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16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25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26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27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29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30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31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32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34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석

계시하는 빛, 영광(32절) 누가는 이 아기가 가져올 나라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나라임을 보여 준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계시, 곧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구원하시는 계획을 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약속의 전달자였던 이스라엘, 세상의 참 통치자를 배출할 나라에게도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비방 받는 표징(34절) 예수님은 거절당하시기도 하고(4:29), 사람들이 그분을 받아들이기도 할 것이다(5:7), 아기는 “비방을 받는 표적”, 문자적으로 ‘반대를 당할’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실 ‘위로’를 고대하던 시므온은 성전으로 들어오는 아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25-28절). 그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단지 이스라엘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온 백성의 구주가 되시기 위함임을 선포합니다(29-32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이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어 사람들의 반대를 당하실 것입니다. 또한 많은 이의 마음 속 은밀한 생각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34-35절).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기다리는 마음만큼은 분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분을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아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예수님을 향한 갈망의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시므온은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가만히 있음이 아니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성경에서의 경건과 의로움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함과 의로움이 몸에 밴 채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님이 그와 함께 했다. 

시므온은 성령님의 지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성령님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다. 

평소에도 성전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이날은 뭔가 달랐다. 

성전에 가고 싶은 마음이 예전과 달리 강렬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압도하는 세밀한 음성이 들렸다. 

 

성령님의 음성은 스피커로 떠들어대는 광장의 외침과는 다르다. 

침묵 속에 세밀하게 들리는 성령님의 음성에 집중한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가 마음에서 점점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마음의 소리는 분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모든 마음의 소리가 성령님의 음성은 아니다. 

수많은 마음의 소리 속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별에는 공동체적 요소가 분명히 들어가야 한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여겨왔던 역사적 공동체의 분별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속한 공동체의 거룩한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분별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명시적으로 글로 남겨 두어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이 된 성경이 있다. 

이렇게 분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주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므온이 기다렸던 하나님의 위로는 구약 예언자들이 이미 말씀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거룩한 사람들이 함께 추구하던 것들이다. 

그러기에 좀더 확신있게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님은 한 명에게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조차 그분의 주장과 말씀이 선포되기 전에, 세례 요한을 통해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성령님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록된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을 일으키면서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시며 활동하신다. 

 

작은 소리에 예민해져라. 

그 마음의 소리가 역사적 기독 공동체의 오랜 분별의 맥락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 확인하라.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지금 현재의 거룩한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점검하라.  

무엇보다 성경 말씀의 큰 주제와 메시지의 범위 내에 있는지도 확인하라. 

그리고 점점 그 소리를 키워라. 

마음 속에서 더 큰 소리가 되도록 집중하고 허용하라.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라. 

그 행동의 결과와 열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최조적으로 확인하라. 

성령님의 역사는 그 열매로 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드러낼 공동체의 생존과 유지를 원하신다. 

하나님 나라 역사의 소임을 다한 공동체는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멀어진다. 

그리고 성령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다시 일어난다. 

소임과 사명이 남은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신다. 

아벱이 송죽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곳에 여전히 성령님의 음성이 남길 소망한다. 

성령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한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의 온전한 회복과 위로를 꿈꾼다. 

구성원들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아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집중하고, 세상의 음성, 자가 욕망의 음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만남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성령님, 

당신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시는 이미지와 환상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운동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영성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주목합니다. 

오랜 세월 운동가와 영성가 사이를 오가며 살아왔습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오늘 저는 깊이 있는 영성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에게 말씀해주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12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8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13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15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16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17 그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18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말을 이상히 여겼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주석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10절)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을 때 푸블리우스 니기디우스는 로마의 귀족 원로원에게 “세상의 통치자가 태어났다”고 전했다. 이와 달리, 주의 천사는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IVP 성경비평주석).

 

구주(11절)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를 세상의 ‘구주’라고 불렀다. 그는 세상의 왕, 세상의 ‘주’였다. 그뿐이 아니다. 제국의 동쪽 사람들은 그도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구주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들려옵니다(8-10절).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갓난아기가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소식입니다(11-12절). 그들은 급히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자기들이 들은 소식을 알립니다(15-17절). 사람들은 이 소식을 그저 이상히 여겼지만, 마리아는 그들이 전한 소식을 마음에 곰곰이 되새겼습니다(19절).

 

세상 사람들에게 ‘구주’라 불리던 아우구스투스의 탄생 소식은 로마의 정부 관료를 통해 귀족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의 구주인 예수님의 탄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목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소수의 특권층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될’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특별한 소식은 다수의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시작부터 이 땅의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나는 오늘 하루 어떤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목자들은 그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천사의 등장으로 화들짝 놀랐다. 

등장 뿐 아니라 메시지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구주, 그리스도, 주님의 탄생에 대한 소식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천사 주위에 갑자기 하늘의 군대가 등장해서 노래를 부른다. 

처음부터 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갑작스런 등장에 또 한번 화들짝 놀란다. 

 

목자들은 구주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다고 의견을 모은다. 

문제는 양떼다. 

양떼를 그냥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소한의 인원만 두고, 나머지는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또 문제가 있다. 

그 지역의 구유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야심한 밤이다. 

마을을 이곳 저곳을 찾아 헤멘다. 

집집마다 들어가 오늘 아기가 태어난 집이 있는지 확인한다. 

사람들이 엄청 많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마을을 꽉 채웠다. 

천사와 하늘 군대의 모습, 그리고 그 메시지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아기를 찾는 것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장면과 메시지는 그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구주, 메시야, 그리스도, 주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그 밤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다. 

 

아기 예수에게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스라엘의 구원을 느꼈을까?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뭐 색다른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차라리 아까 전에 보았던 천사와 하늘 군대가 더 스펙타클하고 신비롭다. 

구유 위에 아기는 평범함에도 못 미치는 초라함 내지는 옹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메시지와 하늘 군대의 노래를 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아기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아기는 어떻게 자라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아기를 바라보는 상상의 날개는 끝을 모른다. 

게다가 천사의 메시지와 하늘 군대의 노랫소리는 그 상상을 저 우주로 확장시킨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초라한 헛간에 임한다. 

 

현실의 초라함을 딛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있을까? 

진정한 세상의 주인의 태어남이 저리 초라한데, 내 삶이 뭐라고 화려함을 꿈 꿀까. 

내 현실은 초라하라도 하나님이 꿈 꾸시는 데를 바라보면 그것으로 족하다. 

목자들이 그 아기 곁에 남아서 그 아기가 어떻게 크는지 계속 살폈는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그 목자들에겐 여전히 돌봐야할 양들이 있다. 

기대와 소망을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 던져두고, 그들은 다시 양이 있는 들판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바, 요셉과 마리아와 그 아기 예수는 헤롯의 눈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다. 

그러니 더더욱 목자들은 그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초라함과 일상의 무게를 뚫고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계속 견고히 간직할 수 있을까? 

 

아픈 사람들이 많다.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내가 처한 현실이다. 

돌봐야할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현실을 뚫고 들어오는 천사와 하늘 군대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 

구주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돌봄과 선포가 동시에 간다. 

그 꿈을 다시 꾼다. 

예수를 찾아 다시 헤멘다. 

만남도 기쁘지만, 찾기 위한 분투도 참 기쁜일이다. 

 

 

[오늘의 기도]

갑작스레 찾아오시는 예수님, 

기대할 수 없는 순간에도 말씀하시는 예수님, 

당신의 그 예측불가능성을 기쁨으로 반깁니다. 

인생은 세렌디피티의 탄성으로 채색됩니다.  

놀라움의 놀랍다고 반응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거나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일상으로 갑자기 쑥 들어오시는 당신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오늘 그런 날이 되게 해 주세요.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세요. 

온전히 회복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세요. 

좋은 약을 주시고, 좋은 치료를 받게 해 주세요. 

 

전쟁으로, 불안한 치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세요. 

주님이 크게 역사하시길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11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석

아우구스투스 황제(1절)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안겨주었다고 선포했고, 자신을 “신의 아들”로 칭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호적 등록(1절) 아우구스투스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과세를 목적으로 새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IVP 성경주석)

 

구유(7절) 예수님은 일반 관행대로 강보에 싸여서 “구유”, 아마 여물통에 뉘였을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금을 걷을 목적으로 호적 등록을 명령합니다(1-3절). 이로 인해 다윗 가문의 요셉 역시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갑니다(4-5절). 임신 중이었던 마리아는 이 고된 여정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6-7절). 이 아이는 포대기에 싸여 여물통에 놓입니다(7절). 이것이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왕위에 앉아 야곱의 집과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왕이 나셨습니다(1:32-33). 왕이라면 크고 화려한 성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베들레헴의 한 작은 여물통에 누이십니다(7절). 예수님은 로마 황제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닌, 자신의 낮아짐으로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낮아지심이 내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닮아가는 하루를 보냅시다.

 

[오늘의 묵상]

요셉과 마리아는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야만 했다. 

그 상황을 생각하면 참 답답해진다.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함에도 어쩔 수 없이 긴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임신을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몸과 마음이 크게 바뀐다. 

더 예민해지고, 입덧도 하게 되고, 더 많이 피곤하다.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베들레헴으로 갔던 시기가 임신 말기다.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가 나온 상황에서 여행을 시작했다는 말인데, 이것 참 답이 없다. 

장거리 여행을 배가 불쑥 튀어 나온 임산부가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요셉도 그렇고 마리아도 그렇고 참 대단해 보인다. 

아니, 그런 사람들 모두를 고향으로 보낸 아우구스투스 권력의 무서움인가. 

 

여행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온다. 

요셉과 마리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다. 

물론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았던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예사롭지 않다. 

사도신경으로 외우는 바, 성령님으로 잉태되었다. 

그러기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는 확신이다. 

하나님이 이 아기와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안정감이다. 

다른 하나는 부담이다. 

자기가 이 아이를 잘 지켜야 한다는 부담과 걱정이다. 

이 둘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하루 하루 여행을 했을 것이다. 

동물을 타고 여행하든지, 걸어서 여행을 하든지 불편한 것은 매한가지다. 

 

최근에 열심히 걷고 있다. 

힘에 부치더라도 걷기를 통해 잘 안 쓰던 근육들을 다시 깨운다. 

걷는 중에 방송도 듣지만, 기도의 시간도 늘어난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 주변 사람들을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 

할 일이 많고, 그래서 내 한계를 느끼고 있다면, 방법은 하나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 

걷기는 여행의 기본이다. 

빨리 걷는 것은 몸에 좋다. 

천천히 걷는 것은 몸과 영혼에 좋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와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과 그리고 내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 왜 없겠는가! 

마리아와 요셉도 여행하면서 걸으면서 그 수많은 생각들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미래, 아이의 미래… 

 

뭔가 집중력있게 멋지게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말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다. 

말도 어눌하고, 생각은 세련되지 못하다. 

부족한 것 투성이다. 

비교하지 않아야 하지만, 때로 비교되는 것이 사실이다. 

숨고 싶다. 

걷는 중에 이런 생각들이 올라온다. 

피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에 파묻히고 싶지도 않다. 

 

태아 예수를 품은 마리아처럼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듯, 예수님도 내 안에 거한다. 

내 육체와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다. 

어디를 가든 확신과 부담이 공존한다. 

그분이 내 안에 있기에 드는 확신, 그분이 내 안에 있기에 품어야할 부담. 

이 둘 다 안고 오늘도 걷는다. 

나의 미래, 공동체의 미래를 내 안에 계신 그분께 건다. 

내 부족함도 한계도 그분께 맡긴다. 

 

[오늘의 기도]

제 안에 계신 예수님,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인식하게 하소서. 

연약함과 부족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맡겨드립니다. 

주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풀잎 같은 연약한 성정임에도 주님 덕분에 감당합니다. 

비교 의식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몸이 아픈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들을 돌보소서. 

험난한 여행길,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는 그 여정 속에 함께 해 주세요. 

멈춰 쉴 때 회복이 되게 하시고,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세요. 

 

세계 곳곳에 총성과 미사일 폭발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소서. 

그리고 어서 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10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67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71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72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73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75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80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석

거룩한 언약(72절) 누가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언약은 조건 없는 약속으로,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에서 성취되었다(IVP 성경비평주석).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78-79절) 하나님은 요한의 정의 요구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어둠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요한의 탄생 이후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언합니다(67절).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며 원수들로부터 건져내십니다(68-71절).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며, 그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의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72-75절).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76-79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된 존재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여러 염려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우리 정체성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는 지금도 우리를 향합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사가랴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자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당시에 이 예언을 듣던 사람들은 뜨아 했을 것이다. 

방금 태어난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인지, 아님 다른 아기에 대한 예언인지 처음에는 헷갈렸을 것 같다. 

물론 예언을 끝까지 들으면,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가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과연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저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주가 아니라 징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다. 

그 말씀을 계속 간직할 것을 강제하는 강력한 표시등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사가랴는 임신한 아내의 배를 보면서 복합적인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져갔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머리를 멤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되씹고, 동시에 성경에 비슷한 사례를 다시 찾아 읽어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러니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훈련이다. 

그 침묵의 기간이 끝나자, 그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다. 

말을 많이해서 받는 성령님이 아니라, 말이 없는 중에 받는 성령님의 충만이다. 

몇 개월을 말없이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뜻에 대해 기도한 뒤에 받는 성령 충만이다. 

오순절 성령 충만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같고 다른지는 논의하지 않겠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게 침묵은 그래서 축복이다. 

 

말이 많은 시대를 산다.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 

지금 이렇게 묵상의 글을 쓰는 것도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메시지를 나의 말과 글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이 너무 많다. 

신문도 많고, 블로그, 유툽도 많다. 

공식, 비공식 문건도 너무 많다. 

모든 것을 다 읽고 들을 수 없다. 

인공 지능, 수퍼 컴퓨터도 아니고, 사람이 어찌 그 모든 것을 다 처리하겠는가? 

말과 글과 메세지가 넘치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흘러 넘쳐 속옷까지 다 적셨다.  

내가 나인지, 주변의 말들이 나인지 헷갈리는 시대다. 

그렇기에 침묵한다. 

그 침묵 속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경험하고 싶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해본다. 

 

성령님의 충만은 인류 역사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감지하게 한다. 

메시아의 탄생, 인류 구원의 시작, 원수에게서의 해방,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기, 거룩하고 의로운 삶. 

메시야의 탄생은 이 같은 새로운 삶과 역사를 낳는다. 

그리고 충만한 성령님의 임재는 이 역사를 감지하게 한다. 

 

예언 중에 눈의 띄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면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사단의 기소가 끝난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문을 여신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고, 두려움 때문에 예배드리는 삶이 청산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 평생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너무 대단하고 멋지지만, 결국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된다는 점이 감사하다. 

말로만의 신분 변화는 참 받아들이기 싫다. 

신분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는 인품과 삶이 따라와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일조차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의 인물들이 증명하고, 내 삶이 증명한다.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메시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역시 여기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의로워져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니, 점점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참소를 받지 않으니, 하나님께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그러니 점점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심리적 역동이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을 꿈꾼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상한 지점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는 표현이다. 

언제부터 광야에 갔다는 말인가?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가? 

누가는 왜 이런 내용을 이 책에 담았는가? 

세례 요한은 참 신비로운 인물이다. 

사가랴의 예언대로 그는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 자신도 인기를 누렸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있다는 사실, 자신은 그저 그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소명 의식이 그의 삶의 지배했다. 

아마도 이런 그의 의식과 삶의 스타일과 메시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광야가 아닌가 싶다. 

사가랴가 침묵을 통해 배웠던 것을 요한은 광야에서 배웠다. 

침묵을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에 이른 것처럼, 광야를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사역한다. 

침묵과 광야를 그렇게 서로 통한다. 

 

나에게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나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 인생에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길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침묵과 광야!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인가!! 

 

 

[오늘의 기도]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기대합니다. 

당신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관계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지식이 과하여 당신을 분석하고 재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님의 충만함 속에서 꼭 필요한 말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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