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08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두려움 속에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샬롬-히브리어) 인사를 받고 기뻐합니다(19-20).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낸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용서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21-23). 그러나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제자들의 예수님 목격 소식을 듣고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없다고 말합니다(24-25).

 

예수께서 도마에게 찾아가십니다. 자신의 못자국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도마는 예수님께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립니다(27-28).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나의 삶에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

나의 나의 하나님

 

1. 공포영화

두려움은 때로 함께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배가된다.

작은 공간에 모인 제자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약식재판을 통해 그랬듯이, 자신들도 언제든지 잡아서 죽일 있다고 생각했다. 

십자가의 치욕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다가올 있는 일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일 가능성이 높은 바로 공간에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공포영화의 장면이었다. 

 

실제로 덜덜 떨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적막이 흐른다. 

노래라도 부르고 싶지만, 혹여 들킬까봐 작은 미소조차 조심스럽다.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때문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시체는 사라졌다. 

누가 가져갔을까 서로의 생각을 나눴지만, 어느 순간 말소리 조차도 끊겼다. 

두려움의 숨소리만 커져가고 가끔씩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 두려움을 뚫기는 어려웠다. 

그도 이제는 체념하듯 조용하다. 

용기를 북돋을 말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밥먹는 것도 곤욕이다.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먹는 내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위장이 멈췄다. 위장의 기쁨이 사라지니 뇌가 멈추는 같다. 

나이 어릴수록 분위기에 적응이 안된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보고 싶다. 

수소문이라도 해야 같은데, 괜히 그랬다가 유대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지 모른다. 

 

2.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생각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 예수님이 등장하신다.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샬롬!!’

두려움은 평안을 해친다. 두려움은 매순간 눈치를 살핀다. 안절부절, 다음 해야할 ,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정상적인 판단 기능이 멈춘다. 

평소에 보이던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어느새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없었다. 

이해는 간다. 저녁이고, 어둑컴컴한데다 문까지 걸어 잠그고, 창문도 닫았으며, 가능하면 불이 바깥으로 새지 않게 커튼도 쳤다. 촛불에 의지하여 아른거리는 서로의 그림자만 바라볼 , 촛점을 맞춰 사람들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허기사 지금은 거실이 너무 밝다. LED 영향이다. 그때야 밤이 되면 자연시계에 맞춰 잠들어야 하는 노멀이다. 

 

예수님은 작은 공간을 거닐면서 제자들의 표정을 살핀다. 

두려움과 의문 투성이의 눈빛을 보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신 건가? 시체는 어디로 간건가? 혹시 우리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빼돌린 것은 아닌가? 가룻유다가 배신 했는데, 혹시 이곳으로 병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아닌가? 아니 그는 배신을 하고 지랄인가?’

두려움, 비난, 욕지거리, 답답함, 의문, 원망, 후회후회두려움

 

그제서야샬롬!”

깜짝 놀란다. 적막을 깨뜨리는 평화롭고 맑은 목소리가 울린다. 지난 삼일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목소리다. 아무도 그런 맑은 하늘 높은 소리를 적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사이에, 빛이 다락방에 가득하다.

대반전 

진짜 살아나신 것이다. 마리아의 말이 맞았다. 12제자만 있었을까? 아니다. 남자 여자 없이 예수님의 깜짝 등장에 눈물이 쏟아진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쉰다. 

 

자신의 몸만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 

어두운 마음의 기운을 그분의 숨으로 몰아내신다. 

~~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다. 

성령을 받아라

그분의 숨은 공기가 아니라 영이었다. 

하나님의 , 예수님의 , 거룩한 ,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의 영이다. 

서로 비난 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용서할 때가 되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미워했던 사람들, 원망했던 모든 상황들, 심지어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말들조차, 이제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인해 용서할 있게 되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난을 멈추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마음 문을 열어라. 

너희가 쉬는 숨은 공기가 아니라 이제 내가 보내는 성령이다. 

성령은 너희가 세상에 살아갈 힘과 용기다. 지혜요 사랑이다. 

성령의 숨을 쉬어라.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 의문은 정당하다. 

그에게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라도 그랬겠다. 

나에게 엄청난 영광의 순간이 빗겨갔을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의문의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셨다. 그리고 다시 오셨다. 

도마를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제자들 전체의 하나됨을 위해서다. 

저자 요한은 하나됨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청한 것은 서로 사랑함과 하나됨이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대제사장적 기도의 핵심도 그것이다. 하나됨 

그러니 영광의 순간을 도마를 위해 재연하셨다. 

8 동안 도마는 하나됨을 누릴 없었다. 

기쁨의 소식을 혼자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재연은 대성공이었다. 

누구도 도마처럼 직설적으로 예수님을 부르지 못했다. 

마리아는 라부니(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고 불렀겠다. 

도마의 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후대의 모든 제자들의 교본이 되었다. 

예수나의 , 나의 하나님 

이것은 신적 고백이었다. 

예수님 직접 입김으로 성령의 숨을 주시지 않았더라도, 그곳은 성령의 숨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도마는 이미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다시 자기에게도 나타나주시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성령의 숨은 도마의 고백을 만들었다. 고백은 도마 자신이 만든 것으로 보기 어렵다. 

고백은 성령님의 작품이었다. 

8일간 성령님은 도마의 마음 속에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

부활의 예수님, 

성령의 숨으로 저를 채워주소서. 

제가 머무는 모든 공간을 채워주소서. 

 

사랑과 용서가 더욱 빛나는 공간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사람을 용서하게 하소서.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도록 역사하소서.

잘못한 사람이 피해자의 치유 과정에 겸손하게 임하게 하소서. 

 

나의 나의 하나님, 

고백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7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1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15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알고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6예수께서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라부니!하고 불렀다. (그것은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천사들은 우는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고, 어디에 있는지 없다고 대답합니다(11-13). 마리아가 찾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는 동산지기로 생각하여 예수님의 시신의 행방만을 묻습니다(14-15).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익숙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습니다(16).

 

주님은 자신을 붙잡고 있으려는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전하라고 하십니다(17).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것과 예수님께 들은 말씀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18). 예수님의 부활은 슬픔과 절망에 있던 마리아에게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어떻게 다가옵니까?

 

——

기쁨의 탄성, 라부니

 

1. 천사들의 위치 

오늘 본문엔 질문거리가 많다. 12절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위치가 의아하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천사들은 무덤 속에 있는가? 천사들 명은 예수님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명은 발치에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가? 굳이 다르게 앉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넣은 장소도 아닐 텐데,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추측을 해본다. 주석들을 찾아보는 노력과 열심을 기울이지 않고, 기존 정보와 상상을 통해 추측해 본다. 

아마도 예수님의 삼베옷과 머릿수건을 벗겨 가지런히 개켜 놓은 존재가 천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천사는 예수님의 머릿수건을 벗겨냈다. 다른 천사는 예수님의 삼베옷은 목에서부터 발까지 걷어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도운 존재들이 바로 천사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명확하게 증언한다. 자신들이 시신을 감싸는 옷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었으며, 그것도 명이나 되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드로나 요한도 열심히 달렸지만, 어제 오늘 본문의 사건 전개를 재구성하면, 막달라 마리아도 상당히 많은 거리를 열심히 달렸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가서 사실을 알렸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열심히 달려가던 길을 쫓아 다시 무덤에 도착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시신 도난 사건에 대해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혼자 남아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11). 그러다가 던지시 무덤 속을 쳐다본 마리아는 깜짝 놀라게 된다. 천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절실하다. 새벽녘 마리아의 울음을 상상한다. 슬픈 울음 소리에 천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마리아의 슬픔에 대한 반응이었다. “여자여, 우느냐?”(13)

 

2. 라부니

결국 베드로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이 아니었다. 제일 처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무덤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던 그였다. 천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함께 계셨다(14). 슬픔과 눈물에 젖어 있었던 마리아는 그토록 애정하던 예수님을 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설마 예수님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던 며칠 전에 로마의 병정이 옆구리를 찌르던 모습을 보았던 , 몰약과 침향을 바르던 모습을 지켜봤던 , 돌무덤에 가두고 돌로 막던 모습을 봤던 , 마리아는 도저히 상상할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야를 부르신다. “마리아야”(16). 

마리아야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부르심에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다정하고 위엄있고 따뜻하고 권위있는 음성이 들린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의 목소리, 어투였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라부니”, “선생님

목숨을 눈물에 그는 보답을 받았다. 가장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라부니라고 부를 있었다. 

 

3. 부활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궁금한 하나가 17절이다. 

 

17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사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제자들을 찾아 만날 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는, 마리아 때는 안되고 도마 때 되었다면, 사이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단 말인가? 부활하시자마자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았지만, 곧바로 올라가셨다가 다시 내려오셔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으로 정리할 수는 있겠다. 

 

그렇게 정리는 되지만, 쉽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승천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쉽게 일어날 있는 일인가? 아님 승천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서인가? 

여튼 질문이 많아지는 구절인 것은 확실하다. 

 

질문과는 별개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와락 끌어 안으려고 했다는 데에 만원을 걸겠다. 

애정하던 예수님을 실제 다시 보았다. 

그토록 찾고 바라던 예수님이 눈앞에 살아서 계신 것이다. 

손이라고 잡고 싶었다.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슬픔의 눈물이 감동의 눈물로 더욱 강하게 흐른다. 

제자들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의 드라마다. 감정의 곡선이 요동친다. 

 

예수님을 경험하고 싶다. 

더욱 그분을 사랑하고 싶다.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시는 그분을 오늘 만나고 싶다. 

 

——

예수님, 나의 라부니,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여주셨던 드라마를 저에게도 보여주세요. 

슬픔으로 가득찬 시공간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도와주세요. 

 

미얀마의 시민들이 결국 수류탄을 던지게 되었답니다. 

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6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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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주간의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그래서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둘이 함께 뛰었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주일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실을 전합니다(1-3). 베드로와 요한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무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예수님을 감쌌던 삼베옷과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믿습니다(4-8).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러 말씀하셨고 성경에서 약속한 부활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9-10).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은 잊은 자신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나도 생각에만 몰두해서 주님의 말씀을 잊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새벽 달리기

 

1.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의 자기 인식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요새의 용법에는필자”, “J” 등을 사용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같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배워야 자세다.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규정한 사람들은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의중, , 의도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요한은 정말 그랬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간다.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집중한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청한다. 

이게 사랑의 힘이다. 사랑받는 자의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다. 

 

2. 달리기

베드로와 요한이 달리기를 한다. 

얼마나 급한 상황인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여성들의 말에 혼비백산정신이 없다. 

뛰기 시작한다. 골목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가로지른다. 무덤이 있는 곳까지 울퉁불퉁한 돌산길을 뛰어 오른다. 

숨이 가쁘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같다. 마라톤처럼 숨을 고르면서 정신이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없었다. 

그냥 뛰는 것이다. 자신이 있는 최고의 속도로예수님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달린다. 

 

베드로보다는 요한이 빨랐다. 나이차이? 사랑의 차이? 

하지만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덤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베드로를 기다렸다. 

삼베가 보인다. 저건 예수님 아닌가? 어슴푸레 보이는 흰색 세마포에서 희망을 봤을 수도 있다. 아직 무덤에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문이 열린 것도 이상하지만,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이 보인다. 혹시 매복했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을 잡으려는 시도는 아닌가?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로마 병사들의 함정에 빠져서 예수의 시체 탈취 사건의 주범이 되는 순간, 예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있겠다싶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베드로가 도착했다. 

베드로는 생각이고 나발이고일단 무덤으로 들어간다. 그의 저돌성은 익히 알고 있던 ,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로마 병사가 있든 말든, 주변에 뭐가 있든 말든, 일단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을 헐떡이며무덤 안의 동굴의 울림은 소리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새벽의 달리기는 예수님의 제자 핵심이었던 명에게 마치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려움, 걱정, 불안 

멈출 없었던 달리기는 동굴 세마포 앞에서 산화된다. 

잊을 없는 그날 새벽의 전력질주. 

 

3. 수건과 삼베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의 몸을 싸맸던 삼베와 머릿수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돌무덤의 입구의 큰돌을 누군가가 옮겨놓았다. 시체 도둑이거나 로마 병정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시체를 싸맸던 삼베와 수건을 벗겨서 두었는가? 그것도 머릿수건은 곳에 따로 개켜 있다니 

 

7_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었다. 

시체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든, 시체를 감쌌던 삼베와 수건을 풀어 놓을 리가 없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체의 옷을 벗긴다?? 

썩어가는 맨몸의 시체를 들고 옮긴다?? 

사이에 머릿수건은 쪽에 가지런히 개켜 놓는다??

이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명할 방법이 별로 없다. 

다른 방식으로 추리해야 맞다. 기존의 시체 탈취 방법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 말했지만, 마음에서의 부활이지 육체적 부활일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었다. 

성경의 기록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흘려 보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확하다. 거짓이 아니다. 

저자는 그날의 새벽 달리기부터, 무덤과 세마포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명확한 부활사건을 철저하게 믿기를 바랬다. 

그날 새벽의 제자들은 믿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믿을 밖에 없을 정도로 분명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제자들이 시신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는 성립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시체의 옷을 풀어헤치고 예수님의 맨몸시체를 옮길 정도의 미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빈무덤의 부활의 증거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자신의 머릿수건을 차곡차곡 개켜서 곳에 두고 나오셨다. 

돌문이 마치 자동문처럼 손만 대자마자 굴러갔다. 

이미 부활체에 어울리는 새옷을 입고 계셨다. 

그렇게 유유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이제 쇼타임이다. 진정한 왕이 되셨다.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겼다. 

 

더보기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숨을 헐떡이며 전력질주 하던 제자들 옆에 계셨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부활을 믿듯, 당신의 재림도 믿습니다. 
오셔서 모든 고통과 슬픔 당한 사람들을 구원하소서. 

내전 중에 있는 모든 나라를 구원하소서. 

기후위기로 지구는 병들었습니다. 지구를 구해주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세마포와 머릿수건을 보여주소서. 

위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5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2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고,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3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슬기를 짜내어서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4잠자리에 들어서도 속일 궁리나 하고, 범죄의 길을 고집하며, 한사코 악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5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6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7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숨습니다.

8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9생명의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10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11오만한 자들이 발로 나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손으로 나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12 때에 악을 일삼는 자들은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악인의 모습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교만한 , 거짓된 ,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악한 계획을 꾸미는 것으로 묘사합니다(1-4). 반면 하나님의 사랑은 넓은 하늘을 채울 만큼 가득하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바다처럼 깊습니다(5-6).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주의 사랑과 의로운 돌보심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7-9).

 

시인은 주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며,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10-11).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며 악한 일을 일삼다 심판을 받지만(12),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길 기도합시다.

 

——

1. 반역의 충동

시인은 악인들의 마음에 있는 충동에 대해 다룬다. 

충동은 본능적이다. 갑자기 튀어 나온다. 무조건적 반응이다. 

이면도로를 오손도손 걷다가도 뒤에서 갑자기 경적을 울려대면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온다. 

악인의 마음에 있는 충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반역의 충동이다. 

누구에 대한 반역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길 원한다. 

 

시인은 제대로 짚었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반역의 충동을 계속 안고 산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학습하지 않았거나, 믿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듣지 않는 , 들어도 거부하는 , 다른 신들의 이야기에 현혹된 자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기 일쑤다. 

그렇게 반역의 충동을 방치하게 되면 악인이 되어간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반역의 충동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이웃에 대한 악행으로 이어진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속일 생각을 한다. 범죄의 길을 한사코 고집한다. 악을 고집한다. 

머리를 쓰는데 슬기와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골탕먹이고 죽이는 일이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

시인은 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하기 시작한다(5 이하). 

악인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자연스런 흐름은 의인에 대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 집중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하심을 노래한다. 

유독 눈의 띄는 표현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6_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사람과 짐슴을 똑같이 돌보신다는 그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짐승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나도 점점 동물에 대한 사랑이 커져가고 있다. 

개는 훌륭하다, 고앙이를 부탁해, 동물 농장 등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동물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 전체를 사랑하신다. 

창조때부터 지금까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시인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3. 시인의 간구 

시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주목했는가? 

시의 마지막 10-12절에 이유가 나온다. 

약간 유치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에게 간청을 드린다. 

 

10_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11_오만한 자들이 발로 나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손으로 나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12_ 때에 악을 일삼는 자들은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오만한 자들은 넘어지길 요청한다. 

시인의 진심이 드러난다.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자신에 대한 보호와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에 대한 저주로 이어진다. 

 

이게 시다. 기도다.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요, 간청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현실의 악에 맞설 힘이 없다. 

하루 종일 악한 생각과 계획을 짜는 사람과 어찌 맞설 있단 말인가? 

 

드라마 빈센조의 핵심 메시지는거악을 소악이 혼쭐낸다이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쓰레기이다.

거대한 악의 카르텔에 맞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악에 의존한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악한 생각을 집요하게 이어나간다. 

규모와 깊이의 구조악에 맞서 사람들은 악을 이길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지만, 그것이 선은 아니다. 

 

, 과연 일상의 신실한 사람들이 거대악에 맞설 있는가? 

매일 모든 시간에 악을 계획하고 치밀하게 디테일하게 공격하는 악인들에게 평범한 범부들이 어떻게 대적할 있는가? 

그렇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이다. 

신실하신 , 모든 자연을 사랑하시는 , 악인을 미워하시는 , 생명의 샘이 되시고, 쉼터가 되시고, 빛을 비추시는 , 그분께 집중할 밖에 없다. 

울분을 토로할 분은 밖에 없다. 

 

그렇다고 거대악에 맞서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맞설 있다. 그러나 혼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있는 일이다. 

 

미얀마 군부의 유혈 진압을 규탄한다. 

미얀마 청년들의 울부짖음에 나의 외침을 덧붙인다. 

 

주님,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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