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1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2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6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주석

불꽃, 신을 벗음(2, 5절)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출애굽 이야기 도처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불과 연기로 상징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하나님의 위엄 있는 본성 때문에, 신중하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했다. 모세는 자기 신발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했다(IVP 성경주석).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나타납니다(1-2절). 신비한 현상에 주목한 모세는 떨기에 가까이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모세는 두려움 가운데 응답합니다(4-6절). 

 

하나님은 평소에 익숙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떨기에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2, 4절). 수많은 정보와 자극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떨기나무의 불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집트에서 40년, 미디안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이렇게 모세의 인생이 구분된다. 

40년간 모세는 장인의 양 떼를 치는 목자로 살아간다. 

야곱도 장인의 집에서 오랫동안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다. 

자기 본향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착하는 곳은 처가다. 

40년간 그는 이집트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다. 

성실한 목자로 살아간다. 

민족의 고통을 대변하는 대변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족에 대한 불의한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투사의 삶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양을 치며, 가족을 돌보며, 일상을 별 탈 없이 살아간다. 

 

지극히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항상 보오던 떨기 나무가 이상하다. 

불길이 올라 황급히 양떼를 불로부터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똑같은 양상으로 불이 머물러 있었다. 

번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색깔도 이상했다. 뭔가 특별한 빛이 흘러나왔다.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세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두 번 부르셨다. 

모세는 어떤 신이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기이한 이적을 행하시는 신이라면 일단 대답을 해야 했다. 

이어서 음성이 들린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네 신을 벗어라”

평소에 다니던 길이다. 평소에 보았던 땅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땅이 거룩한 곳이라 하시니, 놀라웠다. 

새롭게 발견한 땅이 아니었다. 평소에 못보던 깊숙한 동굴도 아니고, 산속 깊은 곳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처럼 양떼를 먹이기 위해 호렙산에 왔을 뿐이다. 

지난 40년간 들락거리던 장소다. 

갑자기 거룩한 곳이 되었다면, 그것은 지금 그 곳에 신적 현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된다. 

 

지금 말씀을 읽고 성경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 그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 안만 거룩한 곳이 아니다. 

어떤 요일, 어떤 장소도 그분의 임재와 현현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모세에게 다가온 분은 히브리 민족의 신이었다. 

이집트에서도 많은 신을 보고 알았다. 

미디안의 제사장이 섬기는 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의 신은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신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었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들과 함께 했던 신,

그분들에게 약속을 주셨던 신, 

그래서 한 때는 그 신의 약속을 믿고 동족들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만들었던 신, 

그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가끔씩 그 신이 어디에 계시는지, 도대체 왜 히브리 민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지 궁금했었던 모세에게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타지 않는 불로 나타나신 것이다. 

 

몸이 굳는다. 입술이 떨린다. 소름이 돋는다. 그토록 마음 속에서 찾았던 그 신이 눈 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모세는 얼굴을 가린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두려웠다. 

혹시나 죽을까 두려웠다. 

너무 가까이 온 것이 무서웠다. 

존재가 흔들린다. 그간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신은 실재했던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나 동화가 아니었다. 실제였다. 

구전되어오던 민족의 역사는 진실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라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고? 교회가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까마득히 아련히 잊고 지내던 일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이 풀어진다. 

의문을 품고 묻어두었던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제자리를 찾아간다.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분의 임재와 존재에 대한 확신은 그동안의 삶의 경험과 기억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삶이 해석된다.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니 모든 일상의 자리, 예배의 자리, 묵상의 자리, 기도의 자리가 다 소중하다. 

언제든 그분이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 그것을 좀더 자주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죽음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 

그제 DMC 지하철 역에서 숨이 멎은 분을 보았다. 

심폐소생술이 먹히지 않았다. 

축 늘어진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지하철에서 숨을 거둔 듯 보였다. 

구급요원들이 와서 응급 조치를 취했고, 주변의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다음 열차를 타느라 다시 사셨는지, 아님 운명하셨는지 알 길은 없다.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말이다. 

10. 29 참사가 떠오른다. 

세월호가 떠오른다. 

죽음은 항상 내 옆에 있다. 

 

허망한 죽음, 사단에게 예속된 죽음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오셨다. 

모세에게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오늘도 주님의 개입하심을 꿈꾼다. 

 

 

 

[오늘의 기도]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제가 드렸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IVF 간사로서,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헌신했던 기도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약속해 주세요. 

제 삶을 가장 아름답고 선하게 이끄실 것을 저에게 약속해주세요. 

그리고 그 약속을 끝까지 기억해주세요. 

저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일상에 침투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삶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던져주세요. 

언제 당신께서 침투하시고 개입하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기 원합니다. 

감각을 깨워주세요. 

다시 와이파이를 연결하게 하소서. 

주님께 연결되는 순간 순간이 더욱 많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0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5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22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주석

여목자(16-19절) 보통 여자들은 가족 가운데 아들이 없을 때만 목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받는 불이익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목자들이 그들을 쫓은 데서 살펴볼 수 있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15절).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줍니다(16-17절). 그 딸들은 우물에 먼저 왔음에도 힘이 센 다른 목자들에 의해 그 기회를 매번 빼앗겼습니다(17-18절). 모세는 그 딸들을 도운 것으로 인해 환대와 정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이후 모세는 그곳에 정착하여 아내와 자녀도 얻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나그네’ 신세입니다(20-22절).

 

모세는 이집트에서처럼 여전히 연약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가, 이번에는 누군가를 돕다가 낯선 땅에서 살길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늘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섬기는 삶을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우물가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물은 생명이며, 번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이 물가로 모이지만, 시내가 없는 곳에는 땅을 깊이 파서 물을 긷는 우물이 최선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을 파는 일에 진심이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도움심을 구했다.

우물이 없이 정착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우물가는 외로움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제 시간에 물을 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마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들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매번 남자 목자들의 힘에 밀려 맨 마지막에 물을 길을 수 밖에 없었다. 

일곱명의 딸들이 함께 대동했지만, 남자 목자들의 힘과 억셈을 이길 수 없었던 듯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도전하던 여인들이었다. 

먼저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미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모세가 돕는다. 

모세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가 이집트 고위층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몸이 건장했기 때문에, 지략을 잘 썼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남자 목자들이 양보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딸들도 용감했고, 모세도 용감했다. 

딸들의 용감함이 모세의 용기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도울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생존과 번영의 길에는 항상 사건, 사고, 스토리가 넘쳐난다. 

물길이 있는 곳, 원유가 터져 나오는 곳, 돈과 금이 몰리고 풀리는 곳, 사람들이 몰리는 곳… 

너도 나도 생존과 번영을 위해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힘있는 사람들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힘없는 사람들, 약자에겐 모세나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 

자의든 타의든 항상 뒤로 밀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모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난 지레 포기하는 스타일이다. 

우물가의 여인이 내 성정과 닮았다. 

싸우고 싶지 않아한다. 그저 ‘내가 손해보면 그만일 것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물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 

오늘돋 주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더 현명하고 재빠르고 탁월하고 싶은 마음, 그래야 우물을 지킬 수 있고, 우물에서 가장 빠르게 물을 길을 수 있고, 빨리 밥먹고 더욱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 마음… 

이 마음을 내려농고 그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항상 1등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데까지만 달려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풍성함으로 이끄소서. 

 

많은 회의와 미팅이 오늘도 저를 기다립니다. 

부담스럽지만, 하나 하나 잘 감당하게 하소서. 

주께서 지혜의 우물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07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1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12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13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14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15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주석

모세의 범죄(12-15절). 이집트인은 상당한 인종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등하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무시했다. 따라서 외국인이 이집트인을 죽이는 것은 커다란 범죄에 해당되었다(IVP 배경주석). 

 

생명을 건짐 받았던 모세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쳐 죽입니다(11-12절).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는 것을 중재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살인죄가 탄로난 것을 알고 도망칩니다(13-14절). 이 일을 들은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찾습니다(15절). 

 

나일강에서 생명을 건짐 받은 모세는 동족들이 학대와 고통을 받는 또 다른 죽음의 현장을 봅니다(11절). 이때 모세는 살리는 선택이 아니라, 죽이는 선택을 합니다(12절). 이 방식은 동족들을 돕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의도는 오해를 낳았고, 또 다른 죽임의 방식을 형성합니다(14-15절). 나는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모세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친모로부터의 영향일 것이다. 

바로의 딸의 양자로 입양은 되었으나 양육은 친모에 의해 받았다. 

자신의 외모와 일반 이집트 사람의 외모가 다르다는 것도 인지했을 것. 

 

자신의 동족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던 차에, 왕궁 밖으로 나갈 일이 생겼고,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그는 친모로부터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들었을 것. 

오랫동안 상상 속이지만, 불합리한 정책과 고통받는 동족에 대한 연민으로 분노가 쌓였을 것.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자 그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집트 관리인을 죽였을 것. 

추측컨대, 노동현장에서 히브리인을 때리고 있는 사람은 이집트 관리인 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세가 아무리 분노가 쌓였기로 한 두대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을 것 같지 않다.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었던 것 같고, 계속되는 폭행에 모세의 분노가 폭발했을 것이다. 

모세는 그 순간 자신이 정의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폭력과 폭행으로부터 구해준 그 히브리 사람이 이 사건을 소문을 냈다. 

온 히브리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바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의아한 것은 바로의 반응이다. 바로의 딸의 양자이면, 자신의 손자가 된다. 비록 양자지만 왕궁 사람이다.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히브리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가 된다. 

모세를 동족으로 여기기보다 왕궁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울 때 모세가 싸움의 이유를 묻자,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동족 사람들을 돕는 사람으로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세는 사실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다. 

경계인. 

히브리 사람도 아니고 이집트 왕궁 사람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섣부른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 물불 안 가리는 성격과 판단 탓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가족 같았던 왕궁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될 지경이었다. 

자신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혜롭지 못한 살인 때문에 그는 홀로 외로이 광야로 가야만했다. 

40년의 인생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나,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잘 파악하지 않은 채, 과도하고 섣부르고 충동적인 행동은 자칫 문제를 악화시킨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십브라와 브아처럼 좀더 지헤롭게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충동적이기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사람과 돈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일상을 잘 지켜내되,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과감하게 결단한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준비하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용기 있는 헌신이 필요하다. 

지혜롭게, 성실하게, 과감히게… 

 

오늘 하루 더욱 지혜롭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분의 때에 과감하게 뛰어들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토요일은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나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이라고 해서 한 없이 풀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 당신의 시야와 생각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게 하소서. 

가족을 더 사랑하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한 마음과 몸의 준비를 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 있는 약자들을 품으시는 하나님, 

당신의 눈과 마음으로 그분들을 보게 하소서. 

호소할 곳이 없어서 고통 가운데 외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10.29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돌보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06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레위 가문의 한 남자가 레위 가문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3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4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5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 오게 하였다.

6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7 그 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8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10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NIV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a son. When she saw that he was a fine child, she hid him for three months(2절).

 

레위 가문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엄마는 ‘하도 잘 생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남몰래 키웁니다(2절).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여자는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습니다(3절). 마침 강가에 목욕을 하러 온 바로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깁니다(5-6절). 이것을 지켜보던 아이의 누나는 바로의 딸에게 적절한 제안을 합니다(7-8절). 이렇게 모세는 건져집니다(10절).

 

나일 강은 히브리 남자 아이에게는 죽음의 장소요, 그의 가족들에게는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한 생명이 건지십니다. ‘하도 잘 생겨서(2절)’의 원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며 ‘좋았더라’라고 하신 단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길로 바라봤던 어머니(2절), 갈대 상자에 담긴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며 지켜보던 누나(4절), 히브리 남자 말살 정책을 알고서도 히브리 아이를 불쌍히 여긴 바로의 딸에 의해(6절) 모세는 건짐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작은 행동들을 모아,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의 묵상]

바로의 딸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바로의 정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갈대에 담겨 떠 내려오는 아이가 히브리 남자 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아이를 길렀다. 

솔직히 몇 명이나 이렇게 건졌는지 잘 모르겠다. 

꽤나 많은 아이가 이 공주에 의해 살았을 것 같다. 

 

하나님은 이 공주를 사용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모세의 아빠, 엄마, 누나, 그리고 바로의 공주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퍼즐들로 기여한다. 

모세를 기르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일이자 작은 일이다. 

큰 일은 왕국의 정책을 거스르기 때문이요. 

작은 일은 모세가 세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크기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연 알았을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말이다.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저 아기를 살리고 키워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도 아기를 키웠다. 

3개월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언제 이집트 관리들이 들이 닥칠지 모른다. 

아기 울음 소리를 막기 위해 갖는 방법을 다 동원 했을 것이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그들을 짓눌렀다. 

3개월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눈물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다. 

아들을 떠나보내던 엄마와 아빠의 눈가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태어나면서부터 3개월이 되어 아기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떠나 보내는 이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키웠다. 

 

모세의 부모는 아기를 버렸고,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다. 

부모 입장에서는 모두 고통스런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손 안에 모세와 예수님은 새로운 나라를 일으킨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새로운 영적 생명을 키우는 목회자 혹은 사역자들은 모두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사람을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온 마을이 달라 붙어야 되는 일이다.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 혹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 

부모나 목회자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는 순간, 고통이 배가 된다. 

많은 사람이 도와야 한다. 

주양육자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옆에서 돕는 사람들이 필수적이다. 

함께 양육하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도 살고 양육자도 산다. 

 

기독 공동체는 서로 양육하는 공간이다. 

서로 배우고 서로 자라가는 공간이다. 

한 두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영적 선생님이 되어 서로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준다. 

그런 상호 협력 배움이 사라지면 생명이 잘 자라나지 않는다. 

가르치려던 그 한 두 사역자는 번 아웃에 이르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모세의 아빠, 엄마, 누나, 그리고 바로의 딸이 필요하다. 

긍휼과 연민과 애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 

나에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인가? 

 

[오늘의 기도]

생명의 주관자 되신 주님, 

저를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움을 받도록 인도해주세요. 

저에게 사랑, 연민, 애정, 긍휼의 마음을 주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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