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1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6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7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NIV

Instead, we were like young children among you. Just as a nursing mother cares for her children(7절),

 

주석

고난과 모욕(2절) 바울과 그의 동료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기 직전에 빌립보에서 능욕을 당했다. 그들은 공판도 받지 못한 채 공개적으로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았다(행 16:22-23)(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2절).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불순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3-4절). 바울은 사람의 환심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6-9절).

 

바울은 복음을 대하는 정직한 자세와 교인들을 향한 인격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증인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사람의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바울의 자기 고백이 눈에 들어온다. 

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과 진심을 알아 주길 바랬다. 

그것이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사이의 신뢰요 존경이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과 진심을 알 길이 없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음흉할 수도 있고, 간계를 꾸밀 수도 있고, 아예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진심을 자꾸 표현해야 한다. 

거짓으로 속이지 말고,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지 말고,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말해야 한다. 

그게 나와 남을 위하는 길이다. 

옹색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회 생활이라는 것, 소통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영성적으로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영성적으로는 많은 말은 자칫 자신과 남을 속이는 행위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인간의 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미지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침묵기도가 중요한 이유다. 

자기 표현이 자칫 생각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글도 그럴 수 있다. 

싸질러 놓다는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의 본능적 감정과 피상적 생각이 막 던져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 이면의 생각과 본질을 찾으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4절)은 사람이 던지는 말과 글로만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그 마음의 열정과 진심을 보신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람들과 같이 사역을 해야 하는 사역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영성적으로만 지낼 수 없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나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좋다. 

 

그 이상이 있다. 

이런 정직함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가? 

아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의 요소이겠으나, 인간은 미묘하고 복잡한지라, 표현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고 주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이용한다. 

그래서 말이 많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사람들 중에, 그 표현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이목에 중독되고 그 인기에 함몰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작한 일도 어느새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른다.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초심을 지키는 사역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바울도 많은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파들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기쁘시게 해야 했다. 

인기가 많아질 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과 인기 상승에 대한 경계… 이 둘 사이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 권위가 아니라 유순함으로

바울은 충분히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헌신, 그의 개척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올랐다. 

교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그 권위에 맞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대하듯, 유순한 사랑의 말로 성도들을 대했다. 

명령할 수 있었지만 부탁을 했고, 강권할 수 있었지만 설명과 설득을 했다. 

물론 그의 편지 곳곳을 살펴보면 때로 엄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에도 그런 강경함이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해 유순하게 듣고 말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생명조차 내 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사랑이면 거의 예수님의 사랑이다.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성도들이 매우 사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1장에서 드러난 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닮아가고 있었다. 

예수님을 당연히 주님으로 모시고 본받았지만, 그 구체적으로는 바울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울 입장에서는 그 성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고난 속에서도,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그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나온다. 

권위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 

온순함으로 대해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권위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위를 뛰어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를 온유하게 대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다면, 그는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성도들이 성장해서 어떤한 환란과 핍박에도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역자들의 소망이요 꿈이다. 

그 소망과 꿈이 현실에서 이뤄질 때, 사역자는 자신의 생명 만큼이나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사랑이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가르치는 자는 꿈을 꾸고, 배우는 자는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면, 사랑은 더욱 커진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면, 이젠 가족만큼이나 사랑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누가 뺏어 가겠는가!!

 

[오늘의 기도]

예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는지 생각합니다. 

 

작고 적은 존재지만, 저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의 인기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저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많아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주님을 따라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0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25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27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28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30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31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아십니다.

32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리가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33 교우들이 나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의 창문으로 내려 주어서, 나는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주석

29절 바울이 자신을 ‘약한 자들’과 동일시한 것은, 그러한 것을 비천한 신분의 상징으로 본 사회적으로 강력한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못마땅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은 그의 대적들의 입장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합니다. 바울 또한 거짓 교사들과 같이 히브리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22절). 그리고 그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약해질 때, 함께 약해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습니다(23-30절).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은 바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십니다(31절).

 

바울은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의 약점들을 늘어놓습니다. 수고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은 모두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일꾼임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수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이런 이야기까지 자신의 입으로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바울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이라고 쓰고 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스스로 말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잘 알려줘야 한다. 

바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시간들을 견디고 버티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려줘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은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들을 버티는 사람들이다. 

감옥살이, 돌에 맞음, 채찍에 맞음, 파선당함, 표류…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사단이 바울을 어떡해서든 막아서려고 한다. 

그의 선교가 미치는 영향이 너무 막대해서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마다 살아난다.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 

선교 여행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위협을 당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족의 위험이다. 

같은 민족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당한다. 

좌절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해받고 사랑받고 적극적으로 후원받으면서 해도 할까말까하는 일들이다. 

이 일을 이렇게 감당하는 것만으로 대단하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을 넘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삶은 아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이 그러했다. 

선교사님들의 삶은 항상 위험 속에 놓여 있다. 

적대적인 국가에서의 선교는 더욱 그렇다.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사로 사는 것, 중국에서 복음전도자로 사는 것… 항상 위험을 안고 산다. 

어느 나라에서는 소리없는 찬송을 합창하기도 한단다. 

모임 시간 두 시간 전부터 2명씩 건물에 입장해야 한단다. 

감시가 심하고 걸리면 추방이 일상이다. 

입국심사때부터 공안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이기에 그 일을 감당한다. 

각자마다 자신의 부르심 속에서 고난을 당하기 마련이라지만, 바울의 삶을 생각할 때, 내가 당하는 고난은 고난 축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고난, 물리적인 고난을 당하고 있다. 

1세기에 이렇게 자주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야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난을 받지만,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받는다. 

그렇다고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를 생각하며 밤낮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 대한 염려가 크다.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가 크게 다가온다. 

전광훈이라는 자가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더럽히고 있다. 

언제나 정치목사가 있어왔지만, 이렇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조찬기도회 나가는 정도가 대부분이었지만, 전광훈은 하나님도 우숩게 여긴는 작자다. 

총회때 권총을 들고 설쳤었다. 

빤스내리라는 말에 순종해야 자기 성도란다. 

정치개입은 기본이고, 공당의 공천권이 자신에게 있는 모양으로 말한다. 

걱정이다. 염려가 크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의 이런 노력에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바울을 인정했을지는 미지수다. 

어떤 사람들은 설득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바울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은 요구하는 것도 많다고 그러는데..’ 등등

‘이런 고난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다’ 등등

주장이 강하면 비판도 강하게 돌아오는 편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끝까지 진실을 말한다. 

고난 당한 것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난다면, 굳이 숨길 일이 아니다. 

약점 속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더욱 약점을 드러낼 일이다. 

 

정직하게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말자. 

오늘의 다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약점과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여전히 약점을 안고 삽니다. 

육체의 통증이 의지를 약화시킵니다. 

피곤함이 생활 리듬을 깨뜨리고, 깨진 리듬이 피곤을 더합니다. 

악순환이 돌아갑니다. 

 

주님, 

더욱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고, 

피곤함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살고 싶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해 도전하고 싶습니다. 

몸의 피곤을 감하시고, 의욕과 의지를 더하소서. 

일상을 잘 관리할 수 있게 하소서. 

조금만 관리가 느슨해져도 이제는 몸이 아파지는 나이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벗꽃이 다지기 전에 꽃향기를 맡으러 나가야 하듯이, 

안따까운 젊음과 생명이 다지기 전에 사랑의 향을 더욱 진하게 더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6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9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13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14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두고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NIV

Thanks be to God for his indescribable gift!(15절)

 

주석

12절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사람들은 주후 46년경에 시작된 팔레스타인 기근의 여파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여파가 얼마나 멀리 미쳤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금을 모으는 일은 매우 궁핍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요점을 한 번 더 강조하며 정리합니다.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7절). 이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 온갖 넘치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을 통해 구제받는 이들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8-15절).

 

하나님은 가장 선한 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도우시며, 이로 말미암아 넘치는 은혜를 모두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구제의 대상은 극심한 기근을 겪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봉사는 이방인에게도 화해의 직분과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됐습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메마른 곳은 어디인가요? 그곳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화해와 생명을 증언합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이 요점을 명확히 밝혀 주니 참 고맙다. 

바울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제 헌금을 많이 하라.

다른 하나는 각자 정한대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

기근 속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돈을 모금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부유한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의 부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부를 한 곳으로 모은다. 

사람들의 기호가 부의 이동을 부른다. 

사람들의 기호는 사회적 현상이며, 때로는 조작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인정과 기호를 통해 상품이 판매되고 돈이 움직인다. 

연예인이든, 대기업이든 자신들의 부는 어찌보면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니 사회적 인정과 사랑이 그들의 부가 되는 것이다. 

출발점도 다 다르다.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물론 환경이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 

어쨌든 부는 사회적 산물이다. 

부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이 유지, 관리, 혁신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부를 나누는 행위는 사회 시스템의 유지, 관리, 혁신에 도움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으로는 현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매정하고 냉혹한 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물며 일반 사회도 이렇게 복지를 위해 애를 쓰는데, 하나님 나라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더욱 힘을 다해 나눔을 권면하고 있다. 

많이 내는 사람들을 통해, 그 헌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누린다. 

사회적 부가 공유된다.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재정적 서포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억지로 무리해서 내서는 안된다. 

기쁘게 낼 수 있을 정도로 내는 것이 합당하다. 

억지로 기쁨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구제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이 봉사의 일은 사람들의 궁핍함과 핍절함을 돕는데 크게 사용된다. 

동시에 이 봉사가 하나님께 감사가 되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교회가 최선을 다할 때,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일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관심이 많으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다. 

 

억압받아 고통 속에 있으면 자연스레 가난해 진다. 

재물을 축적하기가 어려워진다. 

정부의 압박은 시장에서 퇴출될 정도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억압받는 사람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그래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친일파들이 축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존심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에 끌렸던 사람들이다. 

일본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권력가의 편을 드니 재물이 모인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재산을 잃는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출하기를 원하신다. 

억울한 사람들이 억울함을 풀기를 원하신다. 

갇힌 사람들이 다시 풀려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자유로이 사람 살 만한 공간을 창출하기 원하신다. 

이 일을 위해 돈을 쓰고,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시선이 머문다. 

좀 과장하면,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억울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가장 오래 가장 밀도있게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자신이 가진 돈을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는 최상의 방법이다. 

성경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성경공부는 자연스레 삶으로 이어져야 하며, 성경공부가 지향하는 삶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동식사다.  

 

** 목회데이터연구소, Numbers 183.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단어가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보육원을 졸업하고 자립준비하는 청년들 중에 50%가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얼까 다시 고민해 본다. 

우리 교회 바로 옆이 “송죽원”인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기도]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어 주시는 주님, 

억압받는 백성들 곁에 계셔 주시는 주님, 

주님을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하길 원합니다. 

내면 속에서, 기도 속에서 만나는 주님도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상한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더욱 기쁘고 감사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상처입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깊이 파였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믿기지 않습니다. 

주님, 고통받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셔서 위로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4. 4. 

 

[본문_요한복음 19:17-24_새번역]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 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였으나, 22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짠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0. 들어가며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너무 중요하고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부활절이야 말로 모두가 기뻐할 최고의 날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한은 부활보다 앞서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왕의 대관식이 일어났다는 관점을 알려주고 있죠. 어떻게 이런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이것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명패와 왕의 대관식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지중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매년 유월절이라는 민족 대명절을 맞아 순례길에 오르는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함께 이 거대한 종교 축제를 경험하러 찾아왔습니다. 변방에 작은 마을이 순식간에 세계인의 melting pot(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습니다만 그래도 공용어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식언어인 라틴어, 지중해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혤라어,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를 공통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셔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와 기소에 대해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마지막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십자가형에 앞서 죄명을 쓴 죄패 혹은 명패를 붙입니다. 왜 사형시키는지 백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인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썼나요?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습니다. 지도자들은 못마땅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그는 예수님의 범상치 않은 면모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민중들이 예수님의 그간의 행적을 잘 알고 그를 메시야 즉 유대이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전 세계인 앞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왕의 대관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2. 수치와 영광 

요한은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광이라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과 환호 속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성대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전혀 다른 방식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31-32)

 

십자가를 두고 예수님은 영광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요한은 십자가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패/명패를 씀으로써 전세계인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드러냈다고 해석했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는 겁니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 되었습니다. 벌거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참혹한 순간이 가장 영광스런 왕의 대관식이 된 것입니다. 수치는 여기서 영광이 됩니다. 금관과 곤룡포의 영광이 아닙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최고의 영광이 된 겁니다. 

 

3. 새로운 관점_수치 속에서 영광을 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사의 어느 순간에나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우주인급의 실력으로 미친 승리를 이끌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칭찬과 환호를 보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며 뜻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도 있겠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을 겁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패배의 영광도 있습니다. 닉부이치치의 삶이 그랬습니다.  '해표지증'이라는 유전질환으로 짧은 왼쪽 발을 제외하고는 양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없는 그는 친구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 어렸을 때는 자살도 시도했었죠. 그러나 그는 결국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호주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수치스런 순간이 없지 않았습니다. 남과 다른 자기를 보는 것이 부끄러웠겠죠.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치는 이제 영광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평화가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4. 나가며_삶을 재해석하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한 가지 방식/양식으로 제한된다고 생각을 가두지 맙시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다시 해석할 틀이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의 고통은 평생 따라다닙니다. 학폭의 기억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그 자체의 고통과 아픔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치스럽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죠.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수치 속에서 가장 큰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슬픈 추억과 기억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 속에서 다시 새롭게 조명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의 주인공 라일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쁨이’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슬픔이’가 필요했죠.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수치의 영광을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그 빛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재해석합시다. 부활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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