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3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13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15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16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17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8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NIV

Neither do we go beyond our limits by boasting of work done by others. Our hope is that, as your faith continues to grow, our sphere of activity among you will greatly expand(15절),

 

자기를 척도로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견주어 보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12절). 하나님이 기준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자랑하고 행동합니다(13-14절). 바울은 주제넘게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5-16절).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이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17-18절).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또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 행동하기도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느냐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주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간, 사람은 신이 되려는 유혹에 빠진다. 

아담과 하와가 빠진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신이 되라고 유혹한다. 

자기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신이 되려고 했다. 

신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벨사살 왕도 그런 유혹에 빠졌었다. 

로마의 황제들도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철처한 나르시스트가 되어 신처럼 행동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정해주신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 

사실 그 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오직 하나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자기의 욕망이, 자기의 생각이 최종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 그것이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정말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했으니, 일단 먹지 말아야 했고, 정말 먹고 싶었으면 다시 물어볼 일이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그런데 그 한계를 자기 척도로 넘어 버린 것이다. 

 

바울은 자기 척도와 스스로와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아마도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준을 강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성경 교사가 건강하게 뿌려놓은 씨앗을 짓밟고 밭을 헤집고 다니는 교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신천지의 행태와 비슷하다. 

정직하게 서로 토론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판단하도록 돕는 일이 우선이다.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15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내에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난다.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16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경쟁 구도가 생기고 서로 갈등이 일어난다. 

이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정직하게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을 말하면 된다. 

과도하게 포장하지도 축소하지 않아도 된다. 

정직하게 내가 한 일과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면 된다. 

 

사람들 앞에 인정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 

결국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세워주시는 사람이다. 

주님이 세워주실 때, 그 사람의 권위와 인기가 올라간다. 

단순히 올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위와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인정과 인기가 중요하다. 

그게 곧 돈이 되고, 삶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진다. 

심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실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선 인정과 인기의 추구가 결국 독이 된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데, 스스로 세우려고 하면 결국 분열과 싸움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를 기달릴 수 있어야 하며, 그 때까지는 겸손하게 그저 자기의 일을 할 뿐이다. 

인정과 인기는 권력을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권력이 커진다는 말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는 말과 같다. 

인정과 인기가 몰리면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되고, 권력이 몰린다. 

그러니 시기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이 생기고, 공동체나 교회는 분열의 길로 가게 된다. 

바울은 이런 메카니즘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졌던 파당 논란을 다뤘던 당사자로서, 한계를 벗어난 자랑과 인위적인 인정 추구가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그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했을 것. 

 

다만, 바울이 이렇게 비판하면, 상대측에서도 비판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말과 말의 싸움은 끝이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통정리를 해 주셔야 하는데, 그걸 분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서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바울파도 베드로파도 아볼로파 아닌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스승이시요, 구주이시다.’

이런 고백만으로 그리스도파로 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말싸움이 아니라 화해와 하나됨으로 결론 날 수 있을까? 

 

오늘의 물음이다. 

 

[오늘의 기도]

한계를 지어주시는 주님, 

저는 그 한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그 한계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이 아닙니다. 

그 한계는 오히려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선입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기준이 되고 척도가 되는 순간, 아담의 죄를 저지르게 되고, 죄악의 폭주기관차가 됩니다. 

주님, 자유가 최고 가치가 아니라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게 하소서. 

나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이웃 사랑이 더욱 높은 가치가 되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 공동체가 말싸움이 아니라 서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겉으로는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서로 자기 라인을 그리고 있다면 과연 말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심으로 깨닫기 원합니다. 

파당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마무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1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1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2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NASB

For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having conclud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fore all died;(14절)

 

주석

두려움(11절), 사랑(14절) 성경에서 ‘두려움’은 잔뜩 움츠린 공포가 아니라 거룩한 경외이며,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희생적인 보살핌이다. 이 두 단어는 양립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책임을 깨닫고 있고 그래서 바른 두려움이 있다.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해왔습니다(11절).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12절). 만약 그가 미쳤다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고, 온전했다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3절).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혔습니다(14절).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15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은 미친 것,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휘어잡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합시다. 내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힘씁시다.

 

[오늘의 묵상]

말에는 힘이 있다. 

스스로 규정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말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을 이어가고 감정을 나누고 행동을 촉진한다. 

 

설득하는 말, 자랑하는 말, 오늘 본문에는 이 두 가지 말이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성도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확립되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해 험담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정당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부당한 험담은 조심해야 한다. 

죄와 싸워야 하건만 죄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울은 그 일을 해 온 것이다. 

 

자랑하는 말도 바울이 안 한 것은 아니다. 

그 자랑은 실체에 대한 자랑이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러한 고백이 아니고서야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고백의 중심에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자랑이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자신은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고백으로 자랑한다. 

 

허나, 어떤 사람들은 삶의 고백이 아닌 허풍으로 자랑하기도 한다. 

속과 겉이 다르다. 

포장이다. 

속은 비어 있거나 썩어 있는데, 겉만 번지르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마치 고귀한 것이 있는 둥, 자랑을 한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하는 일이 그렇다. 

죄악에 둘러 쌓여 그 속은 곪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도리어 생명을 위협하는데, 겉만 치장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문제는 그게 먹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다. 

사이비의 달콤한 위장 전술에 속아서 정신세계를 갖다 바친다. 

허풍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당한다. 

 

바울은 이런 거짓의 사람들,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자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라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랑이다. 

자랑의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삶으로 경험한 것들이다. 

성령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바꾸셨으며, 지금도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의 변화가 없이 성령님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님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설득을 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주고 살도록 추동하신다. 

그렇게 열매로 안다. 

성령님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는 삶의 변화, 삶의 열매로 안다.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감정적 고백만으로는 참된 자랑을 할 수 없다. 

삶의 실제적 변화가 따라와야 한다. 

 

애즈베리 대학교의 24시간 기도와 예배의 열정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24시간 예배당에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고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회개로 이어진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궤도 수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된다. 

이것이 참된 부흥이며, 이것이 속이는 자들에게 보여줄 자랑의 근거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변화된다. 

 

이런 것이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미쳤다고 하기도 했다. 

바울의 대답은 수사적이다. 

미쳤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미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정신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미쳐있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배와 어망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모양 그는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걸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삶 그 자체가 미친 것으로 비췰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쳤는가? 

이유는 단호하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널리널리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즉 바울의 미침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 

정신이 혼미하거나 정신 질환을 앓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추동시킨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미쳐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랑은 집착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귀한 사랑에 의해, 희생적 사랑에 의해 삶의 변화를 겪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미친 것이다. 

고귀한 사랑을 받으니 사람이 미친다. 

그 사랑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호를 만들어야 했다.

미술 시간에 지우개 도장 파기가 있었는데, 두 글자로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주광” 주님께 미치다. 

그렇게 지었다. 

정말 예수님께 미쳐 있었다. 

그분이 나의 점심시간을 빼아갔으며, 하교길 친구들과의 노는 시간도 빼앗아 갔다.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기도회에 참석했고,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길거리 전도에 나갔다. 

어린 마음에 여물지 않는 신앙의 집착과도 같은 행동들이었다. 

부족했지만 부끄럽지 않고, 여물지 않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주광, 주님께 미친 자,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예수님을 온전히 미치고 싶다. 

온전한 정신으로 그분께 미친 자가 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열정만으로 이뤄진 부흥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회심 뿐 아니라 회개가 일어나게 하소서. 

24시간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동시에 습관이 바뀌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서 점점 예수님처럼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베스트입니다. 

주님, 한국에 진정한 부흥을 주소서. 

주님을 향한 열망이 터져나오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 나오게 하소서. 

제가 섬기는 공동체가 부흥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기에 변화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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