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3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13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15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16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17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8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NIV

Neither do we go beyond our limits by boasting of work done by others. Our hope is that, as your faith continues to grow, our sphere of activity among you will greatly expand(15절),

 

자기를 척도로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견주어 보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12절). 하나님이 기준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자랑하고 행동합니다(13-14절). 바울은 주제넘게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5-16절).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이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17-18절).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또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 행동하기도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느냐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간, 사람은 신이 되려는 유혹에 빠진다. 

아담과 하와가 빠진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신이 되라고 유혹한다. 

자기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신이 되려고 했다. 

신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벨사살 왕도 그런 유혹에 빠졌었다. 

로마의 황제들도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철처한 나르시스트가 되어 신처럼 행동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정해주신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 

사실 그 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오직 하나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자기의 욕망이, 자기의 생각이 최종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 그것이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정말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했으니, 일단 먹지 말아야 했고, 정말 먹고 싶었으면 다시 물어볼 일이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그런데 그 한계를 자기 척도로 넘어 버린 것이다. 

 

바울은 자기 척도와 스스로와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아마도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준을 강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성경 교사가 건강하게 뿌려놓은 씨앗을 짓밟고 밭을 헤집고 다니는 교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신천지의 행태와 비슷하다. 

정직하게 서로 토론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일이 우선이다.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15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내에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난다.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16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경쟁 구도가 생기고 서로 갈등이 일어난다. 

이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정직하게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을 말하면 된다. 

과도하게 포장하지도 축소하지 않아도 된다. 

정직하게 내가 한 일과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면 된다. 

 

사람들 앞에 인정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 

결국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세워주시는 사람이다. 

주님이 세워주실 때, 그 사람의 권위와 인기가 올라간다. 

단순히 올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위와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인정과 인기가 중요하다. 

그게 곧 돈이 되고, 삶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진다. 

심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실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선 인정과 인기의 추구가 결국 독이 된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데, 스스로 세우려고 하면 결국 분열과 싸움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를 기달릴 수 있어야 하며, 그 때까지는 겸손하게 그저 자기의 일을 할 뿐이다. 

인정과 인기는 권력을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권력이 커진다는 말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 

인정과 인기가 몰리면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되고, 권력이 몰린다. 

그러니 시기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이 생기고, 공동체나 교회는 분열의 길로 가게 된다. 

바울은 이런 메카니즘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졌던 파당 논란을 다뤘던 당사자로서, 한계를 벗어난 자랑과 인위적인 인정 추구가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그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했을 것. 

 

다만, 바울이 이렇게 비판하면, 상대측에서도 비판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말과 말의 싸움은 끝이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통정리를 해 주셔야 하는데, 그걸 분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서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바울파도 베드로파도 아볼로파 아닌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스승이시요, 구주이시다.’

이런 고백만으로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말싸움이 아니라 화해와 하나됨으로 결론 날 수 있을까? 

 

오늘의 물음이다. 

 

[오늘의 기도]

한계를 지어주시는 주님, 

저는 그 한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그 한계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이 아닙니다. 

그 한계는 오히려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선입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고 척도가 되는 순간, 아담의 죄를 저지르게 되고, 죄악의 폭주기관차가 됩니다. 

주님, 자유가 최고 가치가 아니라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게 하소서. 

나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이웃 사랑이 더욱 높은 가치가 되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 공동체가 말싸움이 아니라 서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자기 라인을 그리고 있다면 과연 말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으로 깨닫기 원합니다. 

파당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마무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24 토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11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12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13“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14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것이고,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것이다.”

16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안에 분쟁이 생길 서로를 향해 헐뜯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게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12).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장래에 부를 얻게 것을 장담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또한 미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 않는 교만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13-17).

 

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태도로 나타납니다. 죄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이웃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며, 욕심에 따라 많은 것을 얻고자 자기 뜻대로 계획을 세웁니다. 나에게 혹시 이런 자기중심적 태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삶이되길 기도합시다.

 

——

헐뜯기의 비애

아마도 기독 공동체가 제일 못하는 중에 하나가 형제자매를 헐뜯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거의 평생에 걸쳐서 교회 생활을 왔는데, 안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때로 헐뜯는 일이 그치는 것을 못봤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어쩔 없긴 하겠으나, 안따깝게도 누군가에 대한 품평이 그치지 않고 뒤에서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더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회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비전에 집중했었다. 

사람은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사람의 강점과 장점에 대한 이야기보다 약점과 문제점에 대해 말하게 되더라. 

그래서 사람보다 우리의 사명에 집중했었다. 

그나마 그렇게 해야 형제자매를 헐뜯고 험담하게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은사에 집중하게 된다. 비전을 달성하려면 모두의 은사가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꽤나 작동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동체의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약점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함을 몸소 깨닫는다. 

형제자매의 약점이 고스란히 공동체의 약점으로 비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약점을 명확하게 알고, 약점을 서로 보완할 있는 방향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 

그나마 헐뜯지 않기 위해서는 방법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로서 형제자매를 헐뜯고 교회의 긴장도를 높이고 결국 분열에 이르는 것을 참을 없었다. 

야고보가 편지의 핵심 메세지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싸움과 분열, 긴장으로 흠집난 공동체를 바로 잡고 싶다는 그의 의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하나님의 꿈이며 비전이기도 하다. 

사도 요한도 부분에 있어서 끊임없는 메세지를 내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의 하나됨, 세상과 다른 가장 위대한 모습이다. 

영성을 모든 기독 공동체가 배워야 한다. 

그런면에서 기독교 공동체 인사평가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 

조직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장단의 평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개인의 은사/보완점에 대한 리뷰가 되어야 한다. 

자짓 개인을 헐뜯는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다. 

평가서가 바뀌어야 한다. 평가서는 조직 생활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사명과 하나됨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은 어디에 필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과 함께 묵상하면서 스스로 자기 반성(리플렉션) 과정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기업의 평가 체계를 가져오는 것은 일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같지만, 자칫 일반 기업들이 빠지는 함정에 그리스도인들도 빠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자신을 평가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말씀이 말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진로와 미래도 설계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겠다.

구체적인 방법은 좀더 고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사명을 마태복음 28 대위임령 혹은 마태복음 22 대계명을 묵상하면서 스스로 평가하도록 요청한다. 공동체의 하나됨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이 좋겠다. 각자의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을 묵상하면서 작성하도록 한다. 이렇게 자기 평가를 말씀을 중심에 두고 진행하는 것이다. 기업의 눈으로 평가서가 작성되어서는 곤란하다. 공동체는 다른 방식, 성경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자기 평가를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 기업의 윤리 수준에 맞추려고 하면, 세상의 상식 수준의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성경의 기준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공동체적 하나됨에 많은 무게를 두어야 한다. 

하나됨을 위한 노력에 많은 방점이 찍혀야 한다. 

서로를 세우는 하나됨이 우선될 , 비록 효율성과 효과성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생명력을 유지할 있다. 

공동체의 생명력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이게 흐트러지면 공동체는 조직이 되고, 조직은 결국 자기 생존 본능 때문에 본래의 사명에 걸맞는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 내기 어려워진다. 

 

헐뜯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한 노력 

오늘의 본문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이렇게 퍼져간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야고보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그토록 원하셨던 예수님,

야고보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 헐뜯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서는 평가가 난무합니다. 

엘리트주의로 갈수록 평가가 고차원적입니다. 

조직이 강화될수록 평가가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형평성 논란은 언제가 가중됩니다. 

주님, 부디 하나될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 2. 11. 

 

0. 들어가며 

-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 두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성화 점화를 위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선수 두명(박종아, 정수현)이 성화를 함께 들고 경사도 가파른 12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저렇게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제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두번째는 2018개의 드론이 만들어낸 오륜기였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지만, 금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드론이다. 확신에 찬 감탄사로 “드론이다. 드론”하고 아내에게 외쳤습니다. 정말 Fantastic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블로그를 봤는데, ‘2018명의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드론을 운전할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표했더라구요. 저는 알았죠. 그건 2018명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1명이 컴퓨터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평화를 통한 하나됨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 친선 도약’입니다. 그중에서도 평화가 으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도시 국가간에 전쟁 중이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에는 휴전을 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고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평창 올림픽이 그 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의 소원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2주전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악한 세력은 사단, 예루살렘 성전종교 지도자들, 회당 중심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대제국 로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세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지키다도 중요하지만, 왜 지키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Keep from 도 중요하지만 Keep for도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영어공부 한번 하면 좋겠는데요. 목적을 나타내는 so that may  구문을 찾아봅시다. 

 

1. 하나됨 (11절)

이건 우리가 지난 2주간 계속 다루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연합해 계시듯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자들, 즉 사단을 비롯한 그의 하위 권세자들은 위협과 유혹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제자들의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 철저히 유린된 교회의 하나됨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의 유혹에 철저히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분열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네트웍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이단의 발흥으로 분열합니다. 로마교회는 교리 문제와 교황권 싸움으로 동로마교회와 서로마교회로 분열됩니다. 유럽대륙의 카톨릭교회는 구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없다? 

교인들은 하나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의 기도의 한계와 허약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신 걸까요?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일까요?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도가 AD80년 중후반 요한의 글에서, 요한의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함께 드려졌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됨은 현실에서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분의 기도는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퍼집니다. 하나됨을 해치려는 수많은 세력들과 욕망들 앞에서 온몸으로 막고 계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한 그분의 기도와 수고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한 공동체 

저는 진실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큰 적은 가식, 부정직, 외식, 겉과 속이 다름입니다. 마피아게임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로간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하다보면 인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낳습니다. 건전한 게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딕싯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과 느낌을 알도록 기획된 보드게임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게임에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나눔과 정직한 반응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세상은 속이고 반전으로 놀래키고 배반으로 돈을 벌지만, 즉 일종의 투자와 사기사이의 애매한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 하나됨을 위해_삼위일체 신학, 용서, 그리고 경청과 공감

이렇게 진실되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위한 신학 내지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이해한 삼위일체 신학과 묵상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상의 많은 부분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원리가 기독인의 영성의 근본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시가 매일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행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용서를 실행할 용기를 내면 참 좋습니다. 과거 학생 수련회 때마다 용서의 밤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난 학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 나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를 서로 구하고 서로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감하며 경청하기는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사회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콘서트에서나 있는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김제동의 톡투유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경청과 공감듣기가 작동합니다. 기독 공동체에서 일어나야 할일이 교회 밖에서 기획되어 대중화됩니다. 

 

=> 도전! 진실한 하나된 공동체

평생에 걸쳐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진실하며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는 겁니다.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크고 작든 그런 공동체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보는 게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우리 크리스찬들의 자세일 겁니다. 

 

2. 기쁨(13절)

무엇을 위해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가? 두번째는 기쁨입니다. 13절에도 so that may 구문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이 구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장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세상에 머물게 될 제자들을 지켜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립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 공동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13절이 정말 뜬금 없습니다. 갑자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한번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답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는 겁니다. 

 

-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의 기쁨(13절)

13장에서 17장까지가 고별설교및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바로 제자들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핍박이 찾아옵니다. 이 유혹과 핍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내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로 단절되었을 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천국을 보화와 같이 간직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누룩을 가져오는 신앙,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크다고 확신하는 신앙,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도 악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이 더 큰 신앙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회의 분열에 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 기쁨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스마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 제자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은 쥐어짜내어 헌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지의 남은 하나까지 쥐어짜내어 인상을 찌푸리며 종교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에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배수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 빨래를 했는데, 청바지를 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손빨래를 했는데요. 있는 힘을 다해 청바지를 비틀었습니다. 청바지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안쓰던 근육도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쥐어짜내는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 나온 분들로 족합니다. 모든 근육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건 그들이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기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우리는 내면의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근심이 가득해도,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 기쁨의 근원

이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연합안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이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위의 말씀에서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성한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부담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요 자발적이요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자 

유명한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한분 계십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그분을 만족해할 때,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으신다고 역설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분의 존재가 기쁘십니까? 그분의 존재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하신 일로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신 일에 만족하십니까? 감정고양으로 흥분되는 상태말고요. 주변 교인들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는 거 말고요. 교회 봉사나 구제로 인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거 말고요. 정말 삼위 하나님이 기쁘십니까? 삼위 하나님이 만족스러우신가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행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신앙의 여행은 수많은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여행의 특징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흐릿하게 합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분이 기쁩니까? 그분으로 만족합니까? 

 

3. 진리로 거룩(17-19절)  

이제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됨과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거룩입니다. 사단을 필두로 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쩌면 거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의 규정만으로 거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거룩의 실제가 무엇이며, 그 실제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 거룩의 실재_보냄받는 일상(18절)

거룩의 실제는 분명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상한 삶의 방식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산과 시내를 벗삼아 조용히 기도의 집중하는 삶이 거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의 실제 모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엄마, 설겆이를 하는 순간, 화장실 청소 하는 순간, 밀린 빨래를 하는 순간,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점검하는 순간, 회사 직원 회식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순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회의를 하는 순간, 올림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순간.... 모든 일상의 순간이 거룩의 실제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모든 일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속에 있듯이 지내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모든 일상이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미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의 실재입니다. 

 

- 진리로 거룩하게(17절)

그럼 어떻게 일상에서 거룩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겁니다. 위엄있는 척 하는 모습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해 보이는 옷과 신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 기도를 오랫동안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경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17절)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고 외우시고 연구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 전체일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다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스러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맞습니다.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격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잠잠히 거하는 것, 순전히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30살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잔뼈와 잔근육이 발달했던 그분을 따라 사는 겁니다. 종교권력과 맞서 예루살렘 이방인의 뜰에 펼쳐져 있던 장사 테이블을 뒤엎었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환대하시고 힘있고 신학적으로 갑질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설을 베푸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던 것처럼 사회적 계급을 무시하고 의전을 무시하고 약자를 섬기는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손을 올려 주님을 외치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거룩의 기역자도 쓸 수 없습니다. 

 

-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나눠질 때, 거룩함에 이른다. 

 

“너희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절)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Transformed by the Holy Scripture. 이게 되어야 합니다. 과연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때문에 내 삶에 새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나요? 말씀 때문에 던져진 인생의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나눠져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4. 나가며 

몇 주간의 걸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연합 안에 있다는 개념에 집중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기도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으로 그분이 무엇을 목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하나됨(one), 기쁨(joy), 거룩(holy)

맞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일 겁니다.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과 영성에 깊이 천착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청과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목적은 제자들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의 일상속 세상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길 목적으로 삼습니다.  

 

-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분의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AD30년에 드려졌던 그 기도는 초대 교회에 면면이 흘러 지속적으로 드려지다가 AD85년 어간 요한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도 좋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좋습니다.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따라 적용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0“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아버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분을 믿게 사람들(교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20). 그들이 하나 주님 안에 거하며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게 것입니다(2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것입니다(2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것입니다(25-26).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가장 강력히 증거 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 4:3) 힘써 지켜가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합시다.

 

——

Crazy Prayer

 

본문에 대한 반응, 감탄사였다. 미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기도가 얼마나 미친 기도였는지 실감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초월적이기까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도의 이상에 반했었다. 

기도처럼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살아가자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것이라는 진리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일단 우리가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너무 다양하며 또한 만의 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셋은 세상 사람들이 알게 것에 흥분한 이유가 바로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라는 나의 야망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지 때문에 점점 말씀이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 사역도 하고 있다. 하나됨의 정도와 수준도 수정되었고, 속도와 범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됨을 붙들고 살고 있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하나됨을 포기했다. 더욱 다양해도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26)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시에 감지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정치적 지향이 어찌 똑같을 있단 말인가? 사역의 방법론과 방식이 어떻게 같을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 소명이 다른데 방향을 어찌 맞추는가? 하지만, 한가지 빼지 말아야 공통 분모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이요, 십자가로의 사랑이다. 또한 부활로의 사랑이며 영광으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의 결과와 행동은 희생과 섬김 그리고 영광과 통치, 이렇게 분화되고 통합된다. 

 

사랑이 나와 우리에게 있는가? 사랑을 믿고, 인식하고, 따르고 있는가? 공통분모를 놓치기가 싫다. 누군가 이것도 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요. 하나됨을 이루는 아교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다(26). 

 

너무 보편적으로 추출했다고 보는가? 맞다. 보편과 상황은 주고 받는 것이다. 왔다갔다한다. 보편 없는 상황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상황없는 보편은 전체주의 절대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됨의 보편이다. 보편을 나의 상황, 우리 공동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것 나름의 깊이 있는 묵상과 사색의 결과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보편을 추구한다. 사랑이 결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그저 멀끔히 수용하고 싶지 않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사회개혁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하나님의 사랑없이 환경운동도 있고, 사회개혁운동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보편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기본이요. 보편이요. 하나됨의 아교다. 그래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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