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5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NIV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18절).

 

주석

13절 독자들은 재림 전에 ‘자는’ 사람들(즉, 자기 교우들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어서 그 행사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거나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IVP 성경주석).

 

동료 그리스도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13절).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시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는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16절), 우리도 주님을 만나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17절).

 

바울은 슬퍼하는 이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새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기쁨을 나눕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1. 잠든 사람 

바울은 죽은 사람을 잠든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6절에는 죽은 사람이라고도 쓰는 걸 보니, 의도적으로 두 가지 표현을 함께 쓴다고 읽힌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서라기보다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예수님 안에서 잠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끊어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순간이다. 

오랜시간 예수님께 순종으로 살다가, 때로는 모진 고난과 슬픔을 당하다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품에서 평화와 평안을 경험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 자신이 다른 편지에서도 밝힌 바,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온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녕을 경험한 바 있다. 

일상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특별한 경험과 계시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그동안 죽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품안에서 쉬고 안식하고 잠들어 있음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단순히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망이 있다. 

다시 부활할 소망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육체로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실 때, 육체로 부활하셔서 부활체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망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와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무기력이 지배하고, 공허함이 넘치는 공간에서 소망과 기쁨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2. 재림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언제 성취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의 끝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있어왔는가!

세계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히로시마의 핵폭탄을 맞은 사람들은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세상의 종말과 같은 것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이 오시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이 바뀌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지구 위에 펼쳐질 것이다. 

주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서로를 그리고 온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돌보고 다스릴 것이다. 

그 날이 온다. 

 

바울은 그 날에 대해 좀더 자세히 기록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모두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실 것이다. 

지금처럼 개인 방송이 실시간으로 퍼지는 세상이 더욱 고도화되면, 예수님의 오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품에서 잠들었던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부활체로 바뀌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대 환영식을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17절 마지막이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순간이 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이젠 실제 눈으로 몸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한다. 

 

난 바울의 이 말들과 설명을 믿는다. 

그러기에 소망을 품고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능하면 빨리 오세요.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벗겨주세요. 

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알게 해 주세요. 

진실을 알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해 주세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주세요. 

미중러의 패권 경쟁으로 죄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속이는 자들을 벌하여 주세요. 

속아 넘어간 자들을 구출해 주세요. 

 

주님, 이 세상을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2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부탁하며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서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2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지시를 여러분에게 내렸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4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6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교우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빠져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주석

4-5절 성생활은 존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거룩은 성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성격을 제어한다. 그 반대의 생활은 ‘색욕’으로, 곧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제하지 않는 육체적 욕망의 특징을 보인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상의 문제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1절), 음행을 멀리하고 몸을 성결하게 하도록 도전합니다(3, 5절).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7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행하며, 내 일상의 자리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내가 구별되어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묵상]

1. 징벌하시는 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본체요, 그 사랑의 힘으로 역사를 끌고 오신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곳이다. 

그 사랑의 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의 자기 희생적 사랑에서 나온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분이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분은 징벌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결국에는 벌하신다. 

현실에서의 징벌과는 차원이 다른 미래의 심판이 기다린다. 

하나님이 당신을 징벌하는 분으로 계시하는 것은 참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민족과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 영을 쫓았다. 

오랜 기다림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다림을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영적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자연 만물을 아름답게 통치하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었다.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리는 것. 

 

징벌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욱 더 방자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허용하면, 사람들은 그 한계를 모르게 된다. 

한계를 모르는 인간은 결국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한다.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 된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한계를 지어주신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는 사람들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신다. 

 

본문에서는 탈선하는 것, 성도들을 해하는 것은 그 한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실수와는 다르다. 

자신이 잘못임을 알고도 탈선된 상태를 유지하고, 주변 성도들을 해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 

고집을 피우고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죄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징벌을 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것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길은 없겠으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벌을 주시고 심판하셨던 것은 사실이니,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성경 역사를 묻고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힘들어도 “징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계속 묵상해야 한다. 

한쪽으로만 기울어가는 생각의 편향 선호성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은 자유를 촉진하고, 징벌은 한계를 지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랑도 한계를 지우고, 징벌도 자유를 촉진시킬 수 있지 않은가? 

징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징벌하지 않으면 도리어 두려움이 공동체를 짖누른다. 

사랑해서 울타리를 두고, 보호장비를 입힌다. 

사랑해서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사랑도 징벌도 그 맥을 이어주는 것은 “나를 위함이냐 아니면 상대를 위함이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함도 분명 있으나,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셨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 

사람들은 단순한 명령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짧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길고 복잡하는 것은 이해도 안되고, 오래 붙들고 있기도 싫다. 

상대를 향해 희생하기에 하나님은 사랑도 징벌도 함께 공존한다. 

이것을 끝까지 붙들고 가야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 

 

2. 성결과 거룩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성결해지길, 거룩해지길 그렇게 온전해 지길 바라고 있다. 

이것은 바울만의 소망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망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관계의 울타리 안에 거하면서, 성도들을 깊이 사랑할 때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일상 속에서 성결과 거룩을 유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음욕을 절제하고, 부부 생활에 충실한 것이 현대 사회로 올 수록 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었다. 

바람, 외도, 오피스 와이프 등은 너무 많은 성적 타락이 현대 사회에 영향을 준다. 

대중 문화에서도 자유로운 성관계를 당연시 한다. 

언약관계로 맺어진 부부 사이의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남편과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해야 색욕을 피할 수 있다. 

상대를 비하하거나 무서워하면 결국 배우자 외의 관계에서 성적 욕망을 풀려고 할 것이다.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사랑으로 대해야 언약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색욕을 피할 수 있다.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다. 

거룩함과 존중함, 부부끼리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은 교회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잘 갖춰진 교회다. 

앎과 실천이 조화를 이룬 교회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온 교회다. 

그 교회가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자유의 한계를 잘 유지하고, 무엇보다 부부생활에 충실함으로 색욕을 극복하고, 더욱 거룩하고 성결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거룩함과 완전함에 대한 추구. 

강박적이지만 않다면 지극히 성경적이다. 

바리새적이지만 않다면 예수님도 지지하신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거룩으로 이끄신다. 

이를 기억하고 진지하게 내 삶을 다시 돌이켜야 한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거룩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완전함을 위해 나아갈 것인가? 

강박적이거나 종교 중독에 빠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교만해지는 바리새인의 태도를 버리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 방법을 알고 싶다. 

성령님께 간구한다. 

 

오늘 하루 그런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성결함과 거룩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깁니다. 

사랑과 자유와 평안과 온유함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도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결, 거룩, 완전이 주는 정서적 긴장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세요. 

더욱 거룩해지고 성결해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욱 자유롭고 사랑많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가르쳐 주세요. 

그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소서. 

선생님을 보내주세요. 

멘토가 필요합니다. 

책을 추천해 주세요. 좋은 영상을 발견하게 하소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NIV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13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있길 간구합니다(11절), 또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여 넘치기를, 그들이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도록 기도합니다(12-13절).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교회 너머로 넘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세워질 것입니다. 나와 공동체에 사랑이 풍성하게 넘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바울의 열망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꼭 가고 싶었다. 

그 교회 성도들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었다.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더욱 견고히 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탄이 그 길을 막고 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친히 열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열망이다. 

그리고 그 열망을 기도로 표현한다.

 

나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오랜 친구이자 믿음의 동역자인 김선교사다. 

현재는 미국에 있는데, 한 번 간다 간다 했는데, 아직도 못가고 있다. 

만나서 그간의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그에게 격려를 하고 또 받고 싶다. 

귀한 믿음의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오늘은 보고 싶은 친구들과 동역자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좋겠다. 

그들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다. 

 

2. 흠 잡을 데가 없게

바울의 열망 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과 온 성도들 앞에서 거룩함에 있어서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어렵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온다. 

거룩함에 흠 잡을 데가 없다는 말은 너무 완벽주의자의 말처럼 들린다. 

과연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문을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본문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야겠다. 

12-13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먼저는 사랑이 풍성해지길 기도하고 있다. 

바울 선교단도 그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 

주님도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넘치길 바울은 기도한다.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그것도 한 사람, 한 개인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전 문맥에서 주로 믿음에 대해 사용한 어구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공동체 속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 

마음을 굳게 함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포함한다. 

주님 오실 때,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게 하실 것에 대한 소망이다. 

이 소망이 믿음을 견인한다. 

 

사랑과 소망을 품은 믿음, 이 두 가지가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거룩함에 있어 흠잡을 데가 없게 하려면,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소망은 더욱 희망차고, 그에 따르는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주님 오실 날을 소망하고 있는가? 

나는 그 소망에 따라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있는가? 

나는 공동체에서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누고 있는가?

 

이것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 

거룩함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을 살펴서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온다. 

소망, 믿음, 사랑, 공동체 안에서, 주님 안에서…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주님을 소망합니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비판과 판단을 중지하게 하시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그때까지 믿음을 굳게 하고,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소서. 

 

주님,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는 간사들을 격려해주시고, 힘을 북돋게 하소서. 

저도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가게 하시고,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부어 주소서. 

재정 정리와 결산도 잘 마무리 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6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여러분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또, 여러분이 우리를 늘 좋게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보고, 우리의 모든 곤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다.

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모든 기쁨을 두고, 여러분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10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NIV

Night and day we pray most earnestly that we may see you again and supply what is lacking in your faith(10절).

 

주석

10절 바울은 현재 그들의 믿음에 어떤 잘못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믿음은 날마다 매번 새로운 시련이나 시험을 치르면서 자라야 하는 것, 그런 성장이 일어나도록 돕는 데 더 많은 가르침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에브리원 주석).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과 사랑이 건재하다는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6절). 그 소식에 오히려 위로를 받고(7절),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9절). 더불어 하루속히 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 또 이들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고 성숙해지기를 간구합니다(10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바울에게는 복음과도 같았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8절). 이들은 만나서 교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며 위로를 누립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놀라운 하나 됨이 있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서로의 생명이 연결되는 놀라운 하나 됨이 나타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의 기쁨이 느껴지는가! 

디모데를 파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느나, 그가 가져온 소식은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바울과 그의 선교단을 사랑으로 대하고 있었다. 

좋은 마음으로 바울을 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울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만큼, 그들도 바울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 쪽만 좋아하면 짝 사랑이다. 

둘 다 좋아하면 사랑의 열매가 있다. 

케미가 좋으면 더 큰 열매가 생긴다. 

바울과 성도 간의 사랑이 깊어져 가고 있다. 

그 사랑이 바울을 더욱 기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바울과 그의 선교단이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바꿔말하면, 성도들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바울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도들의 믿음 생활과 바울의 마음의 생사가 연결되어 있다. 

실제 죽는 것은 아니겠으나, 근심과 염려로 밤잠을 설치고 때로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의 여부다. 

성도들에게 복음의 씨앗, 믿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그 씨앗이 타들어갈까봐 노심초사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마음이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한다. 

밤낮으로 기도하는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만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하나님 나라 위해 살아가는 분들을 만나는 것은 그것만으로 격려가 된다. 

전국에서 모인 간사님들, 캠퍼스 선교사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더 깊이 교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모두들 평안하기를 빈다. 

삶과 사역에서 주님의 은혜를 매일 매일 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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