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8. 

 

0. 들어가며 

- 혜율이를 잃어버리다.

집 근처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습니다. 중산마을에 있다해서 중산공원인데요. 트랙도 있고 인조 잔디 축구장도 있어서 많은 주민들이 이용합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무료 에어로빅 강좌가 열리는데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에어로빅 강사를 따라 춤을 춥니다. 

하루는 7살 짜리 큰 딸, 혜율이와 저희 부부가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하러 갔습니다. 한살 짜리 혜강이를 유모차에 태우려고 이것저것 하던 사이에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혜율이가 에어로빅 하는데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몇번 불러봤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 주변을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는게 좋은가. 뛰어 다니는 게 좋은가?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정말 1분이 1시간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0분정도 흘렀을까요? 아내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전화번호였어요. 한 여성분이 전화를 걸어 울고 있던 혜율이를 바꿔주었습니다. 다행히 혜율이가 엄마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겁니다. 십년감수 이럴 때 쓰는 말이죠. 

 

혜율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배워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안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혼을 냅니다.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 소방관, 군인_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과 생명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주는 분들에 대한 삶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소방관들의 보호장비를 개인이 사서 착용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건 국가가 나서서 최고의 제품을 공급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예수님의 기도_제자들을 지켜주소서.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면 하나의 동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바로 KEEP 입니다. 지켜달라는 그분의 기도가 11절과 15절에 분명히 등장합니다. 혜율이가 없어지고 몇분이 지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달렸습니다. 주님 혜율이를 지켜주세요.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세요. 

 

1. Keep 동사의 전제_세상(11절, 15절)

- 지켜달다는 말이 전제로 놓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입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켜달라’, ‘보호해달라’라는 기도가 작동하게 된 근원적인 상황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승천하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고 세상에 남아서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속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 데려감을 당하는자 vs 남겨둠을 당하는 자_참고도서

마태복음 24:40-41, 이 본문은 마지막 날 있을 일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가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으로는 데려가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 노아의 홍수와 유사성을 밝히면서 이 구절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다. 

나) 버려둔다의 단어는 단순히 남는다의 leave 동사로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아피에미(φίημι)는 ‘떠난다. 용서한다. 풀어준다. 허용한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로 볼 여지가 크다. 

다) 데려간다의 의미는 “재판에 회부된다”라는 뜻, 성경배경주석에 잘 설명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라) 병행구절 눅17: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심. 이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곳에 죽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 즉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의 장소는 독수리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

 

여러가지로 볼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에 구원받는 사람은 세상에 남는자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저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건전한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 새롭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미래 버전이 탄생할 겁니다. 

 

-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 개념_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여러분!! 이 세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워질 뿐입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고 변형되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영혼들이 떠다니며 노래하는 세상이 아니라, 육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일도 하며 춤도 추는 세상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에 잘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합니다. 

 

일상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우주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세워질 겁니다. 지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수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과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중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 대한 태도인 겁니다. 

 

-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 남은 자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지기 전까지의 남은 자들에게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중간기의 세상은 위험합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왕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전세계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의 세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사우론과 사루만, 우르크하이와 오크들이 반지원정대를 공격하고 세상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2. 무엇으로부터 지키는가?_악한 자에게서(15절) 

예수님은 악한 자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 악한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1) 사단 

첫번째는 사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예민하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 하신 이후에 예수님을 시험한 사단은 아주 달콤한 존재였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들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죠.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해봐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봐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봐라. 돈, 권력, 명예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죠.지금은 고인이 되신 헨리 나우웬은 영성에 대한 책을 많이 내셨는데요. 그중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예수님이 이겨내신 사단의 시험을 상황부합의 시험, 권력확보의 시험, 이목집중의 시험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힘을 키워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욕망,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이런 욕망은 세상의 길이라고, 무한히 상향성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귀신들이 종종 나타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단의 전략에 맞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광받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숨기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종종 등장합니다. 

 

사단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험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이 가진 내밀한 욕구들을 끄집어 내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유혹합니다. 제자들의 능력을 드러내어 자신들의 목표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할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빨리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만 혈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이 사단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주기도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 

 

2)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 중심 유대교인들

둘째는 성전 중심의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사단이 조정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사단의 졸개들이라고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성전중심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2번이나 성전을 뒤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역 1년차일때 뒤엎은 사건이 나오고요(요2:13-22). 나머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는 사역 3년차때 뒤엎은 사건이 나옵니다. 전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옵니다. 일생에 한번 와서 제사드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참된 용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만 이뤄진다고 믿었죠. 그러니 성전은 최고의 종교,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어마어마했죠. 자릿세도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모든 돈이 성전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들어갔죠. 성전 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이 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서 멸망한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최고의 종교적 상징이자,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었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압박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여전히 종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교회세습의 본질은 돈과 권력의 종교적 카르텔의 보호입니다. 유력한 목사 중심으로 돈과 권력이 집중됩니다. 단지 그 목사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장로 권사 집사들이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사람을 후임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세습을 버젓이 하는 것은 자신들이 종교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3) 바리새인을 비롯한 회당 중심 유대교인들 

그런데 성전 수호자들만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번째가 있는데요.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신학논쟁을 펼쳤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존경받는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율법 준수에 탁월했습니다. 유대교 경전인 토라, 즉 모세 오경을 다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쫓아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세계 곳곳에 회당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가서 그리스도인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악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하라 하지 말라의 종교로 격하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받아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도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자들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의무라기 보다는 즐거움이요 특혜죠. 주일예배도 특권입니다. 기도도 특권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모든 종교적 행위를 의무로 느끼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의미가 빠진 형식은 의무감만 남깁니다. 특권이 특권되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강요하기 이전에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 충분히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형식파괴자는 아닙니다. 다만 형식을 강요하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배우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4) 로마 

마지막으로 누가 악한 자입니까? 당시 절대권력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절대 제국 로마가 악한 자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합니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지만, 황제숭배는 필수였습니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로마의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 시대가 되면 극에 달합니다. 요한복음이 AD8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33년에서 85년까지 약 50년간 요한은 로마의 다양한 박해를 경험했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끓는 기름에 튀겨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싫어하는 권력과 국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순교의 현장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합니다.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과격한 행동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겟으로 이뤄집니다. 교회가 불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탄압과 박해는 대체로 종교 그 자체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유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극단성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건 기독교 극단주의자들도 유사하게 행동합니다. 정상적이고 온건한 종교인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로마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누구는 공산주의라고 부릅니다. 누구는 이슬람국가라고 합니다. 누구는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누구는 국가제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을 로마라고 부르겠습니다. 

극단주의자들, 그것이 종교든, 물질이든, 사상이든, 국가든 극단주의자들 그들이 로마요,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자들이 폭력을 부르고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런 악한 자들로부터 육체와 정신과 정서와 마음을 지켜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3. 나가며

- 세상에 남겨두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기도는 악한 자에게서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단의 유혹, 돈, 권력, 명예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 기득권자의 기독교 장악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종교적 행위에 가둬두려는 신학적 이단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로 상징되는 극단주의자의 박해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교회 즉 성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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