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19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친족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를 알아 보아야겠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편안히 가라고 하면서 작별을 하였다.

19 주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너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20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 등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 그 때에 모세는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2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었으니, 너는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바로의 앞에서 그 모든 이적을 나타내 보여라. 그러나 나는 그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내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하겠다.

22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나의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하였건만, 너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게 하겠다.'"

 

 

주석

바로의 고집(강퍅케 됨)(20-23절) 이 부분은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열 장(여러가지 재앙이 내리는 동안 그리고 바다를 건널 때까지)에 걸쳐서 스무 번 언급되는 주제다. 서너 개의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며, 때로는 바로가 그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때로는 야웨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다. 강퍅케 된다는 단어의 의미는 인내, 완고함, 끈질김, 굽히지 않는 성질 등을 나타내는 이집트의 표현들과 유사하다(IVP 성경배경주석).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와 그의 가족은 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 갑니다. 엄청난 도전이 기다리는 여정이지만, 모세는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18-20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준 능력을 바로 앞에서 나타내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에게 전할 메시지도 친히 알려 주십니다(21-23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안전한 곳을 떠나 위험한 곳으로 가는 도전과 모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와 임재의 상징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야 할 나의 이집트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구하며 나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가족들을 설득해야 한다. 

자신만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의 결정은 가족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준다. 

모세야 어찌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고향을 떠나 낯설고 위험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이 느꼈을 무서움과 두려움을 쉽게 재단할 수 없다. 

단순한 이민이 아니었다. 거대한 왕국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맞서서 그에게 경고하고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솔직히 말하면, 가족들은 놔두고 모세 혼자 가야 하는 게 맞다. 

괜실히 잘못하면 가족들 모두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고대 왕국에서는 크게 작은 싸움과 전쟁들은 늘 있어왔다. 

미디안에 살면서 그런 일을 한 두번 경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주변 종족 끼리의 싸움이 없었을리 만무하다. 

그 중에서도 그 지역의 패권은 이집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집트에 대항하는 민족이나 종족은 싸그리 멸망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서운 나라에 들어간다. 왕에게 맞서기 위해 들어간다. 

장인 어른이 평안을 빌며 내 보내준 것도 대단해 보인다.

자신의 딸과 손자들을 사지에 보내는 것과 같다. 

떨기나무에 불에서 나온 소리를 들었다는 황당한 사위의 말에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장인 그 스스로도 제사장이라서 그런가? 

모세 그 자신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그 순간에 온갖 생각이 몰려온다. 

과연 이 일을 내가 혹은 우리 가족이 떠 안을 일인가?

나는 과연 충분히 설득되었나? 

나는 과연 가족들을 보호할 수 있기는 한 건가? 

 

IMAX로 아바타를 보았다. 

미친 CG와 3D 그래픽이 환상적이었다. 

물에서의 움직임도 그렇고, 인간과 나비족간의 화면상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생동감이 넘친다. 

계속되는 메시지 중 하나는 가족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투지와 약속이다. 

이는 보편적인 메세지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전세계에 걸쳐 가족을 보호하려는 부모의 헌신에 대해 말해왔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세는 과연 그 일을 잘하고 있나? 

 

모세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이적과 기적을 만들어낸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방이가 된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기억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기억하지 않는 한, 

그 약속이 단지 환상이 아니고, 꿈에서 본 것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임을 계속 상기시키지 않는 한, 

그의 마음을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나귀나 낙타를 타고 가면서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지팡이였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과 약속이 담긴 지팡이였다. 

 

모세에게 지팡이가 있다면, 우리에겐 십자가가 있다. 

우리에겐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 그리고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경험하는 것, 

예수님의 성품을 더욱 깊이 인식하는 것, 

예수님의 약속을 더욱 깊이 신뢰하는 것,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가족들이 위험에 놓이고, 동족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당시 최고 권력자와의 대립에서 승리할 것 같지도 않은, 인생 최고의 도전 앞에 놓인 모세가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지팡이라면, 앞날의 진로가 무엇일지 모르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디까지인지도 확실치 않고,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내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다시 말씀을 꺼내본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께 마음의 초점을 맞춘다. 

 

 

 

 

[오늘의 기도]

주님, 부족한 사람을 통해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연약함과 부족함을 온전히 인정합니다.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이 이뤄지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당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나타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등장하게 하소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온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곳곳에 드러나게 하소서. 

주님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길 원합니다. 

주님, 저와 우리 공동체를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8일 수요일

 

10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12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13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14 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온다. 그가 너를 보면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15 너는 그에게 말하여 주어라. 네가 할 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에나 그가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말을 대신 전달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그리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여라."

 

NIV

Then the Lord’s anger burned against Moses and he said, “What about your brother, Aaron the Levite? I know he can speak well. He is already on his way to meet you, and he will be glad to see you(14절).

 

모세는 이제 말재주가 없다고 합니다. 입을 지으신 하나님은 모세를 돕겠다고 하십니다(10-12절). 하지만 모세는 또다시 자신의 자격 미달을 주장합니다. 이례적으로 하나님은 크게 화내시며, 모세의 형 아론을 함께 할 동역자로 붙여주십니다(13-16절). 이제 모세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야 합니다(17절). 

 

모세가 이집트 왕자였을 때, 그의 말은 동족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부정적 경험으로 인해 ‘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때로는 부정적 생각의 고립에서 빠져나오도록, 나중 일의 걱정보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일을 하도록 압박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느끼는 그 어떤 무능함도 극복할 수 있게 하십니다. 고민하기보다 실천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묵상]

모세의 말과 행동에 대해 십분 이해가 된다. 

그 자신 스스로 말재주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오래된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말 주변이 없어서 동족 히브리 사람들도 설득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만 하다. 

말 주변이 없어서 바로와 이집트 왕궁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지 못했다고 자책 했을 수도 있다. 

모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란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고,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모세는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실패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하나님이 읍소하다시피 한다. 

하나님 당신이 이 세상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사람을 만들고 입을 만들고 언어를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주면서, 그 모든 것을 돕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가라고 다시 명령하신다. 

하나님 입장에선 충분히 설득한 거다. 

당신 입장에서 이렇게 설득한 경우가 많치 않다.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명확하다면, 그저 무릎꿇고 순종하겠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나 모세는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이렇게 외친다. 

제발 실패했던 그 자리로 다시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제발 40년간 양치던 목자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거대한 일을 맡기지는 말아 주세요. 

제발 말이 어눌하고 자신감도 없고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부족한 나에게는 맡기지 말아 주세요. 

제발….. 

이 모든 상황을 다시 살펴봐도 역시 난 모세가 이해가 된다. 

 

나 스스로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주어진 글을 잘 읽는다 생각해 본 적은 있으나, 말을 조리있게 설득력있게 잘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뭔가 어눌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을 하다말고 생각이 나다말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된다. 

부족하다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원래부터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필요한 말만 하자는 주의였다. 나름 장점이라 여겼다.  

그러니 말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점점 말을 잘 해야 하고 설득도 잘 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필요한 말 뿐 아니라 필요를 만드는 말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런가 모세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나라도 저렇게 말했을 것 같다. 

지금 하나님께서 저런 소명으로 나를 부르신다해도 모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크게 노하신다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지난 80년의 세월동안 크게 개입하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나타나신 것 아니가? 

40년의 양치기 시절 동안 뭐 이렇다할 말씀이 없으셨다. 

이제와서 몇십만에 이르는 히브리 민족을 패권 왕국 이집트로부터 꺼내오라고… 

억울하다. 정말 못할 것 같다. 자신도 없다.  

게다가 혼자다. 군대가 있나? 조력자가 있나? 네트워크가 있나? 재정이 있나? 도대체 뭐가 있나? 

이집트 왕궁과의 연결고리도 다 떨어져 나갔다. 

친구들도 모세를 기억할지도 잘 모르겠다. 

거부하는 모세에게 화를 내실 일이 아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화를 내신다. 역정을 내신다. 

 

화를 내시지만 죽이시지 않는다. 

화를 내시지만 그 화가 인격적인 화다.

그점은 분명해 보인다. 

폭력적인 화였다면, 비인격적인 화였다면 벌써 모세는 죽었다. 

모세의 상황을 아시기에 어찌보면 화를 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셨을 수도 있겠다. 

그분의 심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럼에도 그분이 화를 내시되 폭력이 아니라 말로 화를 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세는 그렇게 화를 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무력한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오냐오냐 넘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여러 가지 제안도 하시고 여러 옵션으로 설득도 하시지만, 그분은 화를 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어찌보면 모세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처럼 불의를 보면 화를 내는 분 말이다. 

자신 같이 앞뒤 안재고 폭력을 사용하는 화는 아닐지라도 상황에 따라 화를 내시는 분이심을… 

이런 하나님이 필요했다. 

 

나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맞다. 

그분은 언제나 기회를 주신다. 

다시 그분께 나아와 새롭게 시작하도록 도우신다. 

그러다 보니 그분이 화를 내실 수 있는 분임을 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인격적으로 화를 내신다. 

그걸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의 화는 욕이나 저주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돕겠다 약속하시고 소명에 응답하라 명하시는 차원의 강권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 

다만,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억지로 넘어설 수는 없다. 

그점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겠다. 

그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혹여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하더라도, 나의 상황과 한계와 연약함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지레 겁먹고 말씀드리기를 주저하지는 않겠다. 

주님께 용기있게 나아가 나의 상황을 정직하고 담대하게 말씀드리련다.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받고 싶다. 

그래야 좀 편하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편해야 오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오늘의 기도]

누구보다 저의 상황과 환경과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비교하는 마음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잘 하지 못할 때 자책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도 더 잘하고 싶고, 모임도 더 훌륭하게 이끌고 싶고, 설교도 뛰어나게 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억력도 부족하고, 조리도 없고, 때로 감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두렵고, 떨립니다. 

 

주님, 당신의 일을 감당하기에 적절한 만큼 은사와 능력을 주옵소서.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면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노력이 필요하면 그것또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동행하심, 주님의 컨설팅, 주님의 가르치심, 주님의 코칭이 절실합니다. 

혼자 내버려두지 마시고 가르쳐주세요. 

할 말을 허락하시고, 정확한 기억 속에서 정리하고 말하는 법을 익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2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하였다. "지팡이입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 보아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모세가 그 앞에서 피하니,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서 꼬리를 잡으니, 그것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

 

6 주님께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그 손에 악성 피부병이 들어서,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7 주님께서 "너의 손을 품에 다시 넣어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손의 살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8 "그들이 네가 하는 말도 믿지 않고, 첫 번째 이적의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다.

9 그들이 이 두 이적도 믿지 않고, 너의 말도 믿지 않으면, 너는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주석

뱀(3절), 악성 피부병(6절) 바로를 나타내는 상징은 뱀 형상의 휘장으로 그것은 왕관에 툭 튀어나오게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표적은 바로의 권위가 완전히 하나님의 권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부병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오만에 대한 처벌-어떤 사람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에게 주제넘게 굴 때-로 여겨지며, 따라서 여기서 바로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준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동족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걱정합니다(1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능력과 악성 피부병이 생겼다가 다시 회복되는 능력을 주십니다(2-7절). 첫 번째 이적이 부족하면 두 번째 이적으로, 이것으로도 부족하면 나일 강물이 피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도우실 것입니다(8-9절).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양치기의 일상을 살았던 모세에게, 다시 이집트와 맞서서 동족들을 구원할 임무는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손으로 바로의 수호자인 뱀을 움켜잡아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다른 능력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주시고 도우실 것을 신뢰합시다.

 

[오늘의 묵상]

모세의 질문은 정당하다. 

4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모세의 의분에 찬 행동에 동족들은 의심했다. 

그 실패의 경험도 크거니와 사실은 40년의 세월이 더욱 큰 문제였다. 

이제는 젊은 날의 패기도 체력도 아니다. 

그저 양 떼를 모는 목자였을 뿐. 

과연 몇십만명에 이르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 수 있을까? 

과연 큰 왕국 이집트의 바로에게 맞서서 민족의 탈출을 설득할 수 있을까? 

모세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라기보다는 ‘동족’이었다. 

동족의 불신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봤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당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대체로 정당하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그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많고, 지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면 고난의 길이 그려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여호수아가 그랬다. 예레미야, 에스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을 수 밖에 없다. 왜 나냐고, 과연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묻지 않고 따르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묻는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사역자로의 부르심, 간사로의 부르심에 크게 묻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난다. 

사실 사역자로의 삶이 엄청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종의 특권의식과 교만함이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순수함 속에 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못하겠다는 생각보다, 나를 이렇게 부르시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좀더 크게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니 모세처럼 매우 진지하게, 여러 차례 묻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삶이 두렵다거나 못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이 부르심이 정확한 것인가, 내가 이 부르심을 제대로 인지한 것이 맞나에 초점을 두고 기도하고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왜 나여야만 하는가?’, ‘과연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도 더욱 심도있게 드렸어야 했다. 

그게 인간적이다. 

질문은 불순종이 아니라 진지함의 산물이다. 

질문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질문은 인간 내면 중심의 두려움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응대하신다. 이미 알았다는듯이….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셔서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하필 뱀이다. 

주석에서는 뱀이 바로를 상징한다고 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사람을 유혹하여 인류 전체를 죄악으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밟게 하겠다고 말이다 (창 3:15). 

그 후손 중에 하나인 모세는 뱀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더 미래의 후손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셨다. 

바로의 상징이 뱀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속 사회의 절대 권력이 뱀으로 표현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뱀을 숭앙하고 숭배한다는 점이 신기하고 놀랍다.

하나님은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인류 타락의 주범으로 여기시며, 그 뱀(사단)을 무찌르는데 성경 전체 이야기를 할애 하신다. 

요한계시록에도 뱀이 등장하고, 뱀 중에 큰 뱀인 용을 잡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세 혼자서는 뱀을 제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도우셔야 뱀을 제어할 수 있다. 

뱀은 언제든지 자신의 요상한 언어와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케하고 현혹시키고 죄로 이끈다. 

정당화의 천재가 뱀이다. 

간교한 말로 하나님께 반역케 하는 존재다. 

겨우 몇십년을 살아가는 인간은 뱀의 말에 속기 십상이다. 

마음 속에 뱀의 생각과 논리가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파와 와이파이를 타고 그의 말들이 언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과연 우리 인간이 잘 거를 수 있는가? 

과연 내가 잘 스크린 할 수 있는가?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체력과 지력은 달리고, 욕망과 욕구는 지나치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매일 매일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변화가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변화가 많으면 말이 많다. 변화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 속에 뱀의 소리도 들어있다. 

양떼를 치는 것은 모세 혼자서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뱀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문명의 기원은 물이며 강이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많아야 사람들이 모인다. 강이 넘쳐야 땅이 비옥하다. 

많은 사람들, 비옥한 땅, 넘쳐나는 생산물, 교환하려는 욕구… 

이래야 문명이 탄생한다. 

 

그러나 언제든 그 문명은 피로 물든다. 

문명의 중심에는 그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언제든 물고 뜯고 찢는다.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죽음이 멈추지 않는다. 

뱀이 그 문명에 중심에 있다. 

요상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서로 싸우게 하고 결국엔 자신의 왕국을 유지한다. 

그 문명은 사람들의 피로 건설되었다. 

 

하나님은 나일 강이 더이상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강이 아니라, 

죽음의 강이 되게 하실 수 있음을 이적을 통해 드러내신다. 

뱀의 실체, 문명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셔서, 문명의 사람들과 그를 대표하는 바로가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해왔는지 보여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이다.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봐야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최소한 동족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의 욕망을 꺾는데는 그걸로는 안되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대 문명이 가져다주는 폭력과 죽음을 폭로하신다. 

전쟁은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물이 있는 곳에, 원유가 있는 곳에, 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의 욕망이 쌓이는 곳에 폭력과 죽음이 피로 물든채 퍼진다. 

CNN, BBC를 통해 유툽과 각종 SNS를 통해 피로 물든 나일강, 피로 물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라이브로 보여준다. 

여전히 권력가들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권력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는 뱀의 간교한 거짓말이다. 

 

세계에는 모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모세의 등장이 절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모세는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작은 예수, 작은 모세라는 사실을 말이다. 

피조물들의 신음은 더욱 커저가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은 왜 작아 보이는가? 

오늘의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사단을 결박하시는 하나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성령님, 

삼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합니다. 

저를 부르셨으니, 모세에게 주셨던 능력과 권세를 허락하소서. 

뱀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간교한 말과 거짓의 언어를 분별할 수 있는 귀를 주소서. 

피로 더럽혀진 인간사에 무조건적 애정이 아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부담스런 회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눈과 귀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주석

젖과 꿀이 흐르는 땅(8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그 땅이 풍성한 목가적 생활 방식을 누렸음을 말하지만, 반드시 농업적인 면에서만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젖은 가축의 산물인 반면, 꿀은 자연 자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마도 꿀벌의 꿀보다는 대추야자 당밀을 의미할 것이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7-9절). 그리고 이를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모세는 자격 미달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보내십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헌신할 영역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셨다. 

그들의 부를짖는 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잘 알고 계신다. 

오랫동안 진행된 가중된 고통, 그 한계를 넘어섰다. 

400년 중에 지난 100년이 가장 힘겨웠을 것이다. 

모세의 탄생 시점에 바로가 선보인 정책은 그야말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정책이 입안된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노예가 많이 태어나면, 그것도 남자가 많이 태어나면 노동력이 증가하고 군사력이 강화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정책을 편 것이 아니다. 

강대해진 번성한 히브리 종족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리더로 왕궁에 있는 모세를 은근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히브리 세력은 이집트 왕궁에서 축출되었다. 

 

탄압 정책은 더욱 거세어 졌다.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을 것이다. 

남자 아기들이 죽는 것도 그렇지만, 노동자들도 쉬지 않는 노동에 지쳐 금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밤마다 죽어나가는 마을 사람들, 친척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르짖음의 소리가 매일 울려퍼진다. 

히브리 민족의 한계가 온 것이다. 

더이상 이집트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전에는 이집트에서 번성하면서 나름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란 꿈이 있었다. 

당당하게 이집트 왕국의 한 민족으로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란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씨가 마를 지경이다. 

몇 십년만 더 지나면 히브리 민족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내려가서”(8절)이다. 

그분이 내려오신단다. 그분이 직접 이집트 땅으로 오셔서 히브리 백성에게 다가오신단다. 

또한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12절)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음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오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신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실패한 일을 모세에게 다시 시키신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 내려가셔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신다. 

당신이 직접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결국 자신의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시고, 그를 통해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사도들을 보내셨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셨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구조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이들을 구출하시러 하나님은 사람을 혹은 사람들을 보내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다. 

신비로운 상상 속 세계가 아니다. 황홀경의 세계가 아니다.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에 뿌리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요 그들을 위한 구출 역사다. 

 

어제 오늘 두 분의 장례식에 문상다녀왔다. 

82세, 84세. 

죽음을 맞으신 분들 앞에서 나오는 대화들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픈 사람들, 암과 섬망과 침해 증세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받는 사람들 옆을 지키고 돌보느라 또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인류를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인간사에 내려 오셨다. 

죽음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악과 죄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분이 오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러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 모세는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또한 누군가를 부르신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하라고 부르신다. 

그 누군가가 나라면…

 

[오늘의 기도]

주님,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며칠 사이에 많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사단의 세력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기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좀더 적극적으로 돕게 해주세요. 

주님의 구출작전에 참여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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