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주석

젖과 꿀이 흐르는 땅(8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그 땅이 풍성한 목가적 생활 방식을 누렸음을 말하지만, 반드시 농업적인 면에서만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젖은 가축의 산물인 반면, 꿀은 자연 자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마도 꿀벌의 꿀보다는 대추야자 당밀을 의미할 것이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7-9절). 그리고 이를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모세는 자격 미달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보내십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헌신할 영역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셨다. 

그들의 부를짖는 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잘 알고 계신다. 

오랫동안 진행된 가중된 고통, 그 한계를 넘어섰다. 

400년 중에 지난 100년이 가장 힘겨웠을 것이다. 

모세의 탄생 시점에 바로가 선보인 정책은 그야말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정책이 입안된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노예가 많이 태어나면, 그것도 남자가 많이 태어나면 노동력이 증가하고 군사력이 강화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정책을 편 것이 아니다. 

강대해진 번성한 히브리 종족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리더로 왕궁에 있는 모세를 은근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히브리 세력은 이집트 왕궁에서 축출되었다. 

 

탄압 정책은 더욱 거세어 졌다.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을 것이다. 

남자 아기들이 죽는 것도 그렇지만, 노동자들도 쉬지 않는 노동에 지쳐 금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밤마다 죽어나가는 마을 사람들, 친척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르짖음의 소리가 매일 울려퍼진다. 

히브리 민족의 한계가 온 것이다. 

더이상 이집트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전에는 이집트에서 번성하면서 나름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란 꿈이 있었다. 

당당하게 이집트 왕국의 한 민족으로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란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씨가 마를 지경이다. 

몇 십년만 더 지나면 히브리 민족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내려가서”(8절)이다. 

그분이 내려오신단다. 그분이 직접 이집트 땅으로 오셔서 히브리 백성에게 다가오신단다. 

또한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12절)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음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오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신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실패한 일을 모세에게 다시 시키신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 내려가셔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신다. 

당신이 직접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결국 자신의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시고, 그를 통해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사도들을 보내셨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셨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구조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이들을 구출하시러 하나님은 사람을 혹은 사람들을 보내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다. 

신비로운 상상 속 세계가 아니다. 황홀경의 세계가 아니다.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에 뿌리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요 그들을 위한 구출 역사다. 

 

어제 오늘 두 분의 장례식에 문상다녀왔다. 

82세, 84세. 

죽음을 맞으신 분들 앞에서 나오는 대화들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픈 사람들, 암과 섬망과 침해 증세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받는 사람들 옆을 지키고 돌보느라 또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인류를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인간사에 내려 오셨다. 

죽음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악과 죄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분이 오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러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 모세는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또한 누군가를 부르신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하라고 부르신다. 

그 누군가가 나라면…

 

[오늘의 기도]

주님,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며칠 사이에 많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사단의 세력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기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좀더 적극적으로 돕게 해주세요. 

주님의 구출작전에 참여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2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6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주석

불꽃, 신을 벗음(2, 5절)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출애굽 이야기 도처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불과 연기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하나님의 위엄 있는 본성 때문에, 신중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했다. 모세는 자기 신발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했다(IVP 성경주석).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나타납니다(1-2절). 신비한 현상에 주목한 모세는 떨기에 가까이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모세는 두려움 가운데 응답합니다(4-6절). 

 

하나님은 평소에 익숙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떨기에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2, 4절). 수많은 정보와 자극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떨기나무의 불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집트에서 40년, 미디안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이렇게 모세의 인생이 구분된다. 

40년간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치는 목자로 살아간다. 

야곱도 장인의 집에서 오랫동안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다. 

자기 본향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착하는 곳은 처가다. 

40년간 그는 이집트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다. 

성실한 목자로 살아간다. 

민족의 고통을 대변하는 대변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족에 대한 불의한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투사의 삶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양을 치며, 가족을 돌보며, 일상을 별 탈 없이 살아간다. 

 

지극히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항상 보오던 떨기 나무가 이상하다. 

불길이 올라 황급히 양떼를 불로부터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똑같은 양상으로 불이 머물러 있었다. 

번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색깔도 이상했다. 뭔가 특별한 빛이 흘러나왔다.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세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두 번 부르셨다. 

모세는 어떤 신이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기이한 이적을 행하시는 신이라면 일단 대답을 해야 했다. 

이어서 음성이 들린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네 신을 벗어라”

평소에 다니던 길이다. 평소에 보았던 땅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땅이 거룩한 곳이라 하시니, 놀라웠다. 

새롭게 발견한 땅이 아니었다. 평소에 못보던 깊숙한 동굴도 아니고, 산속 깊은 곳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처럼 양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에 왔을 뿐이다. 

지난 40년간 들락거리던 장소다. 

갑자기 거룩한 곳이 되었다면, 그것은 지금 그 곳에 신적 현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된다. 

 

지금 말씀을 읽고 성경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 그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 안만 거룩한 곳이 아니다. 

어떤 요일, 어떤 장소도 그분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모세에게 다가온 분은 히브리 민족의 신이었다. 

이집트에서도 많은 신을 보고 알았다. 

미디안의 제사장이 섬기는 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의 신은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신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었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들과 함께 했던 신,

그분들에게 약속을 주셨던 신, 

그래서 한 때는 그 신의 약속을 믿고 동족들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만들었던 신, 

그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가끔씩 그 신이 어디에 계시는지, 도대체 왜 히브리 민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지 궁금했었던 모세에게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타지 않는 불로 나타나신 것이다. 

 

몸이 굳는다. 입술이 떨린다. 소름이 돋는다. 그토록 마음 속에서 찾았던 그 신이 눈 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모세는 얼굴을 가린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두려웠다. 

혹시나 죽을까 두려웠다. 

너무 가까이 온 것이 무서웠다. 

존재가 흔들린다. 그간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신은 실재했던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나 동화가 아니었다. 실제였다. 

구전되어오던 민족의 역사는 진실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라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고? 교회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까마득히 아련히 잊고 지내던 일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이 풀어진다. 

의문을 품고 묻어두었던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분의 임재와 존재에 대한 확신은 그동안의 삶의 경험과 기억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삶이 해석된다.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니 모든 일상의 자리, 예배의 자리, 묵상의 자리, 기도의 자리가 다 소중하다. 

언제든 그분이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 그것을 좀더 자주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죽음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 

그제 DMC 지하철 역에서 숨이 멎은 분을 보았다. 

심폐소생술이 먹히지 않았다. 

축 늘어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지하철에서 숨을 거둔 듯 보였다. 

구급요원들이 와서 응급 조치를 취했고,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다음 열차를 타느라 다시 사셨는지, 아님 운명하셨는지 알 길은 없다.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말이다. 

10. 29 참사가 떠오른다. 

세월호가 떠오른다. 

죽음은 항상 내 옆에 있다. 

 

허망한 죽음, 사단에게 예속된 죽음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오셨다. 

모세에게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오늘도 주님의 개입하심을 꿈꾼다. 

 

 

 

[오늘의 기도]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제가 드렸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IVF 간사로서,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헌신했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약속해 주세요. 

제 삶을 가장 아름답고 선하게 이끄실 것을 저에게 약속해주세요. 

그리고 그 약속을 끝까지 기억해주세요. 

저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일상에 침투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삶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던져주세요. 

언제 당신께서 침투하시고 개입하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기 원합니다. 

감각을 깨워주세요. 

다시 와이파이를 연결하게 하소서. 

주님께 연결되는 순간 순간이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23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25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주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24절) 이 언약의 심장부에는 족장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참고. 창17:8; 26:3; 28:13; 48:4). 아브라함은 훨씬 더 구체적인 약속을 받았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IVP 성경주석).

 

세월이 흘러 이집트 왕은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강제노역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을 견디지 못해,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23절).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고통의 상황을 들으시고, 보시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24-25절). 

 

‘들으시고’, ‘보시고’, ‘생각하셨다’라는 표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24-25절). 이스라엘 자손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현재 고뇌의 탄식과 슬픔에 찬 한숨이 있습니까? 나의 소리를 들으시고 돌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월은 흐른다. 고통의 시간도 즐거움의 시간도 흐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가고 또 태어난다. 

그 오랜 세월 히브리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었다. 

쉬는 날도 없이 매일 매일 고된 노동에 병들어갔다. 

탄식의 소리를 깊어갔고, 고통의 절규는 하늘에 이른다. 

오랫동안 아파하고 소리쳤는데, 이제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생각하신다.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말의 표시다. 

사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들의 탄식을 듣고 계셨다.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있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손님으로 살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그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변호하자면, 아마도 하나님은 고통이 가중되는 순간 순간 히브리 백성들을 살피시고 인도하셨을 것이다. 참고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셨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십브라와 브아 같은 조산사에게 주셨던 지혜 같은 것 말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히브리 민족을 돌보셨다. 그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이제 히브리 민족의 고통도 한계에 이르렀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때도 찼다. 

하나님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 약속 지키시기 위해 그들의 음성에 반응하신다. 

그 전에도 반응하셨겠지만, 지금 이 때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신다. 

 

탄식과 부르짖음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패다. 

탄식과 부르짖음 조차 없이 현실의 극심한 고통을 이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건강하게 그 시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부르짖어야 한다. 

 

교회는 부르짖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자신들의 고난과 고통을 주님께 아뢰고 그 고통 속에서 건져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다. 

부르짖을 수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짖음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숨과 부르짖음은 다르다. 부르짖음은 대상이 있다. 소리를 발해 그분의 구원과 구출을 요청한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는 부르짖음 도구다.

말문이 막히고 기도문이 막히면 부르짖는 것조차 힘들다.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부끄러워말자. 

그분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오늘 다시 그분께 부르짖는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늘의 기도]

주님, 말문을 열어 주소서. 

주님, 우리의 고통을 주님께 풀어내게 하소서. 

주님, 우리를 살려주소서. 

주님,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어려움, 전쟁에 대한 공포, 왕따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살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0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5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22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주석

여목자(16-19절) 보통 여자들은 가족 가운데 아들이 없을 때만 목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받는 불이익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목자들이 그들을 쫓은 데서 살펴볼 수 있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15절).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줍니다(16-17절). 그 딸들은 우물에 먼저 왔음에도 힘이 센 다른 목자들에 의해 그 기회를 매번 빼앗겼습니다(17-18절). 모세는 그 딸들을 도운 것으로 인해 환대와 정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이후 모세는 그곳에 정착하여 아내와 자녀도 얻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나그네’ 신세입니다(20-22절).

 

모세는 이집트에서처럼 여전히 연약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가, 이번에는 누군가를 돕다가 낯선 땅에서 살길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늘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섬기는 삶을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우물가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물은 생명이며, 번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이 물가로 모이지만, 시내가 없는 곳에는 땅을 깊이 파서 물을 긷는 우물이 최선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을 파는 일에 진심이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도움심을 구했다.

우물이 없이 정착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우물가는 외로움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제 시간에 물을 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마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들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매번 남자 목자들의 힘에 밀려 맨 마지막에 물을 길을 수 밖에 없었다. 

일곱명의 딸들이 함께 대동했지만, 남자 목자들의 힘과 억셈을 이길 수 없었던 듯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도전하던 여인들이었다. 

먼저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미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모세가 돕는다. 

모세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가 이집트 고위층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몸이 건장했기 때문에, 지략을 잘 썼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남자 목자들이 양보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딸들도 용감했고, 모세도 용감했다. 

딸들의 용감함이 모세의 용기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도울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생존과 번영의 길에는 항상 사건, 사고, 스토리가 넘쳐난다. 

물길이 있는 곳, 원유가 터져 나오는 곳, 돈과 금이 몰리고 풀리는 곳, 사람들이 몰리는 곳… 

너도 나도 생존과 번영을 위해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힘있는 사람들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힘없는 사람들, 약자에겐 모세나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 

자의든 타의든 항상 뒤로 밀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모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난 지레 포기하는 스타일이다. 

우물가의 여인이 내 성정과 닮았다. 

싸우고 싶지 않아한다. 그저 ‘내가 손해보면 그만일 것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물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 

오늘돋 주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더 현명하고 재빠르고 탁월하고 싶은 마음, 그래야 우물을 지킬 수 있고, 우물에서 가장 빠르게 물을 길을 수 있고, 빨리 밥먹고 더욱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 마음… 

이 마음을 내려농고 그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항상 1등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데까지만 달려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풍성함으로 이끄소서. 

 

많은 회의와 미팅이 오늘도 저를 기다립니다. 

부담스럽지만, 하나 하나 잘 감당하게 하소서. 

주께서 지혜의 우물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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