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0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 주었어야 마땅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저 우두머리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일일이 참고 견디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표징으로 삼아 사도가 된 표징을 행하였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여러분이 다른 교회들보다 못난 점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한 것이 불공평한 처사라고 하면,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4 지금 나는 이렇게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재산을 모아 두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재산을 모아 두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비용을 쓰겠고, 내 몸까지도 희생하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나를 덜 사랑하겠습니까?

16 어쨌든 나는 여러분에게 짐이 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간교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7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통해서 여러분을 착취한 일이 있습니까?

18 내가 디도에게 여러분에게로 가라고 권하였고, 또 그와 함께 형제 한 사람을 보냈는데, 디도가 여러분을 착취한 일이 있습니까? 디도와 내가 같은 정신으로 행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주석

14-15절 부유한 고린도인들은 바울의 후견인이 되기 원했다. 바울이 그들의 후원을 거절한 것은 사회적인 통념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실상은 그가 후견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바울을 의지해야 하는 자였기 때문이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을 인정해 주길 요청합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면 용서하라고 이야기합니다(11-13절). 그러나 바울은 앞으로도 그들에게 재정적으로 폐를 끼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모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계속 사랑하겠다고 말합니다(14-18절).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거짓 사도들의 간교한 속임수를 폭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착취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희생과 사랑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약자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간교한 속임수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불의를 폭로하시고, 세상을 그분의 방식으로 사로잡으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어리석은 사람 

바울은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물론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다. 

그러나 결국 그 결정은 바울이 했던 것이다. 

무엇을 하였기에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인가? 

그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랑을 한 것 때문이다. 

자신의 출신을 자랑하고,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자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다. 

이런 식의 말들은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런 바울의 말에 정이 떨어질 수 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정당화, 합리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 싫어질 수 있다. 

차라리 당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울의 자기 자랑과 자기 합리화에 실망할 수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선택을 했다.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행동이긴 하지만,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복음을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선택을 한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사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고, 후원받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이런 모습들을 선택한 것이다. 

자기가 어리석은 바보가 되더라도,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어찌보면 성육신을 한 것이다. 

부작용이 있고, 후폭풍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울은 이렇게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복음을 위해 바보가 되었다. 

그 결과가 생각했던대로 그대로 나왔기를 바란다. 

 

2. 재물이 아니라 여러분!! 

윤복희의 “여러분”이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나는나는나는 너의 기쁨이야"
마지막 소절의 가사는 멜로디와 어울려 절심함이 배가된다. 

친구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묻어난다. 

 

바울도 같은 마음이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성도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길 바란다. 

비용문제로 성도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선교 여행에는 언제나 돈이 들기 마련이다. 

숙식비와 교통비가 가장 많이 든다. 

그러나 돈 문제로 성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후원을 받고 안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성도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가고 싶었다. 

복음이 잘 전해지기만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잘 전달되기만을, 그리고 자신의 애정이 잘 수용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고린도교회 성도와 자신의 관계를 부모 자식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성도들을 깊이 품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자신의 자녀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내리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다. 

 

3. 성금요일 

오늘은 성금요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던지셨다. 

죽음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살리셨다. 

죽음의 권세를 쥐고 사람들을 위협하던 사단의 위력을 깨부수셨다. 

몸은 죽었으나 영은 승리했다. 

온 우주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고통의 끝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영광이 찾아온다. 

 

이런 십자가가 있었기에 바울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이 바울에게 이어진다. 

자기 희생이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어진다면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를 바보가 되게하고, 

사람들의 영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자신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는 내어주는 사랑이 있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그렇게 내어주는 사랑 끝에 자기 보상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대했던 반응이 오지 않을 때,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최선을 다해 희생하고 섬겼는데, 그 섬김에 대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때, 그걸 넘어 오히려 비판할 때, 극단적인 보상심리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사단의 계략이다. 

이걸 이겨야 한다. 

예수님은 그걸 이겼다. 

3년의 헌신에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비판했다. 

화낼만 했다. 

심판과 저주를 퍼부을 수 있었다. 

유대 지도자 뿐만일까? 

자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는 회계담당 제자인 유다는 자신을 은 30냥에 팔아버렸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했다. 

결국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까지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보상심리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육체를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사역자들은 보상심리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생각하기에, 결국엔 뭔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 좋은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욕망이 차오른다. 

그 욕망이라는 형광물질은 사탄의 레이다에 즉각적으로 탐지된다. 

사탄의 조직적 계략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 개인이 이걸 이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 개인이 사탄의 조직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하늘의 군대와 조직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극복할 수 있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와 조직이다. 

 

나에게도 이런 보상심리가 꼬물꼬물 올라온다.

나이가 드니 더욱 위험천만이다.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간다. 

성금요일의 십자가!! 

 

[오늘의 기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는 너무 큰 충격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더욱 존엄한 존재로 만듭니다. 

당신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 사랑만큼 우리는 존귀합니다. 

그 정신이 나를 살게 하고 우리를 살게 합니다. 

예수님,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끝까지 유지하게 해 주세요. 

보상심리에 빠져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보상심리에 빠져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욕구하지 않게 해 주세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오늘 당신의 십자가에 동참하게 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더 깊이 느끼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2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28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29거기에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31유대 사람들은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시체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안식일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32그래서 병사들이 가서, 먼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다리와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나서,

33예수께 와서는, 그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았다.

34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이것은 목격자가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는 자기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여러분들도 믿게 하려고 증언한 것이다.)

36일이 이렇게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37 성경에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말씀도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69:21 참조) 신포도주를 받으십니다(28-30). 또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는 (유월절 양을 잡을 양의 뼈를 꺾지 않음, 12:46 참조)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31-33).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물과 나온 것을 기록함으로, 그가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고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12:10 참조). 십자가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묵상해봅시다.

 

——

 

 

날이 왔다. 예수님의 지난 3년간, 아니 인생 전체를 결산하는 날이 왔다. 

가열차게, 쉴새없이, 종횡무진 지난 3년을 살아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무수한 이적/기적들을 행하셨다. 

귀신도 많이 내쫓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설교와 강의도 이어졌다.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논쟁하셔야 했다. 

죽이려는 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것이다.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말씀만 하셨을까. 아니 말씀은 그것만 했다고 치더라도, 수많은 생각들과 장면들이 떠오르셨을 것이다. 세례요한과의 만남, 제자들을 삼으심, 병자/귀신들린 자들 고치심,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오천명을 먹이심, 성전정화사건, 나사로를 살리심, 마지막 만찬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난 3 아니 자신의 인생 전체가 지나갔다. 뚜벅뚜벅 날을 준비하며 살아왔다.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날이 오자,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날을 맞이했다. 

 

십자가 위의 6시간 동안,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늘의 묵상은 예수님의 생각에 닿아 있다. 

육체적 고통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자신을 찌르고 조롱하고 죽인다. 

배신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

울분, 억울한 죽음 보다 피할 없는 삼위 하나님과의 단절, 그로 인한 울분. 

육체적, 정서적, 영적 고통 모두 예수님의 머리를 채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은, 최소한 요한이 보기에, 성취였다. 

자신의 인생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지고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줄곧 추구했던 . 

오랜 기다림의 . 

가상칠언이 아닌 가상만상(십자가 위에서의 가지 생각) 영원을 품은 성취였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만들어진 드라마의 모든 떡밥이 거두어졌다.

그간의 암시, 복선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언약이 성취되었고, 약속이 지켜졌다.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28, 36, 37).  

성취를 확인한 그분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는다. 

이루었다.”(30) 

인생을 넘어 영원의 시간이 단어에 압축되었다. 

이루었다. 오랜 소망과 염원이 이루어졌다. 

 

숨을 거두는 장면엔 그의 미소가 보인다. 

사명을 완수한 , 소명을 성취한 자에게 보이는 가녀린 미소.

 

영원부터 이어온 이야기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압축된 이루었다 안식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31). 현실의 몰두가 가져 비참함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행태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거룩함을 잃어버린 자들의 최후다. 영원의 이야기를 망각한 자들의 비애다. 오랜 소망으로 영원의 비전을 마음 속에 품은 사람들만이 그래도 어렴풋이 압축된 이루었다 알아차릴 있다. 요한은 비밀을 알아차렸다. 예수님의 가녀린 미소도 간파했다. 

 

누구에게나 날이 있다. 

인생의 소명을 다하는 , 사명을 마치는 . 

나에게 날은 언제인가? 

숨이 다하는 , 나도 예수님처럼 이루었다 있을까. 

나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있을까. 

날을 위해 오늘 달려 있을까. 

새삼 다시 묻는다. 

 

우리 공동체에게 날은 언제인가? 

사명과 소명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변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공동체의 사명을 다하면 이루었다하고 해체하면 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우주와 역사에 거대하게 존재한다. 

우리 공동체도 작은 역사와 공간에 점으로 남으면 그만이다. 

이루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기독 공동체의 폐쇄는 소멸이 아니라 회생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이 되어 아름다운 은하수가 된다. 

얼마나 밝게 빛날지는 공동체가 최선을 다해 사명을 다했는지에 달렸다. 

 

오늘, 고난주간의 성금요일. 

예수님의 가상만상에 빠져있기를, 영원의 이야기에 이어져 있기를 바래본다. 

또한 나의 사명, 공동체의 사명을 다시 복기해 보길 소망한다. 

고통과 수치 속에서 왕이 되신 그분을 되새긴다. 

 

덧붙임, 예수님은 숨이 넘어가시기 전에 이미 승리를 확인하신 하다. 오랜 전투의 끝은 육체의 숨이 끊어지는 바로 찰나의 순간이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의 숨을 내쉬며 무수한 시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탄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부터 거다. 

 

——

예수님, 

십자가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각과 정서와 마음을 묵상합니다. 

영원부터 이어져 당신의 이야기에 저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의 사명과 소명을 다시 각인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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