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22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바울은 일상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것을 권면합니다(16-18절). 그리고 성령과 예언을 굳게 붙들며, 분별력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을 이야기합니다(19-22절).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결국 기쁨과 감사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구절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암송했었다.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권면이며,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도리어 항상 기뻐하는 것,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주 비판하고 자주 문제 제기하는 것이 기독 지성인의 일이며, 책무며, 삶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각에 100%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반기를 들고 싶다. 

기독 지성인의 책무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지, 어떻게 쉬지말고 기도할 수 있을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야 한다. 

비판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문제제기 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어려운 고도의 지적, 심적 작업 아닌가!! 

 

기쁨이 사라진 문제제기, 감사가 빠진 비판이 얼마나 오래갈까. 

그것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스스로도 망가뜨린다. 

마음 속에 기쁨을 유지하고, 감사의 마음을 강화하고, 하나님께 기도의 제목을 언제나 올린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랑과 정의가 더욱 확산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욕하거나 무시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이슈와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협력할 바를 찾고, 거부할 것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좀 더 나은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한 비판, 인격을 모독하는 비판은 삼간다.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공개하지 않을 글로 정리해서 논리성을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남을 깎아 내리고, 비판의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지 않고, 인격을 모독하는 등의 관계 파괴형 비판은 금물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살면서, 문제제기가 삶의 디폴트 값이 되어 버렸다.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 결국 영향력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문제 발견형 감각과 논리 구조가 몸에 박혀 있다. 

기계처럼 반응한다. 

기쁨, 감사, 기도가 작용하지 못한다. 

사역자들 가운데도 많은 경우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설교를 하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문제 찾기 일환이다. 

 

그러니 “비판/문제제기”와 “기쁨, 감사, 기도” 사이의 모순 관계가 놓이게 되며, 둘 다를 지혜롭게 잘 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바울은 이 난제에 해답을 성령님으로 보는 것 같다. 

성령과 예언을 대뜸 들이댄다. 

성령님이 없이는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성령님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이끌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다.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라. 

피곤함이 주관하지 않도록, 기쁨과 감사가 내면에 흐르도록, 성령님께 기쁨 호수의 댐 수문을 주장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님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아름답고 멋진 모습들을 계속 묵상해야 한다. 

지식만이 아니라 더 크게 풍성한 감정의 물꼬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언 관련해서는 분별이 핵심이다. 

과연 이 예언, 즉 대언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사탄의 속임수인지, 아님 나의 욕망과 내면의 소리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이 핵심이다. 

그걸 구분할 수 있으면 성령님의 역사를 더욱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

그러면 기쁨과 감사가 찾아온다. 

더불어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 기쁨이 찾아오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님, 

도우시고 이끄시고 실마리를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 

오늘도 기쁨과 감사가 사그라드는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미지에 주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자주 생각나게 하소서.

예언의 말씀을 분별, 분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식, 알아차림, 이해하게 하소서. 

그것이 마음의 내적 기쁨을 낳고, 감사를 흐를게 하고, 기도의 끊을 더욱 붙잡게 합니다. 

부담스런 모든 시간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23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25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주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24절) 이 언약의 심장부에는 족장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참고. 창17:8; 26:3; 28:13; 48:4). 아브라함은 훨씬 더 구체적인 약속을 받았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IVP 성경주석).

 

세월이 흘러 이집트 왕은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강제노역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을 견디지 못해,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23절).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고통의 상황을 들으시고, 보시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24-25절). 

 

‘들으시고’, ‘보시고’, ‘생각하셨다’라는 표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24-25절). 이스라엘 자손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현재 고뇌의 탄식과 슬픔에 찬 한숨이 있습니까? 나의 소리를 들으시고 돌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월은 흐른다. 고통의 시간도 즐거움의 시간도 흐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가고 또 태어난다. 

그 오랜 세월 히브리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었다. 

쉬는 날도 없이 매일 매일 고된 노동에 병들어갔다. 

탄식의 소리를 깊어갔고, 고통의 절규는 하늘에 이른다. 

오랫동안 아파하고 소리쳤는데, 이제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생각하신다.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말의 표시다. 

사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들의 탄식을 듣고 계셨다.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있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손님으로 살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그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변호하자면, 아마도 하나님은 고통이 가중되는 순간 순간 히브리 백성들을 살피시고 인도하셨을 것이다. 참고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셨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십브라와 브아 같은 조산사에게 주셨던 지혜 같은 것 말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 히브리 민족을 돌보셨다. 그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이제 히브리 민족의 고통도 한계에 이르렀다.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때도 찼다. 

하나님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 약속 지키시기 위해 그들의 음성에 반응하신다. 

그 전에도 반응하셨겠지만, 지금 이 때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신다. 

 

탄식과 부르짖음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패다. 

탄식과 부르짖음 조차 없이 현실의 극심한 고통을 이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건강하게 그 시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부르짖어야 한다. 

 

교회는 부르짖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자신들의 고난과 고통을 주님께 아뢰고 그 고통 속에서 건져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다. 

부르짖을 수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짖음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숨과 부르짖음은 다르다. 부르짖음은 대상이 있다. 소리를 발해 그분의 구원과 구출을 요청한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는 부르짖음 도구다.

말문이 막히고 기도문이 막히면 부르짖는 것조차 힘들다.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부끄러워말자. 

그분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오늘 다시 그분께 부르짖는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늘의 기도]

주님, 말문을 열어 주소서. 

주님, 우리의 고통을 주님께 풀어내게 하소서. 

주님, 우리를 살려주소서. 

주님, 경제적 어려움, 육체적 어려움, 전쟁에 대한 공포, 왕따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살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6. 27.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5:7-20] 

7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보십시오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여러분도 참으십시오마음을 굳게 하십시오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형제자매 여러분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보십시오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앞에  계십니다.

10형제자매 여러분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 삼으십시오.

11보십시오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1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하늘이나 땅이나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다만, “” 해야  경우에는 오직 “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G7 정상회의 & J12

최근 G7 정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위기와 기후 위기 앞에서 서방세계의 리더격인 나라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1975년부터 매년 모였던 G7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가 회원국가입니다. 세계적인 군사, 경제 선진국이며,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모임에 한국이 초대받아 갔는데,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의 위상을 있었습니다. 세계 보건 위기 극복과 탄소중립을 위한 미래 산업의 선두 주자로 한국을 그들의 동반자로 여기게 것입니다. 세계적인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고 한국에게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습니다. 사실 개발도상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세계로부터 원조를 받으며살아가는 것이 어찌보면 편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의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일에 동의를 하고 전세계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살펴나가야 합니다. 한국의 뉴스 아니라 전세계 뉴스를 적극적으로 비판적 발전적으로 읽고 듣고 의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세계 리더 나라의 국민이 가져야 태도죠. 위기 속에서 한국은 리더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고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돕는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우리를 부르는지, J12 모임에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언제까지?(7-12)

- 야고보의 당부와 한계 

온갖 내외부의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야고보의 마지막 당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참으십시오

저는 말을 듣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싶었습니다. !! 언제까지 참으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주님이 언제 오신단 말입니까? 코로나 사망자 수가 391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건 공식 통계치이지 연구기관에 따라서는 숫자에 2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기후위기는 점점 우리 주위로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이상 고온 현상과 무자비한 태풍과 폭풍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통제할 없는 자연의 역습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전쟁과 이로 인한 기아와 난민수많은 고통이 지구 상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세게 들립니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인류가 겪는 고통의 소리가 전달됩니다. !! 언제까지 참으란 말입니까? 

 

이것이 솔직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말씀을 처음 읽은 수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 속에 계속 메아리치는 소리는 바로 소리였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마음의 소리를 가라앉히고,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 농부 

야고보는 농부의 예를 듭니다. 

저의 아버지는 작은 농부셨습니다. 주인이 관리하지 않는 , 거의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 없는 중턱에 매일 올라가 고랑과 이랑을 파고 물길을 만들고 방울토마토, 고추, 상추, 배추, 가지, 호박,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셨습니다. 마석 아버지 집에 다녀올 때마다 그동안 키우신 채소들을 얼마나 바리바리 주시는지, 결국 이상을 장인장모님께 드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태풍이 올라와서 그동안 자랐던 온갖 작물들이 망신창이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안따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날 밭에 가셔서 나무가지로 지지대를 세워 넘어졌던 작물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떠내려간 것들도 많았고, 물이 넘어 많아 섞은 것도 있었지만, 살릴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려서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서 밭을 망가뜨렸다는 겁니다. 밟고 지나가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으셨습니다. 망가진 것들은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자주 겪는 일처럼 익숙하게 열매가 맺히고 먹을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가꾸시고 돌봤습니다. 

 

농부는 기다릴 압니다. 그러나 온라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설교문을 쓰기 위해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컴퓨터가 너무 느린 겁니다. 커서가 멈춰서 몇초간을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짜증이 몰려 옵니다. 순간 핸드폰을 집고 다음 뉴스를 검색합니다. 10초의 짧은 시간도 기다리게 하는 컴퓨터가 아주 짜증스럽습니다. 하지만, 땅의 소출, 밭의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들은 기다릴 압니다. 하루 하루 별로 자라는 같지 않은 농작물을 보면서 매일 기다립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농부의 태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부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 예언자들 그리고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기다렸는지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받았던 구약의 이사야, 미가, 예레이먀, 에스겔 등의 많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메시아 만나기를 고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몇백년이 지난 후에 메시아 예수님이 오셨죠. 

 

참고 견디는 데는 욥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참고 견뎠습니다. 재신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자녀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잃었습니다.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복시킬 것을 소망하면서 참았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에서 인내의 대명사 격인 대표적인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참고 견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 

언제까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견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시련도 이겨내고, 내부의 시험도 통과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최소한 야고보는 대목에서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오지 않으셨거든요. 2천년이 넘도록 오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니 답답합니다. 농부의 마음과 태도도 이해가 되고, 구약의 예언자나 욥의 태도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2천년은 너무 오랜기간이라 뭔가 아리송합니다. 

 

=> 한숨과 소망 

정말 야고보의 말은 소망을 주는 같지만 편으로는 한숨만 나오게 합니다. 도대체 주님의 재림은 언제쯤 일어난단 말이야.. 이런 한숨의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나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은 언제든지 죽습니다. 죽음 다음은 그분의 재림이며 심판입니다. 죽음은 통제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갑작스럽게 죽든 병에 걸려 천천히 죽든 죽음을 피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장수마을의 최장수 할머니도 150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그분의 재림의 순간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재림은 개인에게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 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대 교회 야고보 시절 그리스도인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기다림의 시간의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100년이 안됩니다. 인생의 기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 기다리는 방법_찬양과 기도(13-18)

야고보는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바로 기도와 찬양입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기다리다보면 고난 속에서 고통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야고보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즐겁고 기쁜 순간에는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을 향한 행동입니다. 기도나 찬양이나 인생의 굴곡에서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1) 고난 기도(13)

먼저, 우리는 고난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상의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이뤄지지 않을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외부적 환경 때문에 내면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일들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국제 경기 때문에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이것도 고난입니다. 돈이 충분치 결혼을 미루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 그것도 엄청난 고난입니다. 군대에서 겪는 수많은 수모도, 직장에서 겪는 숱한 어려움도 고난일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일상적 고난 아니라 현대사회는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아니라 초림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사역하시다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말이죠. 이게 고난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2)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14-15) 

둘째,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4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그리고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15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것이니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병든 시기는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병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병의 원인을 알게 해달라고, 좋은 의사와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게 달라고, 환자의 생활 습관이 바뀌어 병이 온전히 치료될 있게 달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 시절에는 손만대고 기도하면 낫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고, 바울고 그랬습니다. 이적,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죠. 하나님 나라가 땅에 왔음을 확실히 알려주는 광고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이적과 기적이 일어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좀더 다양하게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병원, 좋은 의사를 만난다거나 적절한 약을 처방받는다거나 나에게 맞는 치료법을 발견하게 된다거나 등등우리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과정에는 공동체적 기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병자에게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은 정말 믿음의 기도가 병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까? 때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습니까? 그럼 기도하게 되고요 기도 부탁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고 있습니까? 그럼 기도 부탁을 받아도 기도하지 않고요, 기도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3)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16) 

셋째, 죄의 고백을 통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15b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것입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진심어린 죄의 고백은 서로를 위한 기도를 낳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전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예수님의 용서를 선포할 있습니다. 그렇게 용서는 더욱 현실이 됩니다. 과도한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사회법 상의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영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그분께 다가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죄의 고백과 서로를 위한 기도는 용서를 경험하게 줍니다. 

 

4) 의인의 기도(16b-18) 

넷째, 의인들의 기도를 통해 인내합니다. 

 

16b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효력을 냅니다.

17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비가 오지 않도록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하늘이 비를 내리고땅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야고보에게 엘리야는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인생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반대자의 암살 시도를 뚫고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 의인들의 기도는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님들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5) 그리고 찬양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때때로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하라구요. 그렇습니다. 찬양하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들을 우리는 기뻐할 있습니다. 기쁨을 우리는 찬양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신실한 선교사님을 찾아 그의 기도 편지를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조금씩 후원해 보십시오. 그의 기도편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보십시오. 

 

=> 오래 기다리기 위해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기다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고난 속에서, 병든 자를 위해,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때로 기적적으로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때마다 찬양합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오랫동안 기다릴 있습니다. 

 

3. 언제까지!!(19-20) 

- 진리를 떠나는 사람들 

편지는 이제 끝이 납니다. 야고보는 흔한 인사말도 없이 세계 교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그의 간절함과 시급함이 묻어납니다. 그는 진리를 떠나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을 보고 있습니다. 

 

19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누구든지 그를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20 사실을 알아두십시오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많은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믿음과 실제적인 행동으로 구원의 대열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다시 유대교의 덫에 빠져 버렸습니다. 누구는 혼합주의의 마약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누구는 이방의 신들을 다시 섬기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 돌아서게 하는 사람들

야고보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보다 시급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진리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다시 설득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편지 시종일관 이렇게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안따까움으로 가득합니다. 때로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돌아오라고 벗어나지 말라고 애타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시험을 이기라고, 시련을 견디라고 말했습니다. 행함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니 구체적인 실천을 하라고 목이 터져라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말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경고했습니다. 특히 부자들의 말과 행동을 조심할 것을 지적했죠. 모든 것이 진리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한 그의 목회적 관심이 녹아 있었던 겁니다. 

 

4. 나가며 

- 리더로의 부르심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달에 걸친 야고보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를 리더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리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은 특별히 그의 그런 의도를 매우 강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분노와 비방을 멈추고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리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죄의 자리에서 돌아오게 도움을 있는 리더의 출현을 야고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야고보서는 리더 훈련의 최고 교재였습니다.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야고보의 부르심을 느끼게 됩니다. 리더로의 부르심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청년부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청년들에게 다가가서 진리로 돌아올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리더가 되어 주세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리더가 되어 주세요. 

리더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리더가 되어 주세요. 

 

여러분 모두가 리더가 되어 죄에 빠진 사람들을 돌보는 리더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을 있도록 기도합시다. 의심하는 마음보다 확신에 거할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의심이 더욱 각광받고 비판이 더욱 우대받는 세상에서 확신에 거하고 건강한 확신을 유지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나요?    

 

2. 기도와 찬양을 통해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야고보는 추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삶을 돌아봅시다.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의 정도는 어떠한가요? 찬양할 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마음 속에 있나요? 

2021 04 29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나는 예수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그대의 사랑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6그대의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을 그대가 깨달아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7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3). 바울은 빌레몬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면서, 그가 믿음과 사랑 가운데 자라가고 있다는 소식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4).

 

바울은 빌레몬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또한 그는 빌레몬의 섬김으로 인해 위로와 힘을 얻고 있다고 고마움을 표현합니다(6-7). 누군가 영적으로 성장하며 자라가길 기대하며 사람을 위해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주변에 주님을 알아가며 사랑함으로 자라가길 소망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품고 기도해봅시다.

 

——

편지를 통한 교제

 

1. 가정 교회, 그리고 편지

 

2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다. 도시의 몇몇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10명에서 30 정도의 작은 규모의 교회였을 것이다. 

성도의 가정에 모여 성만찬을 실행하고 저녁 식사를 먹는다. 처음오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식사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이도 하고 찬양을 부르기도 한다. 가정교회에 전달된 사도들의 편지가 있다면 편지를 전체 앞에서 읽고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 토론으로 번지기도 한다. 어제 읽었던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로버트 뱅크스, IVP)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로버트 뱅크스,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IVP

www.ivp.co.kr/books/book_detail.html?book=s01&idx=1255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Going to Church in the First Century

www.ivp.co.kr

바울과 디모데는 이렇게 빌레몬 가정 교회에 편지를 썼다. 

지금이야 직접 가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고, 최근에는 온라인 실시간 대화가 되는 시대이니 전혀 다른 역동이 일어나곤 하지만, 빌레몬이 살던 시대에는 편지가 아니고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소식이나 메시지를 들을 없었을 것이다. 

편지를 쓰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이고, 전달하는 , 그리고 함께 모여 읽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드는 일일 것이다. 

모든 의사소통 행위가 일종의 이벤트다. 

 

바울과 디모데는 편지 목회를 하고 있다. 

빌레몬과 그의 교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않고서야 편지를 기록하고 그것을 오랫동안 전달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때로 글은 오해를 낳기도 하기 때문에, 편지가 어떤 교회에 분란을 낳을 수도 있다. 토론하다가 마음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직접 방문해서 자신의 의도한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 

이런 부작용이 있음에도 바울과 디모데는 편지를 써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았고 실제로 썼다. 

현재 신약의 서신서들이 이런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아마도 많은 편지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성경이라고 확정되기 전에 많은 편지들이 회람되었을 것이지만, 어떤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전체 신앙 공동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을 수도 있다. 

 

나에게 편지는 많은 시간, 에너지, 그래서 사랑이 들어가는 행위이다. 

편지를 쓰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오해나 불신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나, 단어 하나, 이모티콘 하나에 민감해진다. 

편지는 기록에 남는 것이니만큼 더욱 조심스럽다. 

하지만, 정돈되고 정갈한 언어로 사랑을 담아 격려와 권면을 하기 위해서는 글로 편지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 

두고 두고 읽으면서 음미할 있다. 

 

 

2.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기 

 

4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어떻게 기도생활을 했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내가 그동안 해오던 기도 생활과 비슷할까 아님 전혀 다를까? 

베드로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 시간을 가졌다. 사도행전 3 1-2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보인다. 

정기적인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마치 어떤 예식처럼 기도 시간을 지켰던 같다. 

바울과 디모데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마다, 혹은 혼자서 기도 시간을 지킬 때마다, 그들은 빌레몬 가정 교회를 떠올렸다. 

빌레몬 가정 교회의 성도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렸다. 

함께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대화, 그리고 함께 먹었던 식사 등을 떠올렸다. 

 

기억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좋은 도구다. 

기억하지 못하면 정보가 부족하면 제대로된 기도도 드릴 없다. 

제대로된 격려와 권면도 불가능하다. 

사람에 대한 기억을 높여야 한다. 

함께 했던 추억, 함께 먹었던 음식, 그의 인품과 개성, 그의 열정과 은사가능하면 섬세하게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그동안 부분에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때로는 기억을 주관하시도록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기독교의 기억의 종교다. 

머리를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 그분의 가르침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성만찬은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돕는다. 

성령님도 예수님을 기억하는데 일조하신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기억한다. .

 

그리고 기억의 방식은 결국 형제자매들에게도 이어진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그들의 삶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사랑을 계속 복기한다. 

그렇게 기억이 뚜렷하면 할수록 영성적으로 도움이 된다. 

 

 

3. 믿음, 사랑

 

5나는 예수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그대의 사랑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편지니까 의례 하는 말로 들릴 있다. 

하지만, 바울과 디모데는 빌레몬 가정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행위에 대해 듣고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빌레몬의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기억하게 되고, 기억하다 보면 묻게 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동안 과정을 내가 간과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은 과도한 개입으로 가는 길이라 여겼다. 과도한 개입은 자칫 험담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균형을 잃은 판단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아예 적당히 알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묻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 행위는 자녀들의 상황을 계속 묻고 듣고 알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다. 

지금처럼 수많은 변화를 맞닥뜨리는 코로나 상황에서 자녀들이 겪고 있는 숱한 변경/수정/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가고 기억하고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있다. 

 

바울과 디모데는 빌레몬 가정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컸고, 이는 그의 기도제목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빌레몬 가정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귀를 세우고 듣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빌레몬 가정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빌레몬서를 계속 읽고 묵상하다보면 힌트가 나올 지도 모른다. 

그런 힌트를 찾아가는 매일 매일의 묵상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울의 기도에 주목하게 된다.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지길 기도하고 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님이 더욱 분명해 진다. 

믿음은 사귐을 동반한다. 지적인 동의를 넘어서서 인격적 신뢰를 바탕으로 사귐의 단계에 이른다. 믿음의 성숙은 사귐의 성숙과 관련된다. 

이성적 판단이 믿음의 전체가 아니다. 감정적 반응과 의지적 결단이 동시에 수반되는 전인격적인 역동이 믿음이다. 그러니 사귐이 일어난다. 사귀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사귐이 없는 믿음은 자칫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빌레몬의 사랑은 바울을 크게 기뻐하게 만든다. 빌레몬의 사랑의 행위는 소문이 자자했을 것이다. 

사랑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격려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더욱 사랑의 실천을 행하도록 동기부여 했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과 격려가 사라지면, 공동체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서로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계속되어야 한다. 

 

——

새롭게 빌레몬서로 묵상하도록 인도하신 예수님, 

구절 하나 하나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또렷이 바라보게 됩니다. 

속에서 예수님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셨는지 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서로를 향한 기도가 이어지고, 믿음과 사랑의 소식이 전해지고, 기쁨이 드러나는 이런 관계를 맺게 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저에게도 이런 관계가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믿음의 사귐이 깊어지고, 사랑의 소문이 많아지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냇가에 심은 나무 > 빌레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몬 1:8-25_오네시모를 위한 부탁  (0) 2021.04.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