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6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사람을 대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은, 사람을 차별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2-4).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십니다(5-7).


율법은 우리에게이웃 사랑 가르치며, 일부를 어긴다 해도 율법을 범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합니다(8-11).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랑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따릅니다(12-13). 요즘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외모나 경제적 형편, 정치적 성향 등으로 차별하거나 판단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

차별 금지

 

1. 난해함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하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 

 

2. 차별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온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번째 이유도 적고 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빈자를 택해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한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수호에 적극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이다. 

어쩔 없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된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번째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치밀하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한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한다.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는다. 

그러니 율법은 포괄적(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가? 율법도 그렇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다. 

 

 

3. 의미심장한 13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사실 13절의 의미는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율법의 종속 개념엔 심판이 있다. 율법이 있다면 심판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도 심판이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도 율법이니 심판이 규정되어 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르는 자유하게 하는 심판은 혹시자비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3절이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야고보가 13절을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까? 

뭔가 깊은 의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오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조금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다. 

 

 

——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치료하셨던 예수님, 

당신을 닮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4.16 이상하게 슬픕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확한 사고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의문이 많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신원, 원한을 풀어주세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의 율법이 곳곳에 적용되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15 목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먼저 듣고, 말하는 것에 신중하며, 감정을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분노에 휩싸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19-20). 그리고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기울이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21-22).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자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23-25).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주변의 이웃들을 돌보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26-27). 이처럼 듣는다는 것은 삶이 동반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울여 들음으로 우리 삶에 나타나야할 모습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

시험을 견뎌내는 참된 경건

 

1. 분노

말씀을 읽을 항상 생각해야 것은 전체의 흐름이다. 

야고보는 편지를 거지 명언집을 것이 아니다. 

맥락과 컨텍스트가 존재한다. 

갑자기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을 같다. 

잠시 전문맥을 살펴보면, 주로 시험에 인내하며 견딜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며, 혹은 자신의 욕심에 끌려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혜를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시험을 묵묵히 인내하고 견뎌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분노에 대한 것이다. 

야고보의 그림은 일단 고난과 핍박으로 고통당하는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며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권면이다. 그림의 완성에 필요한 요소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첫째가 바로 분노 조절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온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분노에 쉽게 휩싸인다.

자신이 얼마나 쉽게 화내고 분노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현대 사회는 말을 빨리하고 말로 상대를 압도하기를 요구한다. 

말을 효과적으로 하여 목표한 바를 이루라고 요청하고 있다. 

말을 빨리하는 방법 중에 유용한 방법은 심장과 혀의 속도를 높이는 것인데, 이는 마음의 급함이 요청된다. 

마음에 급박함이 있어야 말을 빨리 있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분노야말로 심장 박동수를 늘리고 긴장도를 높이고 말을 빨리 있게 만든다. 

그러니 분노하는 사람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 분노가 때로 논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논리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분노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든다. 자신의 화두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분노가 하는 일이다. 

현대인의 기본 정서가 분노라는 말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야고보는 시험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분노하게 되는지 알고 있는 싶다. 

그리고 분노가 아주 자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뜻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수많은 회의와 논의가 진행된다. 현대적 의미의 회의, 논의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나누고 보고받고 대화해 나간다. 

그러다보면 아주 자연스레 분노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분노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받는 부당하고 불의한 핍박에 분노한다. 

함께 사역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러한 분노가 공동체를 위협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런 흐름을 보았던 것이다. 야고보는 지도자였다. 

 

시련과 시험을 이기는 것은 분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2. 말씀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말씀에 집중하기 어렵다.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가지 말씀을 가지고 강론하는 사도들의 말씀 

어떤 것이든 분노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튕겨져 나온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보다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구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 그리고 자료들을 보면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도들의 설교들, 말씀들을 듣는 것이 우선이다. 말을 우선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공동체의 지도자로 교회의 대소사를 처리하다보니,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얼마나 대단하지 그는 알게 되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복음만으로 공동체가 운영되지는 않는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반복음으로 끝나는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 복음으로 시작해서 더복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상수훈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체화시킨 생활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를 알았다. 중심에는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행함의 실천이 있었다. 

 

때로 분노하는 사람들은 실천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빠르며,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생각과 혀의 싱크로율이 상당했다. 

생각하는 모든 내용을 혀로 말하는 것은 때로 공동체를 해한다. 

따라서 분노가 아니라 말씀의 실천이라고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래서 개인윤리로만 아니라, 공동체 운영의 원리로 보는 것이 낫다. 

 

3.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

구절이 항상 눈에 띈다. 율법이 자유를 준다는 개념은 바울 서신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상한 조합으로 비춰진다.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보고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히 율법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와 교인이 당하는 시험을 견디기 위해서는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주는 율법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관점과 자유를 선사한다. 

그렇다고 십계명과 산상수훈이 폐기되는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가운데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개인과 공동체의 윤리적 삶에 자유를 허락한다. 

 

자유는 자기 맘대로, 분노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자유다. 

자유가 있어야 우리는 끝까지 우리가 있다. 

자유가 있어야 나는 끝까지 공동체 안에서의 나를 유지할 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없는 나가 과연 자유하다 있는가!! 그건 근대주의적 파편화된 자아 자유 개념이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그런 파편화된 자유 개념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개인을 짓누르는 사회 공동체가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인권을 짓밟고 개인을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편 역사는 말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따로 떨어질 없음을 말이다. 

공동체가 없는 개인은 결코 자유할 없다. 

특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개인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완전한 율법은 정말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말할 있다. 

 

말씀의 실천, 율법의 실천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공동체에도 개인에게도 자유가 살아난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참된 경건은 율법의 실천이라고 야고보는 봤다. 

분노를 조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에 집중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그것이 나와 공동체를 자유 안에서 살리는 길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이것을 꿈꾼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개인 윤리를 말하듯 보이지만(혀를 제어하고 분노를 억제하라 ) 그것은 사실 공동체의 상생을 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공동체를 유지하기 원하시는 예수님, 

참된 경건으로 나와 공동체를 더욱 자유롭게 살려 주세요. 

분노를 조절하고, 혀를 제어하고, 말씀을 실천할 있는 힘을 공급해 주세요. 

모든 것이 힘으로 없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실천은 인간의 힘으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모든 순간에 성령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듣는 것을 잘하여 경청과 공감, 그리고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에 항상 신경쓰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13 화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 되십시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9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10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야고보 사도는 고난 받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대할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시련 가운데 인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으로 성숙해 가기 때문입니다(1-4). 그리고 어려움을 당할 넉넉한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혜를 구하라고 당부합니다(5-8).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귀한 자들임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부자들에게는 세상의 부유함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알라고 말합니다(9-1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려움에 처하거나 편안하거나,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있길 기도합시다.

 

——

지혜의 본체

 

1. 세계에 흩어져 사는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베드로와 버금가는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교회의 행정가, 회의의 의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그가 그리스도교 초기에 전세계에 살고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망하면서(BC 722) 그리고 바벨론의 의해 남유다가 무너지면서(BC 586), 유대인들은 제국의 포로로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회당을 짓고 성전 중심의 유대교에서 토라 중심의 유대교로 전환했다. 그들이 토라(구약성경)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과 자존심은 한낱(?) 권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은 그렇게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오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다. 

메시야가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영광의 ”( 2:1) 오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세계에 흩어져 살아간다. 

메시야가 오시고,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를 사해주셨고, 사탄을 패퇴시키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가운데로 끌고 들어왔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이 아니라 에베소, 로마, 안디옥에 산다. 

여전히 소수자로 때로는 온갖 모함과 살해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3년의 미국 생활 , 인종차별을 크게 겪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렇다고 아예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IVF 가을 방학 리트릿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오작 호수의 멋진 리조트였다. 어쩌다 보니 혼자 로비에 앉아 있게 되었는데, 술취한 백인이 오더니 뭐라뭐라 말하면서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서 대답해도 계속 물었다. 어느 순간에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에 친구들이 돌아와서 망정이지이방땅에 홀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교포들의 경험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과 불안정함을 알고 있다. 

더욱이 이방 세계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야고보는 이런 세계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것은 단순히 유대인에게 편지는 쓰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 자체도 소수자로서의 서러움을 안고 있는데,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니 

소수 소수다. 

유대인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었다. 

 

 

2. 인내 

그러니 인내가 필요하다. 

참고 견뎌야 한다. 

시험과 시련이 항상 찾아온다. 

자체가 위협적이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체가 고통이다. 

그러니 인내가 필요하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가지로 반응한다. 

참고 인내하는 사람 유형

의심하며 흔들리는 사람 유형 

 

오늘 본문은 가지 유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인내의 사람들이었다. 

오랫동안 토라를 중심으로 약속의 성취를 위해 참고 인내했던 사람들이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고 있다. 

안따깝긴 하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부분적 성취를 완전한 성취로 오해하면 안된다. 

자칫 시한부 종말론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부분적 성취에 감사하고 완전한 성취를 기다려야 한다. 

숙명이다. 

 

3. 마음 

숙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의심하기 시작한다. 메시야가 왔는데, 여전히 그모양이다.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 로마의 황제는 건재하다. 

어쩔 없이 세상에서 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부자들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현재를 풍족하게 즐기고 누리는 삶이다. 

이런 삶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소망하기 보다 현재의 가든 파티, 바베큐, 화려하고 세련된 옷차림에 끌린다. 인지상정이다. 

 

흔들린다. 여러 마음으로 갈라진다. 크게는 마음이지만, 사이에 수많은 마음들이 오고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얇은 가지처럼, 이리저리 쉬지 않고 움직인다. 마음이 그렇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마음이 점점 사그라든다. 

 

인내, 기다림의 삶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신적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를 누리는 삶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돈의 지혜가 필요하다. 

돈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에너지와 지혜를 공급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마어마한 기획과 투자와 추진이 들어간다. 지식과 지혜의 결합이다.

주식을 공부하기 위해 무수한 시간들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의 삶을 통과하여 오랜 소망에 대한 인내와 기다림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히스토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그분과의 동행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니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

 

5_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지혜가 세상에 빛을 발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다. 

놀랍고 엄청난 지혜를 주신 분이, 다른 작은 지혜들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아낌없이 지혜를 나눠주길 원하신다. 꾸중하지 않는다. 면박주지 않는다. 모른다고 피식 웃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지혜의 요체인 예수님을 주신 분이시다. 다른 지혜도 주신다. 허나 예수님과 성령님이라는 지혜만으로도 사실 충분하긴 하다.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지혜를 구하자. 

기도로 지혜를 구하며 현재의 위기를 살아가자. 

발목, 손목이 묶여 있더라도 주님의 지혜로 헤쳐나가자. 

 

——

지혜이신 예수님, 

지혜의 본체이신 당신을 구합니다. 

당신의 지혜로 우리가 당한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견디길 원합니다. 

 

지혜로 이끄시는 성령님, 

지혜를 추구하게 하소서. 

시험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혜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 흩어져 있어도, 주님 안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더욱 깊이 느끼고 경험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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