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15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0 사람이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살며, 고통과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11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고통을 주셔서 그들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비틀거려도 돕는 사람이 없었다.

13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그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14 어둡고 캄캄한 데서 건져 주시고, 그들을 얽어 맨 사슬을 끊어 주셨다.15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16 주님께서 놋대문을 부수시고, 쇠빗장을 깨뜨리셨기 때문이다.

 

17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받아18 밥맛까지 잃었으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19 그 때에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다.20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구렁에서 끌어내어 주셨다.21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22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주님이 이루신 일을 즐거운 노래로 널리 퍼뜨려라.

 

ESV

Some sat in darkness and in the shadow of death, prisoners in affliction and in irons, for they had rebelled against the words of God, and spurned the counsel of the Most High(10-11절).

 

주석

고통과 쇠사슬에 묶임(10절) 이 시를 바벨론 포로 귀환과 연결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IVP 성경주석).

 

인자하심(15절) 이 개념은 성경에서 여러 용어로 표현되었다. 구약의 주요 용어는 헤세드로, 이는 친절이나 은혜를 의미하며, 그의 백성을 자비롭게 대하도록 되어 있는 은혜로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킨다(IVP 성경사전).

 

시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어두운 과거를 언급합니다(10-11절).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17-19절).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덕분에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13-16절). 시인은 이러한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사람 모두에게 주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21-22절).

 

이스라엘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격으로 포로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렇기에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까요? 감사의 마음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부르짖는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도와 줄 사람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대상은 사람이나 귀신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인자하심이 영원하며 자비로우심이 위대하다. 

그분은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로 인해 멸망했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 

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내 주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도록 인도하신다. 

 

피곤이 고난이 되는 경우는 그 피곤으로 인해 몸이 점점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 때다. 

자기 몸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일들의 중대성, 의무감 등으로 멈출 수 없을 때, 고통스럽다. 

노동이 고난이 된다.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의 삶이 그러했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최근 몸이 고되다는 것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배워야 하고, 소통을 증진시켜야 하고,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고, 읽어야 하고, 만나야 하고, 그리고 기획해야 한다. 

나이 들면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바뀌고, 인구 구조가 바뀌니 과거에 내가 봐 왔던 어른들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난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일들에 매달리고 있다. 

아이는 어리고, 가정은 여전히 챙겨야 할 것이 많다. 

쉬고 싶지만, 쉴 수 없는 환경… 

사실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라이프 스타일 혹은 성격일 수 있다. 

성격상 조용히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환경이다. 

조용히 기도하고 싶고, 조용히 하나님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이게 점점 어려워진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든다. 

그나마 이렇게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시간이 나를 잡아준다. 

고난 같지 않은 이 일상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나의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조용히 글을 적지만, 마음은 불이다. 

 

책임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분의 은혜가 절실하다. 

인자하심이 크신 그분의 도움이 절실하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로 노래를 부르라고 요청한다. 

22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주님이 이루신 일을 즐거운 노래로 널리 퍼뜨려라.

주님이 하신 일들을 노래로 표현하고 그 노래를 널리 퍼뜨리는 것.

그래서 시인도 이런 시들을 많이 쓰고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주님이 하신 구원의 역사를 즐겁고 기쁜 노래로 부르는 것은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다. 

뒤늦게 찬양사역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찬양이 즐겁고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싶은 열망이 크다. 

하나님의 역사를 즐거운 찬양으로 부르고 다같이 기도하는 광경이 참 좋다. 

 

부르짖음과 노래가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예배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과 심사가 쏟아져 나오는 곳,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를 상기하고 기념하는 곳, 

그곳이 예배다. 

제발 그 예배가 더욱 치열하고 아름답게 드려지길 고대한다. 

솔직한 마음들이 쏟아지고, 그 마음 위에 하나님의 역사가 뒤덮는다면, 

인간은 살 용기를 얻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의지를 다진다. 

 

주일의 예배든, 일상의 예배든 상관없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심사+하나님의 구원 역사… 이 둘이 만나는 곳… 

그 예배를 지금 드린다. 

 

 

[오늘의 기도]

사람의 모든 감정과 마음의 일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 

지금 이 순간 피곤함을 잠시 뒤에 두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 마음을 아십니다. 

연약함을 아십니다. 

다시 시작할 힘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그 놀랍고 신기한 일들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을 바꾸시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던 일들을 기억합니다. 

주님 그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게 하소서. 

선명하다 못해 깊은 찬양으로 터져나오게 하소서. 

저의 일상을 구원하소서. 

수 많은 일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지켜나가게 하소서. 

그 모든 중요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16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일러라.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하고 말하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내가 너희의 처지를 생각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는 일을 똑똑히 보았으니,

17 이집트에서 고난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하여라.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19 그러나 내가 이집트의 왕을 강한 손으로 치지 않는 동안에는, 그가 너희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수 온갖 이적으로 이집트를 치겠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21 나는 이집트 사람이 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여, 너희가 떠날 때에 빈 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겠다.

22 여인들은 각각, 이웃에 살거나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이집트 여인들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달라고 하여, 그것으로 너희 아들딸들을 치장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이집트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갈 것이다."

 

주석

나는 곧 나다(14절) 히브리어 신명 ‘여호와’는 14절의 구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나는 미래의 나다’(I will be who will be),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as). 이 구문의 축약된 형태가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선언에 등장한다(IVP 성경주석).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누구라고 소개할지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곧 나’이고,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이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도록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13-15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집트 왕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려주십니다(16-18절).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신 후,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백성은 주인처럼 재물을 요구하며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19-22절).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 자신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어떤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규정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이 부를 수 있는 이름(‘여호와’)을 주시는 분입니다(14-15절).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옵니까? 나는 하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이름은 너무도 중요하다.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성격을 규정하곤 한다. 

본성을 보고 이름을 짓기도 하고, 이름이 그 존재의 본성이 되기도 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이름, 누구가가 불러주는 이름. 

그 이름에 본질이 담긴다. 

 

하나님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 분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하나의 명사로 그분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름이 주는 장점과 단점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원래부터 당신의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나다”라는 이름은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의미를 확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지는 않다. 

나는 다른 것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하나님 자신의 자부심이 들어 있다. 

주석에도 등장하듯이 히브리어의 뜻을 영어로 더 풀어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추가될 수 있겠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 다른 피조물로 규정될 수 없는 존재, 현실 세계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존재…

이런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이집트의 그 어떤 신과도 다르다. 

대부분의 신이 위대한 자연물과 동물들을 형상으로 이뤄진 반면,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대상이 없다. 

그러기에 그분은 “나는 나다”이다. 

 

하지만, 그분이 이제까지 했던 일 중에서 꼭 드러냈으면 하는 측면이 있다. 

그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계를 맺고, 약속을 걸었던 지극히 역사적인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사물과 개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거부했지만,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고 관계 맺었던 사람들의 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으셨다. 

관계 맺고 언약을 맺어 사람들을 이끌고 역사를 끌고 오신 분이시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새로운 히브리 민족의 나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15절)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셨다.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던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노력하신다. 

그 약속이 인류의 역사를 만들고 바꾼다. 

그 역사 속 하나님이 이제 다시 전면에 등장하신다. 

모세를 통해 히브리 사람들과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원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모세, 여호수아, 다윗, 예레미야의 하나님이시며,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 맺고 그분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표현하시기 좋아하신다. 

급기야는 자신이 인간 예수가 되어, 그 예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포하셨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그 놀라운 사실을 전세계에 전하라고 하신다.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히브리 민족에게 당신이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했다면, 지금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당신은 “예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라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신다. 

하나님이 궁금하다면, 예수님을 봐야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궁금했던 히브리 민족에게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조상들의 신이라고 소개하신 것처럼, 지금 하나님은 자신이 예수님의 하나님, 더 나아가 예수님 그 자신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이 더 많이 축적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 맺었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과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하나님은 여전히 한 두 단어로 규정될 수 없다. 

성경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로 그분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성경의 이야기와 역사가 너무 중요하다. 

 

오늘도 인류 구원의 길을 만드신 그분을 성경에서 만난다. 

숱한 믿음의 선배들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감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당신은 믿음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과 함께 역사를 만드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 이제 저에게도 찾아오셔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 주소서. 

거창하건 사소하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당신과 함께 에피소드를 만들게 하소서. 

단순한 말의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에 대한 이야기며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게 하소서. 

작고 사소해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과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하소서. 

그렇게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저의 이야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09월 2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14그런 다음에, 왕은 얼굴을 돌려 거기에 서 있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둘러 보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15그는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친히 말씀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6'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내 이름을 기릴 집을 지으려고,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어느 성읍을 택한 일이 없다. 다만, 다윗을 택하여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17내 아버지 다윗께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고 생각하셨으나,

18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품은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19그런데 그 집을 지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날 네 아들이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20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렇게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이 성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21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궤를 놓아 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는 가족이 별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특히 그 자녀의 직업 선택권이 제약되는 것은 최악이라고 보았다. 

자녀는 각각의 고유한 주체로서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최근 대를 이어 맛있는 빵을 만드는 가게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자녀가 대를 이어 부모의 전통을 물려받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정말 보기 좋았다. 

부모도 자녀도 행복해 보였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에서 그동안 주목했던 부분은, 그들이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들은 훌륭한 일을 해냈다. 

왕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업적과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구원자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약점으로 인해 왕국이 위협을 받았다. 

그러기에 강점은 강점대로 인정하지만, 약점을 배제하지 않는 오히려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약점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을 묵상자의 책임으로 알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오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이어져서 결국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대를 이어 부모의 약속을 자신의 약속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아버지의 소원을 아들의 소원으로 삼았다. 

 

20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렇게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이 성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어 충실하게 가족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뤄내는 모습이 귀해 보인다. 

우리 가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고민해본다. 

명절 직후라 그런지 더욱 가족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삶을 기대하고 계시는가? 

나는 과연 남편과 아빠로서 우리 가족의 소명을 어떻게 성취하고 있는가?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가족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대를 이어 전수하고 전수받는 전통과 정신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다. 

이것이 대를 이어 잘 전달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신간훈의 훈련 담당자로 섬기고 있다. 

신입간사들이 우리의 가치와 전통과 소명에 대해 더 깊이 각인하고 체화되도록 돕고 싶다. 

억지로 함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그 소명에 반응하고 기쁘게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21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궤를 놓아 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솔로몬이 기억하는 근원적 이야기는 출애굽이다. 

다윗에게 약속한 것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와 약속하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도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경제사를 위시로한 엘리트들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있고, 백성과 서민들의 소소로운 삶의 단편들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있다.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역사 공부의 목적이 드러난다. 

모든 역사를 알 수 없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다 기록한다고 한다면 수퍼컴퓨터가 수조개 있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개인의 역사까지 다 저장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역사를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일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맺어졌고,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둘째, 약속의 점진적 성취를 위해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어떤 역할들을 감당했는가? 

셋째, 그 약속의 성취가 가져온 현실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둘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때로는 기념하며 또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소망하는 태도… 

오늘도 그분의 약속을 기억한다.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어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사랑을 주시고 또한 약속도 주시니, 사랑받아 감사하고 소망을 품게 되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성품을 기대어, 주님의 약속을 강렬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시고,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날을 죽기전에 보고 싶습니다. 

 

제 주변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이런 하나님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함께 꿈꾸는 일들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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