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30일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주석

11-12절.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고대에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죽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IVP 성경배경주석).

 

20절. 달려가는 것은 나이 든 유대 남자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오랜만에 돌아왔으므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체면 보다 앞섰다. 평상시 옷차림 대로였다면, 그 아버지는 달려가기 위해 옷자락을 끌어올렸을 것이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주인과 하늘에서의 기쁨이라는 첫 번째 비유, 

그리고 한 드라크마를 찾은 주인과 하늘에서의 기쁨이라는 두 번째 비유 다음에 이어진다. 

오늘 본문이 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이야기적이다. 

비유이긴 하지만, 당시 지역 뉴스에 나올 만한 이야기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역 유지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해외로 떠났다. 

그것만으로도 지탄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위해 아예 재신을 첫째 아들, 둘째 아들에게 공히 분배한다. 

둘째 아들에게만 줬다면, 정말 패륜아로 찍혔을 것이다.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않았지만,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신을 나눈다. 

유산을 배분하는 것과 같다. 

아들들을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둘째는 아버지의 관리와 통치를 떠난다. 

당시는 가부장 시대였다. 

아버지가 곧 법이다. 

그 아버지의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떠난다. 

더 이상 아버지 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요나가 떠오른다.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요나… 

반 강제적이지만 결국 니느웨로 오게 된다. 

 

우리 인간은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는다. 

통제 구역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 

밖을 동경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동경한다. 

한 번도 하지 못한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담과 하와도 그 경향에 무릎 굻었다. 

 

오랫동안 둘째 아들로서 누리던 보호와 안전함보다 아버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모태신앙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망도 다르지 않다. 

교회로부터, 부모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의 소식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소식통을 총 동원해서 아들의 근황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겼다. 

이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이 과연 이 기근으로부터 살아남았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다 저 멀리 아들이 보인다. 

허름한 옷이었지만,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봤다. 

멀리서부터 아들을 향해 뛰어간다. 

 

앞의 두 비유에서 주인은 잃어 버린 것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다. 

적극성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인격은 그런 것이다. 

양과 동전은 인격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스스로 떠난 인격이다. 

그런 경우엔 적극적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찾아 나서는 것도 전도요.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도 전도다. 

찾아 연락하는 것도 전도요. 

오기를 기다리며 잔치를 준비하는 것도 전도다. 

 

우리는 하늘의 잔치를 기다린다. 

남은 99마리 양이라도, 읽어버리지 않은 9개의 드라크마라도, 그리고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던 첫째 아들과 종들이라도, 다시 찾은 것을 위한 잔치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이번 학기에도 하늘의 잔치가 열리길 기다린다. 

청년들이 변하고 그들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오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간절히 찾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때로는 적극적으로 찾으시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제 곧 9월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잃어버렸던 주님의 자녀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게 하소서. 

다시 회복되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마음이 멀어져 있는 친구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그들이 돌아올 때, 반갑게 환대하고 축복하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오늘 하루를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아픈 사람들이 회복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04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새 힘을 주십시오.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38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가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39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40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1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42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43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44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The Message

Turn both your pockets and your hearts inside out and give generously to the poor; then your lives will be clean, not just your dishes and your hands(41절).

 

주석

38-39절. 바리새인은 먹기 전에 손을 씻었는데,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주로 이방인이나 다른 죄인과 접촉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과 그들이 내세운 바를 강하게 비판하셨다. 자기 몸을 그런 식으로 씻는 것은 더러움이 가득 찬 그릇의 겉면만 씻는 것과 마찬가지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이상히 여겼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이상히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 

화를 내고 계신다. 

이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을 집에 초대했을 뿐이다. 

그리고 원래 하던대로 하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겼을 뿐이다.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 제 3자가 이 상황을 봤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크게 다그치거나 분노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을 존중했다. 

이상히 여겼을 뿐이지, 손님을 막대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갑자기 바리새파 사람들 전체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지금 문화적 선을 넘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제자들의 역동적인 사역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이요 거짓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고 가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은 수많은 백성들에게 정죄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유대율법의 수백, 수천가지 조항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억압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백성들은 그들을 따라가고 싶지만, 자신들의 처한 상황에서 불가능함을 알고 지레 포기한다. 

 

어쩔 수 없다.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다. 

비판의 날을 세운다. 

오랫동안 참았지만,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들을 위해 해야 할 말을 하시기 시작했다. 

비록 시점은 약간 애매하기도 하고, 문화적 적절성에 합당한지는 의문이지만, 예수님의 결기는 분명해 보인다. 

바리새인들의 눈은 어둡고 마음은 완고하다. 

그들 또한 징표를 구하지만, 어떤 기적도 그들의 어두움과 완고함을 깨뜨리지 못한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부활까지도 말이다. 

오병이어 사건도, 축사 사건도, 병고침의 사건도 그들에겐 기적과 징표로 보지 못한다. 

그야말로 눈이 어두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도리어 예수님의 사역을 비난하고, 사단의 힘을 얻어 하는 것이라 폄하하고, 자신들을 따라야 한다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이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때문에 막혀서는 안된다. 

예수님께는 너무나 절박한 문제였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실패했다. 

거짓과 위선이 사랑을 막는다. 

진실과 신실이 사랑을 이룬다. 

 

오늘 나는 진실한가!

 

[오늘의 기도]

주님, 

종교인이 아니라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좋은 동반자, 좋은 안내자가 되고 싶습니다. 

좋은 표지판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을 가리키고, 성령님을 가리키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가리키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제가 예수님처럼 아주 멋진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에 집중하시는지 가리키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28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4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44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45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리기를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하였다.

 

ESV

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47절).

 

주석

용서(47절) 예수님의 비유와 이 상황이 원래 함께 묶여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이 둘이 함께 엮어있다면, 그 여자의 행동은 그녀가 틀림없이 이미 용서받았음(동사는 완료 수동태다)을 실증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그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초대한 바리새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지 아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그”에게 말씀하시면서 “시몬”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문자적으로보면, 예수님의 눈은 초대한 주인장 바리새인에게 향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는 시몬과 하고 있다. 

실제로는 바리새인에게 하는 말이다. 

 

빚을 많이 면제 받은 사람, 적게 면제 받은 사람을 소개하면서, 누가 더 많이 사랑하겠냐고 물으신다. 

빚과 사랑을 연결시키셨다. 

빚을 면제받았다고 해서 면제해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어떤 면에서는 연결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뚱맞다. 

빚을 면제 받으면, 사랑이 아니라 감사가 커질 것이다. 

사랑은 특별한 사람에게 발동된다. 

단순히 빌린 돈의 탕감만으로는 사랑이 커지지 않는다. 

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지 않을까? 

크게 용서 받으면 정말 감사하다. 

그렇다고 용서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빚이나 용서나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는 맥락을 형성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빚을 탕감 받거나 용서를 받았을 때, 충분한 감사를 드리고 난 뒤에는 그 관계의 맥락을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돈을 빌리고 갚지 못했다는 무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신이 용서를 구할 정도의 잘못을 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것이다. 

사람 심리가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하나 더 관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탕감이나 용서가 아니라,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의 압도적인 탕감, 압도적인 용서인 경우가 아닐까! 

특혜를 받는 사람에겐 생존과 존재가 걸린 탕감과 용서… 

특혜를 베푸는 사람에겐 자신의 삶과 존재가 걸린 탕감과 용서… 

이 둘이 만나야 특별한 사랑으로 연결되고, 끊어질 수 없는 연으로 연결된다. 

시몬 베드로도 그런 사랑까지 나아가야 하며, 무엇보다 바리새인은 그런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바리새인은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싶다. 

 

있다. 

그런 사랑이 여기에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존재를 흔들던,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 용서의 무게와 깊이가 너무 커서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저 사랑의 표현을 하고 싶을 뿐.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존재를 드려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무도 이해 못할 행동을 통해… 

 

 

2. 여자에게 돌아서서

 

이제 예수님은 여자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시몬에게 말한다. 

이 표현도 흥미롭다. 

시몬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여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시몬을 비롯한 그 식사 초대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제대로된 손님 대접을 한 사람이 없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는 것이 예절이며, 이 일은 접대하는 주인이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발을 씻는 물을 가져와야했고, 하인을 통해서 발을 씻겨 주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였을까?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랐다. 

주인도 제자들도 놓치고 있었던 것을 이 여인은 찾아냈다. 

시몬에게 말하지만, 결국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여인의 사랑 표현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 

 

여인은 이미 죄 용서를 받았고, 그 확신 속에서 이런 행위를 했다. 

용서 받기 위해 향유를 뿌린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았으니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네 죄가 용서받았다” 

이 말씀은 여인의 내적 확신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공표한 말씀으로 읽힌다. 

동네의 유명한 죄인이었던 그 여인을 많은 사람 앞에서, 무엇보다 죄인의 죄인됨을 선언하고 확정짓는 바리새인 앞에서, 그 여인의 죄가 사함 받았음을 공표한 것이다. 

이제 그 여인은 사회적으로도 용서 받은 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더이상 죄인으로 여길 수 없다. 

그녀는 예수님께 용서받은 여인이며, 따라서 공동체에 회복된 여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향유를 뿌린 여인의 모습에 머물게 된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겐 어떤 의미인가? 

때로 그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뿌릴 수 있는가? 

그분과 얼마나 시간을 오래 보낼 수 있을까? 

 

마음 속에 여러 긴장과 불만이 차오른다. 

그 감정을 보내버리고 다시 주님께 집중한다. 

그분께 사랑을 표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돈이 너무 많아 탕감해 준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용서의 난이도가 너무 쉬워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저를 사랑하기에 탕감해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남아 돌아서, 별게 아니어서 하신 행동이 아님을 압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한 것을 저를 위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단순히 감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까지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에 머물며 저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런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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