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31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로는 고집이 세서, 백성들을 내보내기를 거절하였다.

15 그러니 너는 아침에 바로에게로 가거라. 그가 물가로 갈 것이니,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만나거라. 너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16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임금님께 보내어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예배하게 하라, 하셨는데도, 임금님은 아직까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주님께서 친히 주님임을 임금님께 기어이 알리고야 말겠다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쥐고 있는 이 지팡이로 강물을 치면, 이 강물이 피로 변할 것입니다.

18 강에 있는 물고기는 죽고, 강물에서는 냄새가 나서, 이집트 사람이 그 강물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1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지팡이를 잡고 이집트의 모든 물 곧 강과 운하와 늪과 그 밖에 물이 고인 모든 곳에 손을 내밀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 모든 물이 피가 될 것이며, 이집트 땅 모든 곳에 피가 괼 것이다. 나무 그릇이나 돌 그릇에까지도 피가 괼 것이다."

 

20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그가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강물을 치니, 강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하였다.

21 그러자 강에 있는 물고기가 죽고, 강물에서 악취가 나서, 이집트 사람들이 그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이집트 땅의 모든 곳에 피가 괴었다.

22 그런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3 이번에도 바로는 이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발길을 돌려서 궁궐로 들어갔다.

24 이렇게 하여서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니, 모든 이집트 사람은 마실 물을 찾아서 강 주변에 우물을 팠다.

25 주님께서 강을 치신 지 이레가 지났다.

 

주석

강물을 치니, 강의 모든 물이 피로 변함(20절) 많은 사람이 열 재앙을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명확한 공격으로 본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생명줄이었다. 농업과 궁극적인 생존은 6,611킬로미터에 달하는 강을 따라 비옥한 흙을 퇴적시켜 주는 주기적인 홍수에 의해 좌우되었다(IVP 배경주석).

 

주님께서 모세에게 고집 센 바로에게 가서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예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강물이 피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4-19절). 주님의 말씀대로 강물이 피가 되어, 물고기가 죽고 악취가 납니다(21절). 이집트 사람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어 우물을 팝니다(24절). 그럼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듣지 않습니다(22절). 

 

이집트의 생명줄인 나일 강이 피가 되었습니다. 첫째 재앙은 나일 강을 관할한다고 믿었던 이집트 신을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20절). 이집트 사람들은 생명줄처럼 의지했던 것으로부터 오히려 곤경을 겪습니다(24절). 첫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으로 느껴집니까?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도 고집스러운 바로처럼, 나의 마음이 무감각하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충격 그 자체다. 

어떤 영화가 떠오른다. 

피를 뒤집어 쓴 영화다. 

확인해보니 영화 캐리였다. 내가 본 것은 2013년 클로이 모레츠가 캐리역을 맡은 영화였지만, 조사해보니 1976년 원작이 있었다. 

https://rayspace.tistory.com/1279

그런데 강물이 피가 되면, 강에서 놀던 아이들은 온통 피범벅이 된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부모들은 놀라고 아이들은 경기한다. 

나일강은 그들에게 생명줄이며 젖줄이다. 

파라오가 파라오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이집트가 거대한 왕국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생산성을 극대화되어 잉여 생산물을 만들 수 있는 근원이 바로 나일강의 정기적 범람이었다. 

강을 중심으로 마을과 도시들이 발달한다. 

강을 중심으로 물건과 상품들을 교류된다. 

그 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다. 

물고기가 죽는다.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색으로 상류에서 하류로 거대한 강이 흐른다. 

저주다. 

보고도 믿을 수 없다. 

 

나일강의 신들이 있었을 것이다. 

강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나일강의 신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 이집트 신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집트를 보호한다고 믿었던 모든 신들이 나일강에서 죽었다. 

아마 큰 전쟁이 나서 강 상류에서 대대적인 도륙과 살륙이 있으면 강의 색이 피빛으로 물들기도 했다. 

강이 피가 된다는 것은 신의 죽음을 넘어 실제적인 전쟁의 위협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불안이 극에 달한다. 

백성들의 불안은 곧 나라의 위기며 리더들의 위기다. 

 

피로 변한 나일강이 가장 충격적이며 오늘 장면의 전체를 뒤덮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론의 지팡이를 지목하신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지팡이는 아론의 지팡이라는 점이 자꾸 거슬린다. 

왜 모세의 지팡이를 쓰지 않으시는가? 

왜 아론의 지팡이가 이토록 눈에 띄게 등장하는가? 

뱀으로 변한 것도 아론의 지팡이였다. 

나일강을 피로 만드는 것은 아론의 지팡이였다. 

반면, 홍해를 가를 때는 모세의 지팡이가 역할을 한다. 

광야에서 바위를 내리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할 때는 모세의 지팡이였다.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의미는 아론의 리더십의 확립이다. 

아론은 제사장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모세는 왕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겠지만, 아론은 앞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아론의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리더십의 확립은 그의 지팡이를 통해서 진행된다. 

아론이 그의 지팡이를 높이 들 때, 사람들은 지팡이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재앙_장자의 죽음 재앙도 사람들의 입에 언제나 오르내리겠지만, 첫번째 재앙도 만만치 않다. 

나일 강이 피가 되는 재앙이 일어난 계기가 바로 아론의 지팡이라는 점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래서 이적이 일어나는 그 지팡이 상징에서부터다. 

 

파라오의 술사들도 이와 비슷한 마술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 저자는 파라오 술사들의 마술과 첫번째 재앙의 차이를 그 스케일에서 찾는 듯 싶다. 

25절이다. “주님께서 강을 치신 지 이레가 지났다.”
7일간 영향을 주었다. 

하루 이틀이었다면 주변의 우물을 굳이 파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상의 날들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강 주변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우물 파는 작업이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터, 따라서 7일간에 걸쳐 강물은 여전히 원래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강이 약 7일간 흐른다. 

술사들의 마술은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색깔을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색료를 몰래 뿌린다던가 무슨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이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압도적인 비주얼이 며칠간 이집트를 휘감싼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실 때가 있다. 

물론 모세에게 찾아가시고, 아론을 불러오시는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그 일도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거대한 스케일, 압도적 비주얼의 일을 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히브리 신의 능력을, 히브리 신의 스케일을… 

그분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그냥 환상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백성들의 종교성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다. 

위대하신 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자연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큰 규모의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길 기도한다. 

단순히 우리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심리적 회복차원을 넘어, 

압도적이고 거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수련회면 참 좋겠다. 

그분의 경이롭고 위대하심을 아이맥스로 보고 듣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큰 스케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런 날이 오길 바라고 또 바란다. 

 

아론의 지팡이가 어디있더라? 

 

 

[오늘의 기도]

위대하신 주님, 

거대한 스케일, 압도적인 비주얼의 하나님, 

당신이야 말로 미친 CG를 현실로 보여주셨습니다. 

나일강을 피로 물들이셨듯이, 예루살렘을 피와 어둠으로 채색하셨습니다. 

나일강의 피가 이집트에 국한된 영향을 주었다면, 예루살렘의 피와 어둠은 온 세상, 온 우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도 십자가를 찬양합니다. 

당신의 그 놀라운 역사를 찬양합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오늘도 보여주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치고 들어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8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8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9 "바로가 너희에게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라고 하여라. 그러면 지팡이가 뱀이 될 것이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갔다. 그들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 자기의 지팡이를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11 이에 바로도 현인들과 요술가들을 불렀는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였다.

12 그들이 각자 자기의 지팡이를 던지니, 그것들이 모두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다.

13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석

이집트의 마술사(11절) 바로의 술객들은 징조와 꿈에 대한 문헌에 정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데도 전문가였을 것이다. 그들은 감응 마술을 행했을 것이며,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사용하여 신들과 영들에게 명령을 했을 것이다(IVP 배경주석).

 

주님의 말씀대로 모세는 아론을 통해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행합니다(8-9절).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행했지만,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립니다(11-12절).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13절).

 

드디어 주님이 ‘주님’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집트 마술사들의 능력을 압도했습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관념적이거나 교훈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능력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으로 ‘주님’되심이 증명되어야 할 삶의 영역이 있습니까? 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83세의 아론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세가 찾아와서는 갑자기 파라오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꿈도 꾸지 못했었다. 단지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가해지는 고통스런 노동 강도를 바라보며 자신도 빨리 죽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느니 눈을 감고 말지. 

그런데 동생 모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세의 가족들은 미디안 사람들이었고, 모세의 히브리어 혹은 이집트어 수준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왕궁에서 살았던 모세가 양을 치는 목자의 복장으로 다가왔다. 

오랜 이야기를 끝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부르심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파라오에게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론 자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파라오를 만났다. 

순전히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에게도 말씀하신다. 

활은 시위를 떠났다. 

하나님은 아론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다. 

이상하다. 왜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고 아론의 지팡이일까? 

모세나 아론이나 나이가 들어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냥은 오래 돌아다니지 못한다. 울퉁불퉁한 산길, 오솔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에 지팡이는 유용하다. 

아니 유용함을 넘어 어느 순간에는 필수품이 된다. 

이제 모세뿐 아니라 마음 속에 의심이 있을 수 있는 아론에게도 확신이 필요했다. 

모세의 지팡이도 위대한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아론의 지팡이도 이적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적의 통로가 되는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면 그것 만큼 큰 믿음의 상징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론의 지팡이는 항상 하나님의 이적을 상기시킬 것이다. 

항상 들고 다니는 지팡이가 하나님을 떠올리게 한다. 

그분의 부르심과 일하심을 기억하게 한다. 

아론도 이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 

 

현실에서 이것이 필요하다. 

답답한 상황에서 이것이 필요하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일하심을 상기시킬 나만의 지팡이 말이다. 

옷이 될 수도, 책이 될 수도, 차가 될 수도 있다. 

음식이 될 수도, 시간이 될 수도,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매일 사용하고 애용하는 그 무언가가 하나님을 떠올리고 그분의 역사와 능력과 부르심을 상기시킨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좋다. 

그분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그분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만족한다. 

 

주말 아침, 뭔가 분주하다.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느낌. 

여전히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느낌. 

여전히 뒤에 빠져서 관전자가 된 느낌. 

찝찝하다. 

그 지팡이가 내 손에 들렸으면 좋겠다. 

주님께 지팡이 하나 만들어 달라고 요청드린다. 

 

 

[오늘의 기도]

능력의 하나님, 

당신의 능력이 제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길 기도합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부르심을 매일 확인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그 부르심에 따라 용기 있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소서. 

 

주말이지만 부담스럽습니다. 

해야할 일들도 많고, 정서적 부담도 여전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안식의 순간을 허락하소서. 

몸과 마음이 쉼을 누리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8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이다.

2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주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이집트의 임금 바로에게 전하여라" 하셨다.

30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는, 네가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되게 하고, 너의 형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되게 하겠다.

2 너는,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을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여 주고, 아론은 그것을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여라.

3 그러나 나는, 바로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놓고서,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겠다.

4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5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낼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6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의 나이는 여든 살이고, 아론의 나이는 여든세 살이었다.

 

NIV

Then the Lord said to Moses, “See, I have made you like God to Pharaoh, and your brother Aaron will be your prophet(1절).

And the Egyptians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stretch out my hand against Egypt and bring the Israelites out of it(5절).

 

주님은 바로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곤혹스럽습니다(28-30절, 참고 6:10-13절). 이번에 주님은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릴 것이며, 그로 인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칠 것을 예고하십니다(1-4절). 그 후 이집트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5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현실이라는 주제가 반복됩니다(28-30절).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현실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3-5절). 예상되는 결과에 부담을 갖기보다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6절), 주님이 ‘주님’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한번 규정된 자기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모세는 자신이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인식이자 자신의 약점이었다. 

파라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을 전하라고 할 때마다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만약 짧은 시간에 이 말이 반복되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짜증날만 할 변명이다. 

성경을 스르륵 읽게 되면, 모세의 저 말이 계속 반복되기에 독자들도 모세의 말에 약간은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성경의 시간은 읽기의 시간과 다르다. 행과 행 사이에 많은 시간이 녹아 있다. 

호렙산에서의 대화와 이집트에서의 대화는 시간차가 난다. 

모세의 말은 충분히 드릴 수 있는 말이다. 

 

나도 종종 그런다. 나의 약점에 대해, 나의 자기 규정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말이 어눌하고, 생각의 정리가 어려우며, 고유명사를 잘 외우지 못하고, 과거 사건에 대해 명확한 기억이 없다. 

좋은 점이 왜 없겠냐마는, 부족한 것이 유독 잘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이런 나의 자기 인식이 가로막는다. 

내가 모세였어도, 같은 말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나님 저는 말이 어눌하고, 긴장을 많이 하며, 생각이 중간에 꼬이기도 하고,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하나님도 답답하실 것 같다. 

그래도 이게 나의 실제인 걸 어쩌겠나. 

 

하나님도 급하셨다. 조금 무리한 발언을 하신다. 살짝 부담스런 말씀이시다. 

모세를 파라오에게 하나님처럼 보이게 하시겠단다. 

아론을 하나님의 대언자, 예언자처럼 보이게 하시겠단다. 

그전에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가서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아론이 도울 것이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모세를 신처럼 보이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모세를 통해 이적과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에 모세는 용기를 갖는다.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전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통해 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켜주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모세를 신적 위치까지 끌어 올려 주시겠다고 하신다. 

파라오와 동족의 거부와 증오 앞에서 위축되고 포기하고 싶었던 모세가 다시 용기를 낸다. 

뭔가 다른 흐름이 형성될 거라 믿는다. 

 

그 믿음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의 확인이 있다. 

 

3 그러나 나는, 바로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놓고서,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겠다.

4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파라오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것도 어찌보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다. 

이 대목이 항상 걸려왔다. 왜 하나님은 파라오의 고집을 유도하시는 것 같은가 하는 점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400년만에 조상의 신이 자신들을 광야로 부른다고 한다. 

그 신이 조상들과 약속한 것은 알고 있다. 

그 신이 요셉을 통해 자신들을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도운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그 인식자체는 흐릿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신이 정말 얼마나 대단한 신이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신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현실이 너무 고될 뿐이다. 

잘 모르는 신의 소명을 받아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제안하는데, 그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단번에 허락을 받아, 광야로 이동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인식은 어떠했을까? 과연 우주를 창조하신 신, 우주 만물을 유지하시는 신, 역사의 주관자라는 인식이 그들 가운데 생겼을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에게 제대로 작동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합의에 의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아님, 모세와 아론의 설득력을 높이 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칫 그들 사이에서도 지파별로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광야로 가면 그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다 등의 의견이 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의 구심점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거란 말이다. 

몇십만명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모세와 아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그럼 방법은 하나!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셔야 한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누구도 이집트의 다른 신들과 비교할 수 없도록,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탈출과 독립이 마치 자신들의 힘이나, 인간적인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님을 확신하도록,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자리를 대체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보여주셔야 한다. 

그것이 10가지 재앙이다.

모두가 그 재앙을 경험하거나 보게 된다. 

열외가 없다. 

그러려면, 바로가 9번이나 모세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집요하신 하나님! 

 

예수님도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누차 드러내셨다.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만큼 강력한 이적들을 행하셨다. 

물 위를 걷거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넘게 먹이거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그래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만천하에 알리셨다. 

온 우주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변형되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성전의 회막은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다. 

우주의 영적 현실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자기 구원이 자기에서 이뤄지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직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그래야 겸손해진다. 그래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 

여전히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말이다. 슬프게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신다. 

가서 전하라는 명령에 추가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미래 계획을 듣는다.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 낼 때, 당시 패권 왕국 이집트,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파라오가 알게 될 것이다. 

오직 참된 신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을 인식한 이집트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광야로 나올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했기에 모세는 용기를 내본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다. 

 

분명히 하나의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 자리라고 느껴지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산을 넘어 저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고 싶은데, 

산을 넘어 저 푸른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데,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해진다.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나를 뛰어 넘는다. 

그분을 신뢰함으로 오늘을 다시 시작한다. 

그분의 계획을 조금은 더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주님의 계획은 저의 생각을 뛰어 넘으십니다. 

지금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실망은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의 일부일 거라 믿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하나님,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 

저에게 당신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세요. 

제 욕심이라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혹여 당신의 계획을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주세요. 

 

난방비가 너무 올랐습니다. 

급작스런 난방비 폭등에, 역대급 추위에, 혹여 보일러를 틀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걱정입니다. 

보호해주세요. 생명을 지켜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4 모세와 아론의 조상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인데, 이들이 르우벤 가문이다.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자가 낳은 아들 사울인데, 이들이 시므온 가문이다.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태어난 순서대로,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인데, 레위는 백삼십칠 년을 살았다.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가문별로는 립니와 시므이이다.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인데, 고핫은 백삼십삼 년을 살았다.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이다.

이들이 세대별로 본 레위 가문이다.

20 아므람은 자기의 고모 요게벳을 아내로 맞아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 아므람은 백삼십칠 년을 살았다.

21 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이다.

22 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이다.

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이요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와 결혼하여,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다.

24 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인데, 이들은 고라 가문이다.

25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한 딸과 결혼하여, 비느하스를 낳았다. 이들이 다 가문별로 본 레위 일가의 조상이다.

26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이들 아론과 모세이고,

27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도, 바로 이들 모세와 아론이다.

 

모세와 아론의 족보는 아버지 아므람에서 그 위로 고핫, 레위, 이스라엘에 이릅니다(14-20절). 창세기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라는 것을 강조합니다(26절).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갈등이 고조되는 흐름에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끼어듭니다. 이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이 잠시 중단됩니다. 갈등을 겪거나 사람들로부터 지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멈추어서, 내가 누구인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묵상]

최근에 족보를 찾아본 적이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족보에 아직 내 이름이 제대로 등재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아버지께서 이미 올렸다고 하셨지만, 아주 오래전 종이로 족보를 정리하던 때의 일이다. 

누락되었는지, 아님 돈을 주고 인터넷에 등록해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이름이 내가 알고 있었던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과거 구한말, 족보를 사고 파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집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왠지 정확한 뿌리를 알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누구로부터 왔는가? 내 조상들은 어떤 분들이었나? 

 

모세와 파라오의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여러모로 실망스런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이 상황에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꺼내든다. 

뜬금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먼저, 모세와 아론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이다. 

흔들릴 만도 하다. 동족에게 의심받고 미움받고 있다. 

파라오는 꿈쩍도 안한다. 

모세입장에서 자신이 왜 80년만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올만하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데,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정체성 자체가 이스라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레위-고핫-아므람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있는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집안 사람이 아니다. 

분명한 계통이 있고, 혈통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민족을 위해 섬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둘째, 모세와 아론의 부르심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본문을 통해 창세기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부르심을 여러 번 강조한다.

특히 26-27절이 그렇다. 

 

26 이스라엘 자손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은 이들이, 바로 이들 아론과 모세이고,
27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도, 바로 이들 모세와 아론이다.

 

주님의 분부를 받는 이들, 파라오에게 대담하게도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 이들,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 역할을 맡기신 사람, 소명을 준 사람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다. 

이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 

여타의 다른 사람들의 공로로 대체할 수 없다. 

자신들의 쿠데타 시도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언론 플레이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왕궁에 있는 몇몇 유력한 히브리 정치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구출의 최고의 기여자는 하나님이요, 그 다음이 모세다. 

그러니 역사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아주 분명하게 적시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인류 구원도 그렇지 않던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셋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군대 형태의 체계를 세워서 광야로 나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부대별로 질서있게 광야로 나오기를 기대하셨다. 

효율적인 부대 편성은 지파별로, 가문별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쨌든 지파별 가문별 정리가 필요했다. 

족보 정리가 등장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족보 정리가 자칫 파라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안그래도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가져다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파급력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파라오는 이런 족보 정리로 인해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아 이들이 결국 군대를 편성하려고 하는구나.’

‘안그래도 자손들이 번성하던데, 이들을 방치하면 큰 골칫거리가 되겠구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뜬금없어 보이는 족보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봤다. 

뜬금없어 보이는 이야기에도 의미가 있다. 

뜬금없어 보이는 사건에도 의미가 있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 보는 것도 신앙 생활의 재미다. 

하나님은 종종 뜬금 없이 행동하신다. 

그건 나의 생각의 프레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넓은 시야를 가지신 분의 행동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템포 쉬었다 가라고 하시기도 하신다. 

멈춰두었던 계획을 새로이 펼치라고 하신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으로 길을 여신다. 

 

오늘도 뜬금없는 분을 기대한다. 

어떤 만남, 어떤 사건, 어떤 이야기들이 오늘 하루에 숨어져 있을까? 

혹시 내 족보 실종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려나? 

 

 

[오늘의 기도]

참 뜬금없으신 주님, 

주님의 계획을 잘 알지 못하기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뜬금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뜬금없으심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아직도 이 부르심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또한 재밌습니다. 

주님을 따를 삶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작은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시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주께서 숨겨 놓으신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의미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큰 계획의 모자이크 한 조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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