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19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그러므로, 우리는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2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3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4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장차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고,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내가 참다 못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알아 보려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자가 여러분을 유혹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NASB

and we sent Timothy, our brother and God's fellow worker in the gospel of Christ, to strengthen and encourage you as to your faith(2절),

 

주석

믿음(2, 5절) 이것은 위험에 처한 그들의 삶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핵심 단어다. 이 단어는 종종 ‘믿음’으로 번역되지만, ‘신실함’, 또는 ‘충성심’ 또는 ‘신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에브리원 주석).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여 참을 수 없었습니다(1, 5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냅니다(2-3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4절). 예수님께 충성하는 이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미리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견디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예수님을 따를 때 미리 예상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 그 고난을 회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바울의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준다. 

사탄의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굳건하게 하고 싶었다. 

방법을 찾다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디모데를 통해 성도들을 더욱 굳건히 세우려고 한다.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디모데를 보낸다. 

 

첫째, 믿음을 격려하여 환란 중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고난이 찾아오고, 환란이 찾아오면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과연 내가 제대로된 참 진리를 믿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말에 현혹된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현실적으로도 계속 이 신념을 붙들고 있을지, 버릴지를 결정해야 한다. 

고난은 재정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육체적인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영향을 준다. 

고난이 육체를 힘들게 하면, 그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일상이 망가지고 경제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자연스레 사회 생활도 문제가 생기고, 정서적인 외로움과 우울함에 시달린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또한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안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그분을 끝까지 신뢰하고 따를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바울과 그의 선교단도 유사한 환란을 당해봤기 때문에 더욱 더 잘 격려할 수 있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권면하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과 영향력이 줄어 들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성도들을 세우고 싶었다. 

 

둘째, 유혹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도들을 믿음에서 파산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에덴 동산의 뱀처럼, 솔로몬의 젊은 책사들처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외부적인 환란도 문제지만, 이렇게 내부적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갉아먹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다. 

외부적인 어려움은 때로 내부적인 단결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내부적인 유혹으로 인한 분열은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더 무서운 것이다.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고 그 진리로부터 멀어지지 말 것을 부탁하고 요청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혹하는 자들의 실체를 분명히 밝혀내고, 그 유혹의 실상과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혹의 말은 달콤할 수 있으니, 어디서부터는 사탄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바울이다. 

그러나 지금은 데살로니가에 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디모데를 보낸다. 

 

바울의 사랑이 다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이 장거리 여행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적격자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의 시간을 빼서 위험한 장거리 여행을 부탁해야 한다. 

목표도 만만치 않다.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유혹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디모데가 느꼈을 마음의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안된다.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가 없다. 

정말 신뢰하고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믿음만한 사람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을 찾는 것도, 부탁하는 것도, 계속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바울은 정말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가지의 성찰적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디모데 같은 신실한 동역자를 얻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성도들을(교회와 IVF)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 

하루를 보낸다. 

 

[오늘의 기도]

믿음을 굳건히 하길 원하시는 주님, 

제 주변의 사람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는 일에 저를 사용하소서. 

가족, 교회 성도, 사역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게 하소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주님, 

디모데 같은 주님의 동역자가 더욱 많이 생기길 원합니다.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역자가 더욱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역자가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공동체의 어려움을 조금씩 풀어주시고, 서로 연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주세요. 

한 마음이 되는 것,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 그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는 것, 

이런 일이 우리 공동체를 통해 일어나도록 도와주세요. 

 

오늘 하루도 주께 맡깁니다. 

간사수련회 일정도 주님께 맡깁니다.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7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고자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19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NIV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19절)

 

주석

사탄의 방해(18절) 어쩌면 그곳 시의원들과의 문제 때문에 바울이 되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며 계속 그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사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한 교인들에게 그리움을 전합니다(17-18절). 덧붙여 바울이 고대하는 그날, 주님 앞에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그들임을 고백합니다(19-20절).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없음에도, 바울은 그들을 묵상하며 기쁨을 고백합니다. 믿음을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바울에게 기쁨을 주었고, 내일의 기쁨을 소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미래의 바울에게 영광을 줄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은 내일을 향한 소망과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오늘의 묵상]

1. 방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당연히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자란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리워 진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에서, 그 언어 중 하나가 함께 함이다.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사랑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결국 몸을 움직여 방문하게 하고, 만나게 한다. 

특히나 사랑에 자랑스러움이 붙으면 그 열망은 더욱 커지는 법.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 만남이 가져다 줄 시너지가 기대된다. 

성도들은 더욱 굳음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바울은 더욱 힘을 내서 사역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단은 이런 것이 싫었나 보다. 

사랑의 교제도 싫고, 믿음이 더욱 강화되어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성장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사탄이 방해를 한다. 

방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재정적인 문제일지, 도시 권력자들의 방해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일상적인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탄의 방해라고 부를 만큼의 독특하고 특별한 문제 상황이 발생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에 우연을 가장한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탄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고, 유혹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한다. 

이유도 없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교회를 박해하기도 한다. 

 

2. 여러분이야말로

바울의 기쁨과 감사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유대인의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의 기쁨은 이들로 인해 가득하다. 

도리어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을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현상에 대해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복음은 사람을 바꾼다. 

복음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울과 이방인들과의 사랑을 만든다. 

복음은 인종적 벽을 허문다. 

복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 되도록 이끈다. 

 

복음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함께 꿈꾸고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 많다. 

오늘 그들이 보고 싶다.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무엇보다 학생들의 변화를 위해 기도했던 그들이 보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길… 

 

[오늘의 기도]

성도들을 사랑으로 연결시켜주시는 주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 성향은 혼자있기 좋아하는 내향형이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만남의 기회가 더 많아지도록 인도해주세요. 

 

오랜만에 만난 간사님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일로만 바라보지 않고 기쁨의 관계로 바라보도록 이끄소서. 

전국의 간사님들과 더욱 행복한 시간들로 연결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7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14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똑같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15 유대 사람은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우리를 내쫓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16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NIV

in their effort to keep us from speaking to the Gentiles so that they may be saved. In this way they always heap up their sins to the limit. The wrath of God has come upon them at last(16절).

 

주석

유대 사람(14-15절)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 특정 그룹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로마서 9-11장에 표현된 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응답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다(IVP 성경주석).

 

바울이 고난을 겪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게 되었다고 위로합니다(14절). 또한 그들이 겪은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13절). 한편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5-16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겪은 고난은 유대 교회가 겪었던 고난과 동일했습니다(14절). 바울 역시 이 고난을 경험했고,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 오히려 우리는 고난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고난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어떤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1. 실제 그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자랑스러운 일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울 선교단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풀 때, 그걸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 하며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놀라운 장면이다.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취사선택할 수 있었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 말씀이 권면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이 성도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칭찬은 참으로 소중하다.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자신들이 따르고 섬겼던 신과 그 민족 특유의 문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의 증거들이 바울에게도 전달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하게 된다. 

 

2. 똑같은 고난

성도들 속에서 말씀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견뎌내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듯이, 이방인들도 그들 가운데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듯이, 이방인들도 그들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을 잡아 가두고 협박하고 위협한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잘 인내하고 있다. 

바울이 감사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도 신앙생활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 기술은 고도화되고, 종교인에 대한 오해와 혐오가 커진다.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고, 이단/사이비들이 기름을 붓는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매주 교회당에 모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느낀 교인들이 대다수다. 

유럽 교회들처럼, 한국 교회들도 고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살아남기도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겨우겨우 교회만 나와도 감지덕지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성도, 나와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길 기도한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실제 삶에 적용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나와 우리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한 주, 전국의 캠퍼스 사역자들이 모이는 시간, 

긴장되고, 부담될 수도 있지만, 그들 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능력을 보길 원한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평화를 빌며 사랑을 전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고후 13:11-13_11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12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부분도 귀하다. 

 

살전 1:2-3_2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서로에게 고백되는 순간이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대화를 이어가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격려하는 순간들이 더 늘어나게 하소서.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마음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부담보다 사랑이 이기는 하루, 한 주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6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7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NIV

Instead, we were like young children among you. Just as a nursing mother cares for her children(7절),

 

주석

고난과 모욕(2절) 바울과 그의 동료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기 직전에 빌립보에서 능욕을 당했다. 그들은 공판도 받지 못한 채 공개적으로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았다(행 16:22-23)(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2절).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불순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3-4절). 바울은 사람의 환심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6-9절).

 

바울은 복음을 대하는 정직한 자세와 교인들을 향한 인격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증인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사람의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바울의 자기 고백이 눈에 들어온다. 

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과 진심을 알아 주길 바랬다. 

그것이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사이의 신뢰요 존경이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과 진심을 알 길이 없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음흉할 수도 있고, 간계를 꾸밀 수도 있고, 아예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진심을 자꾸 표현해야 한다. 

거짓으로 속이지 말고,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지 말고,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말해야 한다. 

그게 나와 남을 위하는 길이다. 

옹색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회 생활이라는 것, 소통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영성적으로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영성적으로는 많은 말은 자칫 자신과 남을 속이는 행위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인간의 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미지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침묵기도가 중요한 이유다. 

자기 표현이 자칫 생각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글도 그럴 수 있다. 

싸질러 놓다는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의 본능적 감정과 피상적 생각이 막 던져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 이면의 생각과 본질을 찾으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4절)은 사람이 던지는 말과 글로만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그 마음의 열정과 진심을 보신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람들과 같이 사역을 해야 하는 사역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영성적으로만 지낼 수 없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나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좋다. 

 

그 이상이 있다. 

이런 정직함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가? 

아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의 요소이겠으나, 인간은 미묘하고 복잡한지라, 표현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고 주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이용한다. 

그래서 말이 많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사람들 중에, 그 표현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이목에 중독되고 그 인기에 함몰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작한 일도 어느새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른다.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초심을 지키는 사역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바울도 많은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파들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기쁘시게 해야 했다. 

인기가 많아질 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과 인기 상승에 대한 경계… 이 둘 사이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 권위가 아니라 유순함으로

바울은 충분히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헌신, 그의 개척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올랐다. 

교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그 권위에 맞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대하듯, 유순한 사랑의 말로 성도들을 대했다. 

명령할 수 있었지만 부탁을 했고, 강권할 수 있었지만 설명과 설득을 했다. 

물론 그의 편지 곳곳을 살펴보면 때로 엄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에도 그런 강경함이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해 유순하게 듣고 말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생명조차 내 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사랑이면 거의 예수님의 사랑이다.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성도들이 매우 사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1장에서 드러난 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닮아가고 있었다. 

예수님을 당연히 주님으로 모시고 본받았지만, 그 구체적으로는 바울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울 입장에서는 그 성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고난 속에서도,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그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나온다. 

권위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 

온순함으로 대해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권위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위를 뛰어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를 온유하게 대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다면, 그는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성도들이 성장해서 어떤한 환란과 핍박에도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역자들의 소망이요 꿈이다. 

그 소망과 꿈이 현실에서 이뤄질 때, 사역자는 자신의 생명 만큼이나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사랑이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가르치는 자는 꿈을 꾸고, 배우는 자는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면, 사랑은 더욱 커진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면, 이젠 가족만큼이나 사랑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누가 뺏어 가겠는가!!

 

[오늘의 기도]

예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는지 생각합니다. 

 

작고 적은 존재지만, 저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의 인기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저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많아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주님을 따라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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