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1. 

 

0. 들어가며 

-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감동적이었던 장면 두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성화 점화를 위해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선수 두명(박종아, 정수현)이 성화를 함께 들고 경사도 가파른 120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의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저렇게 함께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제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두번째는 2018개의 드론이 만들어낸 오륜기였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지만, 금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드론이다. 확신에 찬 감탄사로 “드론이다. 드론”하고 아내에게 외쳤습니다. 정말 Fantastic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블로그를 봤는데, ‘2018명의 어떻게 일사 분란하게 드론을 운전할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표했더라구요. 저는 알았죠. 그건 2018명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1명이 컴퓨터로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평화를 통한 하나됨

올림픽의 정신은 ‘평화 친선 도약’입니다. 그중에서도 평화가 으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도시 국가간에 전쟁 중이더라도 올림픽 기간 중에는 휴전을 했다고 합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남과 북에 평화가 정착되고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그 날을 위해 평창 올림픽이 그 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라면, 예수님의 소원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 

2주전에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악한 세력은 사단, 예루살렘 성전종교 지도자들, 회당 중심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대제국 로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세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길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지키다도 중요하지만, 왜 지키는가? 무엇을 위해 지키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Keep from 도 중요하지만 Keep for도 중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영어공부 한번 하면 좋겠는데요. 목적을 나타내는 so that may  구문을 찾아봅시다. 

 

1. 하나됨 (11절)

이건 우리가 지난 2주간 계속 다루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로 연합해 계시듯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자들, 즉 사단을 비롯한 그의 하위 권세자들은 위협과 유혹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제자들의 내면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하나됨을 훼손할 겁니다. 

 

- 철저히 유린된 교회의 하나됨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의 유혹에 철저히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분열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네트웍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와 이단의 발흥으로 분열합니다. 로마교회는 교리 문제와 교황권 싸움으로 동로마교회와 서로마교회로 분열됩니다. 유럽대륙의 카톨릭교회는 구교와 개신교로 나뉩니다. 

 

- 예수님의 기도는 능력이 없다? 

교인들은 하나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예수님의 기도의 한계와 허약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신 걸까요?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일까요?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리고 그 기도가 AD80년 중후반 요한의 글에서, 요한의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함께 드려졌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됨은 현실에서 완전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적으로 기도하신 겁니다. 그분의 기도는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퍼집니다. 하나됨을 해치려는 수많은 세력들과 욕망들 앞에서 온몸으로 막고 계십니다. 우주적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기 위한 그분의 기도와 수고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한 공동체 

저는 진실한 공동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가장 큰 적은 가식, 부정직, 외식, 겉과 속이 다름입니다. 마피아게임은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로간의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재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게 하다보면 인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낳습니다. 건전한 게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딕싯입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과 느낌을 알도록 기획된 보드게임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게임에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나눔과 정직한 반응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수적입니다. 세상은 속이고 반전으로 놀래키고 배반으로 돈을 벌지만, 즉 일종의 투자와 사기사이의 애매한 길을 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 하나됨을 위해_삼위일체 신학, 용서, 그리고 경청과 공감

이렇게 진실되어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위한 신학 내지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서로 안에 있음을 이해한 삼위일체 신학과 묵상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묵상의 많은 부분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 원리가 기독인의 영성의 근본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시가 매일 있으면 있을 수록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행해야 하는지 결단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가장 큰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구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용서를 실행할 용기를 내면 참 좋습니다. 과거 학생 수련회 때마다 용서의 밤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지난 학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약간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 나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용서를 서로 구하고 서로 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공감하며 경청하기는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사회입니다. 경청과 공감은 콘서트에서나 있는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습니다. 김제동의 톡투유 같은 프로그램에서나 경청과 공감듣기가 작동합니다. 기독 공동체에서 일어나야 할일이 교회 밖에서 기획되어 대중화됩니다. 

 

=> 도전! 진실한 하나된 공동체

평생에 걸쳐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진실하며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는 겁니다.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크고 작든 그런 공동체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보는 게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우리 크리스찬들의 자세일 겁니다. 

 

2. 기쁨(13절)

무엇을 위해 지켜달라고 기도하시는가? 두번째는 기쁨입니다. 13절에도 so that may 구문이 등장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이 구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도 이 문장은 매우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세상에 머물게 될 제자들을 지켜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립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 공동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13절이 정말 뜬금 없습니다. 갑자기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한번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답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 고민을 나누는 겁니다. 

 

-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기도의 목적은 제자들의 기쁨(13절)

13장에서 17장까지가 고별설교및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바로 제자들의 기쁨입니다.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유혹과 핍박이 찾아옵니다. 이 유혹과 핍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내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로 단절되었을 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천국을 보화와 같이 간직하며 동시에 이 세상에 누룩을 가져오는 신앙,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더 크다고 확신하는 신앙, 우리를 세상 한복판에서도 악으로부터 구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앙이 더 큰 신앙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회의 분열에 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시는 두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제자들의 마음 속 기쁨입니다. 단순히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스마일이 아닙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 제자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은 쥐어짜내어 헌신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의지의 남은 하나까지 쥐어짜내어 인상을 찌푸리며 종교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최근에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배수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 빨래를 했는데, 청바지를 빨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손빨래를 했는데요. 있는 힘을 다해 청바지를 비틀었습니다. 청바지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안쓰던 근육도 울부짖었습니다. 

 

이렇게 쥐어짜내는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 나온 분들로 족합니다. 모든 근육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건 그들이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기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할 때, 우리는 내면의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근심이 가득해도, 핍박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 기쁨의 근원

이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연합안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이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위의 말씀에서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독보적으로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성한 기쁨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부담이 아니라 억지가 아니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요 자발적이요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되자 

유명한 기독교 희락주의자가 한분 계십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그분을 만족해할 때,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으신다고 역설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문장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분의 존재가 기쁘십니까? 그분의 존재로 만족합니까? 그분이 하신 일로 기쁨이 있습니까? 그분이 하신 일에 만족하십니까? 감정고양으로 흥분되는 상태말고요. 주변 교인들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는 거 말고요. 교회 봉사나 구제로 인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거 말고요. 정말 삼위 하나님이 기쁘십니까? 삼위 하나님이 만족스러우신가요? 

 

우리가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행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신앙의 여행은 수많은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여행의 특징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우고 흐릿하게 합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분이 기쁩니까? 그분으로 만족합니까? 

 

3. 진리로 거룩(17-19절)  

이제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됨과 기쁨을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거룩입니다. 사단을 필두로 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상태가 어쩌면 거룩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존재의 규정만으로 거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거룩의 실제가 무엇이며, 그 실제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 거룩의 실재_보냄받는 일상(18절)

거룩의 실제는 분명합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고상한 삶의 방식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산과 시내를 벗삼아 조용히 기도의 집중하는 삶이 거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룩의 실제 모습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아이를 돌보는 아빠와 엄마, 설겆이를 하는 순간, 화장실 청소 하는 순간, 밀린 빨래를 하는 순간, 출근해서 그날 해야 할 업무 리스트를 점검하는 순간, 회사 직원 회식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는 순간,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회의를 하는 순간, 올림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순간.... 모든 일상의 순간이 거룩의 실제를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모든 일상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속에 있듯이 지내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모든 일상이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미의 공간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의 실재입니다. 

 

- 진리로 거룩하게(17절)

그럼 어떻게 일상에서 거룩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겁니다. 위엄있는 척 하는 모습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해 보이는 옷과 신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 기도를 오랫동안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성경의 용어를 사용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해지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다(17절)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먼저는 구약 성경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고 외우시고 연구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 전체일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다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장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스러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맞습니다.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격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잠잠히 거하는 것, 순전히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진리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30살 때까지 목수의 아들로 잔뼈와 잔근육이 발달했던 그분을 따라 사는 겁니다. 종교권력과 맞서 예루살렘 이방인의 뜰에 펼쳐져 있던 장사 테이블을 뒤엎었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환대하시고 힘있고 신학적으로 갑질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욕설을 베푸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던 것처럼 사회적 계급을 무시하고 의전을 무시하고 약자를 섬기는 삶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손을 올려 주님을 외치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거룩의 기역자도 쓸 수 없습니다. 

 

-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나눠질 때, 거룩함에 이른다. 

 

“너희가 성경은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 5:39절)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Transformed by the Holy Scripture. 이게 되어야 합니다. 과연 말씀으로 변화되고 말씀때문에 내 삶에 새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나요? 말씀 때문에 던져진 인생의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나요?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나눠져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4. 나가며 

몇 주간의 걸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과 연합 안에 있다는 개념에 집중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기도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으로 그분이 무엇을 목적으로 기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 하나됨(one), 기쁨(joy), 거룩(holy)

맞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을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일 겁니다. 하나됨을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과 영성에 깊이 천착해야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청과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 목적은 제자들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를 그토록 바라셨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의 일상속 세상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길 목적으로 삼습니다.  

 

-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분의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AD30년에 드려졌던 그 기도는 초대 교회에 면면이 흘러 지속적으로 드려지다가 AD85년 어간 요한의 공동체가 함께 드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도 좋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좋습니다.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따라 적용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2018. 1. 13. 

 

0. 들어가며_마지막 설교와 기도

1) 가룻유다의 배반 이후 남은 11제자(13장)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이제 바로 내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월절 식사를 나눕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룻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만, 가룻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반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식사 자리를 떠납니다. 이제 11명의 제자들만 남습니다. 

 

2) 마지막 설교(13-16장)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이 내용들은 정말 중요한데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필적할 만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다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힘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원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실행방법 혹은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아닙니까? 머리로 아는 원리만으로는 구체적인 실행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에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실천동력. 내적파워. 추진력이 바로 요한복음의 설교에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꼼꼼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마지막 기도 

오늘은 마지막 설교 이후에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도회를 혹시 인도해보신 적이 있나요? 

대부분의 기도회는 설교의 메시지를 기도제목으로 삼아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하는 첫번째 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먼저 13-16장에서 좀 길다 싶이 설교를 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게 17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17장을 정말 사랑합니다. 오늘 송죽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본문으로 설교하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가장 사랑합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기도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주기도문(마6)을 가르쳐주셨죠. 그런데 이건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이고요. 직접하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을 보면서 화를 내시면서 저주하시다가 드리신 기도입니다. 

게세마네 기도는 유명하죠. ‘이 잔을 옮겨주세요.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해주세요.’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도 유명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체로 짧은 기도문들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은 그 길이 부터가 남다릅니다. 26절에 걸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도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절한 감정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17장을 함께 읽던 한 자매가 그러더군요. 기도가 슬퍼요~~ 맞습니다. 슬픈 감정도 녹아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사별 이후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저는 이 기도문을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개가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한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확장성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삼위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됩니다. 복음이 확장됩니다. 이 세 가지 확장성에 대해서 오늘 나누고 싶습니다. 

 

1. 기도의 확장성(20절) 

1) 11제자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로(20절)

첫째, 기도의 확장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 제가 상황을 설명해드렸습니다. 11명의 제자들과 식사를 마치시고 3장에 걸쳐 설교를 하신 뒤에 제자들 앞에서 대표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어리둥절 했을 겁니다.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주로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9절을 읽어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17절에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맞습니다. 이 기도는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20절에 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11명의 제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이 11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수많은 2세대 제자, 3세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 3천명 5천명이 회심하던 예루살렘 교회도 포함됩니다. 1세기 가장 뜨거웠던 선교적 공동체였던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포합됩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스케일입니다. 

 

2) 나에게서 우리로, 우리에서 너희로, 그리고 세상으로

우리의 기도는 주로 나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의 평안, 내일 있을 시험, 자격증 시험, 고시, 직장 면접,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 친구랑 잘되게 해주세요. 아이폰 8을 사게 돈 좀 주세요. 등등... 대체로 이런 기도일 겁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고 자유함을 얻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기본중의 기본일 겁니다. 

 

그러나 나를 너머 이제 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11명의 제자만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를 너머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우리를 너머 이제는 너희까지 나아갸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제의 너희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겠다는 말은 더이상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기도의 대상이 그렇게 확장됩니다. 세상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소리질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가장 순수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기도, 이것이 가장 기도다운 기도인 겁니다. 

 

2. 하나됨의 확장성(21-23절)

둘째, 하나됨의 확장성이 도드라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7장 전체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1) 삼위일체의 신비 

21절에 보니 삼위일체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trinity의 신비는 이렇게 성경에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서로 깊이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서로의 말을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서로 포함시키기

그런데 이 하나됨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있게 헤 달라는 충격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온갖 형용사, 감탄사를 써 가며 입을 턱하고 벌릴 겁니다. 

헐, 헉, 오마이 갓, 대박, 미쳤어, 깜놀.... 우리 라면 이런 단어를 썼겠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개념은 구약에 흔하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쉽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의 소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가장 진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소원을 안다면 우리는 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놀랍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떤 상태가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요? 뫼비우스 띠처럼, 내가 너안에 있고 너가 내안에 있고 막 엮여 있다는 말인가요? 서로 안에 있으려면 형식 논리적으로는 동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육체가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이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 입니다. 

 

다음 주까지 고민해서 서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하나됨과 삼위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인지, 어떻게 실현가능하지는 기도하면서 차차 알게 될 일입니다. 지레 겁먹고 회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입니다. 

 

3. 복음의 확장성(21절, 23절)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의 확장성이 분출되어 있습니다. 기도 대상의 확장, 하나됨의 확장은 결국 복음의 확장을 낳습니다. 

 

1)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심을 믿도록(21절) 

하나되어 하나님과 연합된 제자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이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 놀라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파송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들 사이에 사신 겁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신인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사단도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올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실을 믿는 것은 오직 한가지를 통해 가능합니다. 이 기쁜 소식, 믿기 힘든 복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입니다. 단순히 서로 하나되는 동호회나 해병전우회 같은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걸통해 복음이 확장됩니다. 


2)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심 같이 세상을 사랑하셨음을 알도록(23절) 

23절에 보면 더욱 놀라운 복음의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제자들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연합이 확장되어 제자 공동체까지 이어진 이 사실을 결국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거부하거나 아님 그 공동체로 들어오고자 안달이 날 겁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탐욕에 의한 교회 분열입니다. 

캠퍼스에서 18년간 캠퍼스 선교사로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기성교회들이 보여온 탐욕과 무절제와 비상식과 분열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교회와 기독공동체들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고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그분의 소원이 이 곳 한국 땅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잘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4. 나가며_나를 넘어서자(확장성)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확장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 우리와 너희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기도 대상의 확장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셨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를 드릴 차례입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될 때, 세상이 놀라게 될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바뀌어야 하니다.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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