. 

내전으로 번지고 있다. 

과연 사람들은 영구적 평화를 구축할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는가? 

화성에 사람을 보낼 계획은 만들어도, 세계의 전쟁을 없앨 계획은 만들지 못하는가? 

평화를 추구할 의도가 과연 있는가? 

세계 지도자들은 무엇을 향해 회의를 하고 모임을 가지는가? 

 

평화를 주십사 다시 기도한다. 

 

 

——

평화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소서. 

수많은 인권 운동가, 긴급구호 현장의 활동가들, 유니세프, 적십자, 유엔 평화 유지군 등의 사람들을 보호해주세요. 

평화가 증진되고 영구적으로 정착되도록 도와주세요. 

북한과의 적대관계가 청산되고 부디 평화로운 관계로 서로 상생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4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1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12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3“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14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것이고,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것이다.”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 분쟁이 생길 서로를 향해 헐뜯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게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12).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장래에 부를 얻게 것을 장담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또한 미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 않는 교만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13-17).

 

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태도로 나타납니다. 죄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이웃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며, 욕심에 따라 많은 것을 얻고자 자기 뜻대로 계획을 세웁니다. 나에게 혹시 이런 자기중심적 태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삶이되길 기도합시다.

 

——

헐뜯기의 비애

아마도 기독 공동체가 제일 못하는 중에 하나가 형제자매를 헐뜯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거의 평생에 걸쳐서 교회 생활을 왔는데, 안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때로 헐뜯는 일이 그치는 것을 못봤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어쩔 없긴 하겠으나, 안따깝게도 누군가에 대한 품평이 그치지 않고 뒤에서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더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회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비전에 집중했었다. 

사람은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사람의 강점과 장점에 대한 이야기보다 약점과 문제점에 대해 말하게 되더라. 

그래서 사람보다 우리의 사명에 집중했었다. 

그나마 그렇게 해야 형제자매를 헐뜯고 험담하게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은사에 집중하게 된다. 비전을 달성하려면 모두의 은사가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꽤나 작동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동체의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약점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함을 몸소 깨닫는다. 

형제자매의 약점이 고스란히 공동체의 약점으로 비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약점을 명확하게 알고, 약점을 서로 보완할 있는 방향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 

그나마 헐뜯지 않기 위해서는 방법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로서 형제자매를 헐뜯고 교회의 긴장도를 높이고 결국 분열에 이르는 것을 참을 없었다. 

야고보가 편지의 핵심 메세지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싸움과 분열, 긴장으로 흠집난 공동체를 바로 잡고 싶다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하나님의 꿈이며 비전이기도 하다. 

사도 요한도 부분에 있어서 끊임없는 메세지를 내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의 하나됨, 세상과 다른 가장 위대한 모습이다. 

영성을 모든 기독 공동체가 배워야 한다. 

그런면에서 기독교 공동체 인사평가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 

조직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장단의 평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개인의 은사/보완점에 대한 리뷰가 되어야 한다. 

자짓 개인을 헐뜯는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다. 

평가서가 바뀌어야 한다. 평가서는 조직 생활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사명과 하나됨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은 어디에 필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과 함께 묵상하면서 스스로 자기 반성(리플렉션) 과정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기업의 평가 체계를 가져오는 것은 일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같지만, 자칫 일반 기업들이 빠지는 함정에 그리스도인들도 빠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자신을 평가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말씀이 말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진로와 미래도 설계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겠다.

구체적인 방법은 좀더 고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사명을 마태복음 28 대위임령 혹은 마태복음 22 대계명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평가하도록 요청한다. 공동체의 하나됨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이 좋겠다. 각자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을 묵상하면서 작성하도록 한다. 이렇게 자기 평가를 말씀을 중심에 두고 진행하는 것이다. 기업의 눈으로 평가서가 작성되어서는 곤란하다. 공동체는 다른 방식, 성경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자기 평가를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 기업의 윤리 수준에 맞추려고 하면, 세상의 상식 수준의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성경의 기준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공동체적 하나됨에 많은 무게를 두어야 한다. 

하나됨을 위한 노력에 많은 방점이 찍혀야 한다. 

서로를 세우는 하나됨이 우선될 , 비록 효율성과 효과성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생명력을 유지할 있다. 

공동체의 생명력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이게 흐트러지면 공동체는 조직이 되고, 조직은 결국 자기 생존 본능 때문에 본래의 사명에 걸맞는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 내기 어려워진다. 

 

헐뜯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한 노력 

오늘의 본문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이렇게 퍼져간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야고보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그토록 원하셨던 예수님,

야고보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 헐뜯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는 평가가 난무합니다. 

엘리트주의로 갈수록 평가가 고차원적입니다. 

조직이 강화될수록 평가가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형평성 논란은 언제가 가중됩니다. 

주님, 부디 하나될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4월 23일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툼과 분쟁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 폭력과 살인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1-3절).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들을 간음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이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로 인해 마음아파 하십니다(5절).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킬 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 친밀히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시며(6-8절), 우리가 욕심에 따라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겸손히 주님을 찾을 때 온전히 회복시켜주십니다(9-10절). 내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깨어진 모습이나 관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내 마음을 돌이키며 회복의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시다.

 

——

순결을 향한 싸움

1. 단어의 연결, 생각의 연결 

야고보의 사고를 따라가는 것, 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 그 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 분쟁, 갈등을 보았다(1절). 

그리고 그러한 싸움은 욕심 때문이라고 밝힌다. 욕심은 쾌락과 연결되어 있다. 

쾌락은 기준을 무너뜨리고 선을 넘나든다. 결국 간음하는 사람들(4절)을 양산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쾌락을 찾고, 하나님에게서도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두 마음(7절)을 품게 되고, 마음의 순결을 잃게 된다. 

두 마음, 두 세계에서 동시에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분명히 권면한다. 

 

“우십시오”(9절)

울라. 

울어라.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이 유지되지 못함에 대해 슬퍼하며 울어라. 

그렇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라. 

 

야고보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이런 길을 발견하게 된다. 

 

2. 마음의 순결 

오늘 본문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권면의 편지는 그래서 무겁고 부담이 된다. 

마치 법조문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어구는 “마음의 순결”이다. 

야고보의 사고와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순결에 가 닿는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4절). 

처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랑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기쁨에 만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욕심이 생겼다. 세상이 주는 쾌락도 만만치 않게 기쁘다는 사실을 아니 때로 그 이상임을 깨닫는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마음의 순결을 잃어간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걸 원치 않으신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상당히 질투하시는 분이시다(5절).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 

세상의 쾌락에 넘어가 결국 그 마음의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때, 분열과 싸움과 갈등과 긴장이 고조될 수 밖에 없다(1-3절). 

결국 이런 마음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표방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깨지고 싸우고 죽인다. 

그걸 야고보가 봤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장부터 야고보는 분노, 말 조심, 차별 금지 등의 덕목을 끌고 들어왔던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결코 이런 그림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질투하시지만, 결국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으면 공동체는 분열되어 산산히 조각나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현실의 하나님 나라가 심각하게 오염되고 훼손되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질투의 마음을 발동하신다. 

 

그분은 마음의 순결을 원하신다. 

 

3. 갑분싸

여기까지 묵상하며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싸늘해진다. 

내가 누리는 여러 즐거움들이 혹시 두 마음의 결과는 아닌가 싶다. 

수 많은 즐거운 요소들이 혹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들, 좋은 음식, 화려한 액션 영화, 스포츠, TV… 

 

즐거움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잘 지키고 있어야겠다. 

그 경계선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렇다고 어느 율법주의자처럼 아예 경계선까지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경계선을 설혹 넘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6절).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고도의 응시를 낳고 응시는 마음의 흐름을 낳고, 마음의 흐름은 의도치 않은 경계 침범을 낳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길은 경계를 잘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8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가는 길이다. 

 

그럼에도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하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하다. 

 

——

참 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예수님, 

주님 주시는 기쁨에 더 노출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세요. 

세상이 주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완전히 거부하는 율법주의적 완벽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예수님을 더 가까이, 성령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겁니다.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유익과 즐거움을 어느 정도 누리면서, 

그럼에도 가장 큰 열망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이 경계를 지키는 일.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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