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6솔로몬 왕은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사장께서는 상속받은 땅 아나돗으로 가시오. 제사장께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만,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주 하나님의 법궤를 메었고, 또 나의 아버지께서 고통을 받으실 때에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제사장을 죽이지는 않겠소."

27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주님의 제사장 직에서 파면하여 내쫓았다. 이렇게 하여서, 주님께서는 실로에 있는 엘리의 가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28이런 소문이 요압에게 들렸다. 비록 그는 압살롬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으므로,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았다.

29요압이 이렇게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피하여 있다는 사실이, 솔로몬 왕에게 전해지니, 솔로몬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면서 "가서, 그를 쳐죽여라!" 하였다.

30브나야가 주님의 장막에 들어가서, 그에게 말하였다. "어명이오. 바깥으로 나오시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못 나가겠소. 차라리 나는 여기에서 죽겠소." 브나야가 왕에게 돌아가서, 요압이 한 말을 전하니,

31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그를 쳐서 죽인 뒤에 묻어라. 그리하면 요압이 흘린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나와 나의 가문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이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33그들의 피는 영원히 요압과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왕실과 그의 왕좌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34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올라가서, 그를 쳐죽였다. 요압은 광야에 있는 그의 땅에 매장되었다.

35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삼고, 아비아달의 자리에는 사독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아비아달은 반역하였지만 제사장이며 다윗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솔로몬은 그를 죽이지 않고 파면하여 고향으로 보냅니다. 이로써 엘리 가문을 두고 하신 무명의 선지자의 말씀(삼상 2:27~36 참조)이 드디어 이루어집니다(26-27절). 또 다른 반역자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의로운 사람들을 죽인 것의 죄를 물어 죽임당합니다(28-34절). 솔로몬은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새롭게 임명합니다(35절).

 

솔로몬은 재빨리 반역자들에 대한 처분을 내립니다.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따라 요압을 처분하며, 다윗 왕실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 선언합니다(33절). 아비아달과 요압은 그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자들이 축출되고 있다. 

왕권은 솔로몬에게 있으며, 아도니야는 어리석게도 욕심을 부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다윗의 마지막 몸종이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요청하다가 솔로몬의 분노를 샀다. 

아도니야가 죽자 그의 라인이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도 징계를 받고 귀향을 가거나 죽임을 당한다. 

인간 세계의 권력은 대체로 무자비하다. 

혈연이라도 왕의 권력에 위배되는 자들은 숙청되기 마련이다. 

이런 현실이 갑자기 슬퍼진다. 

권력이 집중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성이 말살된다. 

최고 권력자에게 무한 권력이 주어지면 주변 사람들은 파리 목숨이다. 

왕의 심기에 의해 생명이 들고나간다.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거해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리는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용서와 회복과 포용과 환대가 있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왕정국가의 모순이 부각된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조금 나은 구석이 있긴 하다. 

율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간청은 나름 훌륭한 기도였다. 

지혜롭게 재판하고 판견하는 에피소드는 그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솔로몬 시대 당시의 다른 민족들의 왕국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의 기준에 못 미친다. 

솔로몬도 어쩔 수 없이 정적을 죄다 숙청한다. 

이유야 어떻든 왕권 강화를 위한 현실적 대처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국을 안정화시키며 자칫 다시 찾아 올지 모르는 반역과 내전을 미리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나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지하지만, 속은 쓰리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함과 온전함에 눈을 돌린다. 

 

 

32주님께서, 요압이 흘린 그 피를 그에게 돌리실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 다윗께서 모르시는 사이에, 자기보다 더 의롭고 나은 두 사람, 곧 넬의 아들인 이스라엘 군사령관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인 유다의 군사령관 아마사를, 칼로 죽인 사람이다.

 

솔로몬의 이런 평가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요압보다 아브넬과 아마사가 더 의로웠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거기서 거기다. 

요압, 아브넬, 아마사… 모두 공과가 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왕상 2:5-6절)을 받들어 요압에게 더욱 냉혹하다. 

제단 뿔을 잡아 도움을 요청함에도 솔로몬은 요압을 죽였다. 

요압이 과실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의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다윗의 편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했던 장군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럴바에야 전장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명예롭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결정한다. 

오랜시간 요압은 요압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사람들을 죽여왔다. 

아마도 다윗을 위한 일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는 있었겠지만, 내적 동기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요압이 자각했든 못했든 자신 안에 있는 정치적 욕망이 강하게 작동했다. 

그 결과는 불명예스런 죽음이었다. 

 

예수님이 그리셨던 하나님 나라와 비교, 대조해 본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은 그에 한참 못미친다. 

솔로몬의 왕권 강화는 어떻게 보면 최종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일어날 사단과의 전투에 비견될 수도 있겠다.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솔로몬이 만드는 왕국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더욱 그립다. 

그분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다시 꿈꾸게 된다. 

 

기독공동체는 이상을 꿈꾼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모두가 화목하고 용서하는 아름답고 순전한 공동체를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쪼잔한 문제로 싸우고, 감정이 상하고, 토라지고, 뒷담화하고, 욕하고 배신한다. 

그래서 이상을 꿈꾸지 말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한다. 그 현실을 항구로 두고 이상을 향해 노를 젓는다. 

아벱, 송청 모든 공간에 이상을 향한 추구가 끊이지 않길 소망한다. 

 

——

꿈을 주시는 하나님, 

현실은 무시무시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고, 암투가 있고, 살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꿈은 배려, 포용, 용서, 화해, 평화가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왕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보여준 용기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고 동료를 살해하고 혈연을 몰살시켰습니다. 

주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인간의 죄악과 잔혹함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꿈을 주시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주시고 그것을 위해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오늘도 분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 성령님의 은사로 채워주세요. 

힘과 지혜가 가득하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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