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4월 22일 목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3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14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15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

16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17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땅에 속한 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차이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는 사람은 온유함으로 선을 행합니다(13절). 반면 땅에 속한 지혜를 가진 자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 다투기를 잘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14-16절).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진 자들은 깨끗한 마음을 갖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친절을 베풀며, 자비롭고, 선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17-18).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열심인지 공동체의 평화를 만드는데 열심인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나는 어떤 열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

강림지혜

 

1. 야고보의 환생 

야고보서를 묵상하다가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어떤 생각과 말들을 했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마도 상당히 강한 어조의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말은 온유하되 글은 상당히 비판적으로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는 말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고 있다. 

혀가 제어되지 않고 말로 실수를 연발하는 경우에 그 심리를 잘 들여다 보면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공동체를 진정으로 위한다기 보다 자신의 유익과 영달을 위해, 남과 비교해서 승리하기 위해, 남이 잘되고 남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질투가 생겼다. 

결국 이런 시기심과 경쟁심은 당연히 자신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차별의 언어가 생각과 몸에 베인다. 

자기도 모르게 분열적 정서가 흐른다. 자신의 성공과 성취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고, 방해가 되는 사람이 생긴다.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겐 선대하고 방해가 되는 사람에겐 박대한다. 

그러니 차별이 일어난다. 말에도 그런 차별의 흔적이 있다.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지금 시대의 시기와 경쟁에 대해 한탄하는 글과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 보다 경쟁을 유발시키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 

존버가 결국 승리한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시기심과 경쟁심은 그 자체로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다.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지혜는 나름 상당히 합리적이고 막강하다.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지혜들이 쏟아진다. 

승리를 위한 지혜다. 이기기 위한 지혜다. 남 보다 더 잘 나가기 위한 지혜요, 생존을 위한 지혜다. 

마치 분노에 의해 생각과 말이 빨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경쟁심에서 나오는 지혜가 세상에 널렸다. 

책으로 나온다. 경영서적이라는 타이틀, 자기 계발이라는 타이틀로 존재한다. 

그만큰 경쟁은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과 순발력이 출현하는 것처럼, 경쟁을 극으로 몰고가면 자신도 모르는 지혜와 행동이 등장한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다. 일종의 마약 중독과 같다. 

마라톤의 러닝하이가 있다. 

 

30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를러너스 하이’(runners high) 혹은러닝 하이’(running high)라고 한다. 이때에는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을 같고,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짧게는 4, 길면 30 이상 지속되기도 한다. 이때의 의식 상태는 헤로인이나 모르핀 혹은 마리화나를 투약했을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고, 때로 오르가즘에 비교된다. 주로 달리기를 예로 들지만 수영, 사이클, 야구, 럭비, 축구, 스키 장시간 지속되는 운동이라면 어떤 운동에서든 러너스 하이를 느낄 있다_[네이버 지식백과러너스 하이 (KISTI 과학향기 칼럼)

 

경쟁에도 하이가 있다. 경쟁에서 이길 때의 짜릿함이 있다. 경쟁심이 촉발시킨 정신의 고도의 집중현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종의 중독이다. 

 

2. 위에서 오는 지혜 

17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 없습니다.

 

경쟁심과 시기심에서 오는 지혜가 있는 반면, 위에서 오는 지혜가 있다. 

경쟁심, 승부욕, 남을 이기려는 마음, 남이 잘 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듣이지 못하는 마음,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가 있다. 

이것은 일단 순결하다. 맞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경쟁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원한 지혜는 순결하다. 이기적인 동기나 남을 이기려는 충동이 아니다. 나와 남을 살리는 순결한 동기가 작동한다. 

그러니 평화를 만들 수 밖에… 

순결에서 나오는 지혜는 평화를 만들어 낸다. 

태도는 친절하고 온순하다. 

행동은 자비롭고 선한 열매가 맺힌다. 

이러니 편견, 위선도 없다. 

이런 지혜가 참된 지혜다. 

 

중독을 끊는 것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경쟁심과 시기심에서 나오는 지혜에 중독된 사람들을 구출하려면, 위에서 내려온 밧줄이 필요하다.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경쟁심에서 나오는 지혜를 압도해야 한다. 

그렇게 압도하도록 때로는 세상의 외부 자극을 최소화하고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내 존재를 압도할 때까지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 

 

순결, 평화, 친절, 온순… 

이 시대는 이런 가치가 허공에 떠있는 에드벌룬 같지만, 실제 삶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국민 10 6 만성적 울분상태…"원인 1 부패한 정치"

https://www.news1.kr/articles/?4282743

 

만성적 울분 상태…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정서다. 

세상이 조장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가지고 누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그도 말과 글은 이렇게 썼겠지만 뾰족한 수를 찾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위를 바라보자.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구하자. 

그렇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를 갈망하자. 

우리 속에 쌓인 울분과 경쟁심을 내려놓자. 

위를 바라보자. 

 

 

——

순결하신 주님, 

온 인류를 위한 주님의 마음에는 경쟁심과 시기심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 순수함이 순간순간 제 마음에 내려오게 해 주세요. 

오늘 하루, 시간을 내어 위를 바라보게 해 주세요. 

위에서 내려오는 순결한 지혜를 추구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그 지혜로 살아가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1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우리는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몸을 다스릴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말을 부리려면,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의 몸을 끌고 다닙니다.

4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5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숲을 태웁니다.

6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지체이지만,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7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사람이 길들이고 있으며 길들여 놓았습니다.

8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있습니다.

9우리는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11샘이 구멍에서 물과 물을 있겠습니까?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샘은 물을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른 책임과 심판이 따르기 때문에, 많이 선생 되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1-2). 야고보는 또한 말하는 혀가 비록 작아 보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이 있음을 3가지 (말을 길들이기 위해 물리는 제갈, 배의 방향을 정하는 , 산도 불태우는 불씨) 들어 설명합니다(3-6).

 

야고보는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이 길들일 있지만,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 혀라고 말합니다(7-8). 사람들은 한입으로 축복과 저주를 내뱉고, 하나님을 찬양하던 입으로 원망을 쏟아놓기도 합니다(9-10). 요즘 나는 어떤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언어의 나무에 좋은 열매들이 맺혀지길 소망하며 말에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시다.

 

——

오늘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정치에 사용되는 말은 누군가에겐 생명줄이고 누군가에겐 살생부다. 

언론도 주로 말을 통해 영향을 발휘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결국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말이 지옥을 만든다. 말이 생사람을 걸어다니는 시체로 만든다. 

말의 폭력이 사람을 시름시름 앓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야고보가 공동체적 실천 중에 말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래서 적절하다. 

 

그렇긴 한데,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갑자기 든다.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란다. 

작은 불이 숲을 태우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듯이, 혀가 그렇단다. 

야고보는 쉽게 마무리할 생각이 없다. 

물고늘어진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느낌이다. 

얼핏보면 깊은 상처를 입은 같다. 

말로 인한 내상. 

공동체적 고통. 

말이 가져다온 차별과 공동체적 분열. 

 

야고보가 혀를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았음도 있다. 

혀로 찬양을 한다. 혀로 말씀을 전한다. 혀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들의 혀가 자신과 이웃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음도 깨달았다. 

 

야고보를 비롯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사도들, 성경교사들, 순회 설교자들

이들은 무엇이든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던 그들 입에서 때로 차별의 언어가 튀어나온다. 

빈자를 홀대하고 부자를 선대하는 말을 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보기에는 지극히 위선적이다. 

과거에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예수님이 대노하셨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야고보는 가르치는 이들이 그들의 혀로 짓는 죄를 보았다. 

그것을 이상 참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고 무거운 단어들로 질책한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의 딜레마를 안고 살고 있는 사람은 사실 다름 아닌 야고보였다. 

그도 그렇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오늘 본문은 자전적이며, 자기반성적이다. 

야고보 자신과 주변 사람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가르치려고 하면서 혀를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심판을 받게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자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는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배웠고, 믿었고, 심지어 가르치고 있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가? 상을 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가르침과 , 말과 삶이 일치되지 않을 ,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의심의 골짜기로 몰아 넣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엄격하게 심판을 받게 것이다. 심판이란, 혹독하고 엄격한 잣대의 심판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사람의 혀에서 차별의 언어가 튀어 나오면 안된다. 형제 자매를 실족케 하는 일이다. 그러니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말을 돌아봐야 한다. 

아마 야고보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결국 깨달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혀가 화근이다. 

놈의 말이 공동체를 아프게 한다. 

조심하고 조심해야 일이다. 

 

그러나 사역자는 말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말과 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영향을 준다. 

제자를 키운다. 말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어렵다. 

자신이 가르친 말과 실제 삶과 일치되거나, 달라졌다면 일일이 알려야 한다. 

모종의 자발적 공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계속 점검한다. 자신의 말과 행동과 가르침이 일관성이 있는지 살핀다. 

 

야고보가 환생하여 다시 지금 땅에서 살아간다면, 분명 같은 사역자들에게 호되게 경고했으리라. 

실천 보다 말이 앞서며, 보다 혀가 앞선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조심에 힘썼다. 

말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어떻게 것인지 보다 차리리 줄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순히 말을 안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되, 차별의 언어, 남과 나를 죽이는 말을 자제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혀를 통제하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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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셨던 주님, 

당신의 언어로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언어, 

공동체를 세우는 언어, 

나와 남을 회복시키는 언어... 

이런 언어들이 더 많아지도록 성령님께 제 혀를 내어 맡깁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0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믿음에 기반을 행함으로 입증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헬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하신 말씀( 15:6) 온전히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하나님의 친구라고 부르심으로 그가 의로운 자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21-24).

 

라합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행함을 통해 의로운 자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25).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분리할 없듯, 진실한 믿음은 행함과 분리할 없습니다(26).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동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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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심

요사이 쓰는 중에 “~ 진심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행동이나 말에 진지함과 깊은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일치에 진심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실천이 뒤따른다. 몸이 움직인다. 근육이 사용된다. 무브가 일어난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엄밀히 말해 율법과 상관이 없다. 

야고보가 율법에 국한된 실천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있다. 

라합의 경우도 그렇다. 정탐꾼들을 접대하는 것이 율법과 관련이 있다고 하기엔 조금 멀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믿음과 율법이라는 대치국면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하게되는 몸의 실천이다. 

사랑의 실천이요, 차별이 없는 공동체 운영이요, 가난한 사람들은 천대하지 않는 태도다. 

 

이신칭의, 이신칭의 하는데, 물론 야고보 시대에 이신칭의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하지는 않았겠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말은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들어가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발휘하던 바울의 강론을 고려할 광범위하게 적용되던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이기도 , 이신칭의를 야고보는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고 싶어했다. 

간략한 말은 오해를 낳는다. 

압축적인 말이 진리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다양한 해석은 결국 개개인의 상황에 적용될 , 지극히 주관적으로 흐르게 된다. 

시대의 흐름에 해석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이신칭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믿음의 고백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믿음의 고백만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신앙의 여정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야고보는 오해를 바꾸고 싶어했다. 왜곡된 해석/적용을 원래대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아니겠나!

 

야고보의 진심이 느껴진다. 

구약의 인물 , 유대인을 대표하는 아브라함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라합을 예로 든다.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구성이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믿음에 따르는 실천이 필수적이다. 

따로 떼어내려고 하지 마라. 

둘은 원래 하나다. 

의로움은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실천에 있다. 

고백에 따르는 실천이 결여되면 고백은 거짓이 된다. 

거짓은 다시 죄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다. 

거짓은 아비, 사탄에게도 접근하는 다리가 된다. 

그러니 진실한 고백, 실천과 함께 하는 고백으로 다가가야 한다. 

 

야고보의 말이 그래서 더욱 닿는다. 

그는 진심이다.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만 놓고 보면 처절하다. 

실천이 없는 고백, 행함이 없는 믿음을 철석같이 따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의 진심, 그의 처절한 항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니까요

 

——

주님, 

야고보를 통해 처절함을 느끼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 고백에 걸맞는 행함, 실천이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기 몸을 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주세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17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하고 믿음에 따른 행함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묻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주변 이웃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 자체도 가짜일 있습니다(14-17). 믿음은 삶을 통해 나타나며 증명됩니다(18). 진정한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행함과 분리될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에 변화들을 만들어냅니다(19-20). 믿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생의 어려움들이 찾아올 그것을 풀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은 삶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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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도다

 

1. 어리석은 사람

 

20,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구절은 어디서 많이 같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훈계하면서 했던 말과 유사하다( 3:1).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진리 위에 율법의 행위(절기법, 정결법_특히 할례)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렇게 혼합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하고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없는 사람은 그의 믿음도 의심스럽다고 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데에 있다.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규정에서 다루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의롭게 되는 것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 온당한가? 

당연히 아니다. 이건 의에 이르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믿음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존재적이다. 따라서 지식, 동의에 머물지 않고 의지, 의욕, 실행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여 따라가는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믿음은 신뢰라고 하는 거다.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였다. 

공동체의 상황에 가장 예민한 사람이었다. 

세계 공동체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자/빈자의 대립이 생겼나? 그건 빈자의 죽음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부자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통 유대인들의 배신자 프레임도, 로마/헬라인들의 일신교 프레임도 공동체 내의 빈자/부자 프레임보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빈자/부자 프레임이 작동해서 공동체가 분열되면, 그건 하나님 나라의 내적 원리 자체에 공격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렇게 흘러가게 없었다. 

 

2. 행함 없는 믿음

 

점점 야고보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2장에 접어드니, 야고보와 당시 교회에 닥친 시련과 시험은 외부에 있는 것보다 내부에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방치를 넘어 차별을 한다( 2:1). 그것도 믿음의 이름으로 말이다. 

만약 이것이 심화된다면,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에 예수의 정신이 남아 있다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다. 

그분에게 구원받았냐라고 물어 있다면, 그분은 어이가 없어 하겠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우리의 언어로 대답할 수도 있다. 

그래요, 당신의 말대로, 나는 구원받았어요 

그렇다. 그분은 구원의 중심이기에 이미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확실히 말할 있다. 그분은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어린이와 여인들을 공정하게 대하셨고, 부자/빈자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주셨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건 믿음이 아니다. 그건 믿는 하는 지적 속임수다. 합리화, 정당화, 논리 함정이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고 말하는 세계 교회 지도자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걸 갈라디아서의 바울과 대척점에 일이 아니다. 

바울이 믿음에 따르는 행동과 실천을 무시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게으름의 소치다. 

모든 편지에 들어 있는 바울의 권면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를 포괄한다. 

야고보가 십자가와 믿음의 신학적인 측면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개인/공동체 윤리를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해서, 그를 바울과 대척점에 두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교회 지도자가 것은 철저한 회심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들을 섬기기로 했기 때문이리라. 야고보가 당시 유대교와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수는 없다. 

예수, 바울, 야고보는 근본적인 신학적 일치가 있었다. 그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율법의 일부가 폐기된 것은 맞지만, 율법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야고보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체가 좋다. 

예수님 이야기, 제자들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가 묵상과 상상에 도움이 된다. 

서신서의 권면과 설득은 상황보다 논리 전개가 중심이다 보니, 상상보다는 사고의 정밀함과 확장이 본문 묵상에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말이 길어진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칫 팍팍해진다. 

건조하다고 멈출 수는 없다. 

건조함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논리의 건조함을 넘어서서 야고보가 처한 상황에 좀더 집중해서 상상력이 첨가될 있다면 묵상이 풍성해 있을 같다. 

 

——

 

몸소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신 예수님, 

당신의 실천을 배우고 싶습니다. 

믿음은 머리의 작용이 아니라 전존재의 작용입니다. 

주님을 따라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인도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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