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01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31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로 내려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으니, 그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그 때에 그 회당에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34 “아, 나사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3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귀신이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다가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는데, 그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았다.

36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서로 말하였다. “이 말이 대체 무엇이냐? 그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구나.”

37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모든 곳에 퍼졌다.

 

ESV 

And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36절)

 

주석

악한 귀신의 영(34절) 마귀들은 종종 마술과 연관되었으며, 마술사들은 다른 영적 세력의 이름을 불러서 그 세력을 진압하려 했다(IVP 성경배경주석).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힙니다(31-34절).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십니다(35절).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와 능력에 놀랐고, 예수님의 소문은 근처 모든 곳에 퍼졌습니다(35-37절).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눅 4:18-19)대로 악한 귀신의 영에 포로 되고 억눌린 사람이 해방됩니다. 악한 귀신의 영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떠나갑니다(35절).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가운데 권위 있는 영향력과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활동합니다. 내 일상에서 악한 죄의 영향을 받는 영역(불신, 은밀한 죄 등)을 살펴보고, 말씀의 권능으로 내 삶에 자유와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권위있는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분이 가르치는 자세와 풍기는 이미지, 집중시키는 힘,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 이런 것에 놀랐던 모양이다. 

당시의 권위라면 무엇을 떠올렸을까? 

이걸 연구하는 것도 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르침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권위는 성령님의 역사하실 때 생기는 권위다. 

확신에 찬 눈빛과 말투 그리고 몸짓, 물론 이런 외형적인 것만으로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히 다른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 

고향에서는 배척당하셨고 죽을 고비를 넘기셨지만, 갈릴리 가버나움에서는 다른 역동이 일어나고 있다. 

고향에서도 그분의 모습과 태도에서는 권위가 있었겠지만,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버나움에서는 예수님의 권위에 모두들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권위있게 가르칠 수 있는가? 

예수님과 똑같을 수야 없겠지만, 그분의 권위를 배우고 싶다. 

가르침의 내용 뿐 아니라 가르침의 권위도 닯고 싶다. 

 

2. 귀신을 내어쫓으심 

회당에서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실 때, 악한 귀신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었다. 

이 부분도 이해가 안되는 지점이다. 

악한 귀신은 무엇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가? 

예수님 앞에 있어봐야 자기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악한 귀신에 영향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었다. 

권위있는 가르침에 함께 놀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한 영이 강하게 활성화가 된다. 

큰 소리로 외친다. 

“왜 우리를 간섭하나요? 우리를 없애러 왔나요? 당신은 하나님이 보낸 거룩한 분입니다. “

자멸의 길을 걷는다. 

예수님이 가만히 둘 거라 생각했나?

악한 귀신이 미친 건가?

몇 가지 힌트가 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과 권위를 지켜보던 귀신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2) 귀신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권위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귀신에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4) 예수님이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려는 의도 있었을 수도 있다. 

5) 일부러 사람들 사이에서 큰 소리를 지름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 어쩌다보니 발각된 것. 

둘,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 

현재로서는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악한 귀신들도 전략적인 사고 체계를 가진 영적 존재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숙주 같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더라도 예수님의 정체를 빨리 밝힘으로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계획이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지만, 그 사람을 고치는 일에 집중하신다. 

 

악한 귀신은 사실을 말했지만, 그 의도는 악했다. 

유혹으로 이기지 못하니, 물리력을 행사하려고 했고, 그게 안되니 이제는 예수님이 하려는 일에 방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악한 영의 유혹과 물리적 공격과 방해공작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다. 

이걸 이기는 길은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닥쳐 여기서 떠나가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마귀를 대적하라. 

 

야고보서 4장
7_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_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베드로전서 5장
8_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_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예수님도 야고보도 베드로도 말한다.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한다. 

악한 영의 유혹과 시험과 핍박과 장난과 훼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3. 하나님 나라 확증 

권위있는 가르침과 악한 영의 제압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증거다. 

그분의 나라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구출하는 일로 시작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제 강력하게 이 세상에 임했다. 

사단과 악한 영의 세력은 더이상 예수님의 말씀에 대적할 수 없다. 

그분의 사역 뿐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더욱 강력하게 사단을 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마치 영적인 세력이 없는 것처럼 속이지 말라. 

마치 영적인 세력으로 둘러 쌓여 있는 것처럼 속이지 말라. 

양 극단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임하면, 사단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렇다고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아니다. 

허나 현저히 줄어들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권위있게 선포하되, 때때로 찾아오는 악한 영의 공격을 대적해야 한다. 

 

4. 오늘날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축사

양쪽 극단으로 치우는 것은 큰 사단이 원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으로 도망하려고 한다. 

섬기는 것도 도망하는 것도 문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되, 때때로 악한 영을 대적해야 한다. 

큰 대회를 앞두고 있다. 

악한 영의 공격을 예상할 수 있는 시기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영적으로 무장해야 하는 시기다. 

 

예베소서 6장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고, 끝까지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바울도 마귀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도 전쟁을 선포한다. 

감각을 키우고 레이더를 작동시켜라. 

 

[오늘의 기도]

주님,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게 하소서. 

악한 영의 공격에 대응합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물리적으로 공격하고, 사역을 훼방하는 악한 영의 세력에 맞섭니다. 

그리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비밀을 끝까지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대리통치자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해주세요. 

 

복음밥, 전국수련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달 남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도록 도와 주세요. 

최전선에서 학생들을 설득하는 간사들에게 힘을 공급해주세요. 

학생 리더들을 붙잡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6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7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NIV

Instead, we were like young children among you. Just as a nursing mother cares for her children(7절),

 

주석

고난과 모욕(2절) 바울과 그의 동료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기 직전에 빌립보에서 능욕을 당했다. 그들은 공판도 받지 못한 채 공개적으로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았다(행 16:22-23)(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2절).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불순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3-4절). 바울은 사람의 환심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내어줄 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6-9절).

 

바울은 복음을 대하는 정직한 자세와 교인들을 향한 인격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증인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사람의 환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바울의 자기 고백이 눈에 들어온다. 

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과 진심을 알아 주길 바랬다. 

그것이 진심이 통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사이의 신뢰요 존경이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과 진심을 알 길이 없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음흉할 수도 있고, 간계를 꾸밀 수도 있고, 아예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진심을 자꾸 표현해야 한다. 

거짓으로 속이지 말고,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지 말고, 자신의 정직한 마음을 말해야 한다. 

그게 나와 남을 위하는 길이다. 

옹색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사회 생활이라는 것, 소통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영성적으로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영성적으로는 많은 말은 자칫 자신과 남을 속이는 행위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고, 무엇보다 침묵 속에서 인간의 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미지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침묵기도가 중요한 이유다. 

자기 표현이 자칫 생각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글도 그럴 수 있다. 

싸질러 놓다는다는 표현이 있다. 

자신의 본능적 감정과 피상적 생각이 막 던져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 이면의 생각과 본질을 찾으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4절)은 사람이 던지는 말과 글로만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그 마음의 열정과 진심을 보신다. 

 

그렇지만, 문제는 사람들과 같이 사역을 해야 하는 사역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영성적으로만 지낼 수 없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나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좋다. 

 

그 이상이 있다. 

이런 정직함이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가? 

아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인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의 요소이겠으나, 인간은 미묘하고 복잡한지라, 표현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고 주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이용한다. 

그래서 말이 많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사람들 중에, 그 표현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이목에 중독되고 그 인기에 함몰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작한 일도 어느새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른다.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초심을 지키는 사역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바울도 많은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파들을 만드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기쁘시게 해야 했다. 

인기가 많아질 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정직한 자기 고백과 인기 상승에 대한 경계… 이 둘 사이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 권위가 아니라 유순함으로

바울은 충분히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헌신, 그의 개척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위대한 사도의 반열에 올랐다. 

교회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고, 그 권위에 맞게 대우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대하듯, 유순한 사랑의 말로 성도들을 대했다. 

명령할 수 있었지만 부탁을 했고, 강권할 수 있었지만 설명과 설득을 했다. 

물론 그의 편지 곳곳을 살펴보면 때로 엄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에도 그런 강경함이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해 유순하게 듣고 말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생명조차 내 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사랑이면 거의 예수님의 사랑이다.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으로 섬기고 있다. 

성도들이 매우 사랑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1장에서 드러난 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닮아가고 있었다. 

예수님을 당연히 주님으로 모시고 본받았지만, 그 구체적으로는 바울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울 입장에서는 그 성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고난 속에서도,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그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나온다. 

권위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 

온순함으로 대해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권위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위를 뛰어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를 온유하게 대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다면, 그는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성도들이 성장해서 어떤한 환란과 핍박에도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역자들의 소망이요 꿈이다. 

그 소망과 꿈이 현실에서 이뤄질 때, 사역자는 자신의 생명 만큼이나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사랑이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가르치는 자는 꿈을 꾸고, 배우는 자는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면, 사랑은 더욱 커진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면, 이젠 가족만큼이나 사랑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꾸는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누가 뺏어 가겠는가!!

 

[오늘의 기도]

예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는지 생각합니다. 

 

작고 적은 존재지만, 저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의 인기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저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가 많아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주님을 따라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0일 월요일

 

여는 기도

영광의 아버지시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5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6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7 우리는 여러분이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격자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9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0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를 하는 것은, 내가 가서, 주님께서 주신 권한 가지고 사건들을 처리할 때에, 너무 엄하게 대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NASB

For we rejoice when we ourselves are weak, but you are strong; this we also pray for, that you become mature(9절).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해 봐야 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격자입니다(5절). 바울의 소망은 고린도 교인들이 옳은 일을 행하며, 진리 안에 강하게 서는 것입니다(7-9절). 이 편지의 목적도 고린도 교인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10절).

 

바울은 충분하고 끈질기게 자신을 소명했습니다. 그를 의심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의심해야 합니다. 약하고 어리석다는 사실은 실격자를 가르는 척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강해집니다. 나의 믿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 안에서 강하고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스스로 시험&검증

바울은 성도들에게 스스로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요청한다. 

무엇보다 그 시험과 검증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확신이다. 

예수님은 성도들 마음 속에 거하면서 성도들을 변화시키신다. 

예수님의 숨과 영이신 성령님은 성도들 내면에서 성도들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로 만드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 예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합격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교회에는 나오지만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하고 있는가?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고, 대답해보고, 시험하고 검증해야 할 일이다. 

 

자신을 속이면서 대답할 일이 아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바울은 몇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1) 자신 안에 예수님을 인식

2) 악을 저지르지 않음

3) 진리를 위해서 일함

4) 완전함을 향함

5) 자신 뿐 아니라 상대의 성장을 도모함

예수님을 안에 품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있다.

악을 일부러 저지르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위해 일한다. 

진리를 거스르는 일을 거부한다. 

점점 완전해지길 위해 노력한다. 

물론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의 성장을 기뻐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이런 기준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2. 성도를 세우는 권위

바울은 자신이 권한과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다른 사도들의 권위와 견주어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그것을 인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 권위는 단순히 설교를 위한, 사역을 위한 권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권위였다. 

성도들을 징계하고 꾸중하고 판단하는 권위가 아니라,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옳은 일을 하도록, 더욱 완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권위였다. 

권위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기준을 마련하고, 급기야는 자신 맘대로 기준을 바꾼다. 

자기가 만든 기준도 기분따라 바꾼다. 

권위가 없으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건강한 권위, 사람을 살리는 권위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과 사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권위자로서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잘못이 교회에 너무 큰 문제가 되면, 적절하게 치리, 징계, 권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교회로부터 떠나가게 만드는 조치가 아니다. 

그 사람이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지도록 돕기 위함이다. 

권위를 가지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권위자는 더욱 정결하며 높은 도덕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말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와서 잘잘못을 분별하고, 엄하게 치리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봐야 했다.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바울도 스스로 그러해야 했다. 

 

자신을 권위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 권위를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쾌락을 쫓아 권위를 남발한다. 

위계를 사용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종속시켜버린다. 

가스라이팅, 그루밍… 범죄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은 권위자를 멀리하기에 이른다. 

제대로된 권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세우고 돕는 권위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슬픈 현실이다. 

슬프지만, 실제요 현실이다. 

 

나는 과연 자신있게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권위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의 질문이자 반성이다. 

 

[오늘의 기도]

참된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권한과 권세를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참된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권위의 본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 

저도 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고 세우는 일에 더 깊이 헌신하게 하소서. 

저에게 권위가 있다면 공동체를 세우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사용하도록 도우소서. 

억지로 함이나 짜증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 완전이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결함이 아니라, 많은 일상의 문제들 속에서도 주님의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아오셨듯이 저도 주님을 따라 매일의 일상의 일들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의 큰 계획을 마음에 품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3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7 여러분은 겉모양만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면,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8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내가 좀 지나치게 자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9 나는 편지로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로 쓰는 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석

겉모양(7절) 고린도인이 겉모습을 지나치게 중요시한 것은 궤변론자들이 적당하고 설득력 있는 말에만 신경을 썼던 것과 비슷하다. 더 부유한 고린도인은 바울이 자신들의 문화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격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겉모양만 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합니다(7절). 바울의 권위는 겉모양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권위는 사람을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8절).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고린도 교회를 대했습니다(9-11절). 

 

사람이 보기에 바울의 겉모습은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 또한 당시 헬라의 웅변가들과 비교했을 때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관용과 사랑과 헌신을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담대하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세우기 위한 권위였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힘과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여전히 사람들은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단순히 웅변가, 달변가가 아니라, 재밌으면서도 의미있는 메시지를 잘 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대중 강연자로 나서는 사람들은 대체로 재밌고 메시지가 뚜렷하다. 

세바시, 테드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 계의 전문가 이기도 하지만 전달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김미경, 김창옥, 설민석 등의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이제 유투브를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 

 

바울 시대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나보다. 

사람들은 희랍의 여러 철학자들, 웅변가들, 소피스트 들의 말을 더 재밌고, 권위있게 느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관점으로 바울을 평가한다. 

달변이 아닌 것을 넘어 도리어 말 주변이 없다고 평가한다. 

한 두 사람의 평가를 이렇게 편지에 담지는 않았을 터. 

게다사 한 두 사람의 평가가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고린도교회 지도급의 사람들 사이에서 바울에 대한 비슷한 평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이 바울에게까지 들렸고, 바울은 아쉽고 슬프고 약간 뽐새가 빠지는 말이지만, 자기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다.

자기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바울에게는 무척 아쉽고 안따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건강한 권위가 필요했다.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집중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바꾸어야 했다. 

누군가는 크게 혼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교회를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단, 사이비를 분별하고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그 때 사용되는 권위가 건강한 권위이다. 

교회를 세우는 권위다. 

성도들을 보호하는 권위다. 

권위자의 안위가 아니라 성도의 안위를 위해 사용되는 권위이다. 

 

바울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평가가 있었다. 

글은 힘이 있어 보이지만, 실상 만나면 말주변이 없다는 식의 평가다. 

바울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언급한다. 

편지에서의 말과 실제 행함에서의 일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비판자들은 글과 말이 다르다고 비평하지만, 바울은 말과 일의 일치를 언급한다. 

이 지점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말이나 글이나 지적 작용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내면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행함은 나를 넘어서는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일어난다. 

말과 글은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행함이 진정성을 드러낸다. 

말과 행함이 일치한다면, 그것은 성인에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글과 말은 사람마다 개인적 특징이 있고 능력에 차이가 난다. 

핵심은 말글이 자신의 행동과 일치하느냐이다. 

로고스만 아니라 에토스가 따라와야 한다. 

말이 실천적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진정성을 어떻게 확보하겠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써야 한다. 

사실의 적시야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위적 언명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해야 한다” “하라” 등의 문장과 말을 했을 때는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게 설교자의 고문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말과 글로 고문을 당한다. 

그 높은 기준을 스스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르치면서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피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로 강조하는 사람들이 설교자다. 

 

바울은 자신이 말한 것을 어느 정도는 잘 지켜내고 있었던 것 같다. 

복음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서도,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진정성은 주변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였다. 

그렇다고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것이 있었기에,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도 쓰고, 곤고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다고 모든 편지에 절절히 썼다. 

자비량 선교사로서 사람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거보다 더 대단한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거룩으로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고백한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이다. 

 

자신이 말한 대로, 글 쓴대로 사는 사람들이 존경받아야 하고, 대우 받아야 한다. 

그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 

말글과 행함이 일치하는 사람.

그 일치를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는 사람. 

나의 원너비다. 

쉽지 않으니 고문과도 같지만 말이다. 

기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의 말과 글이 저의 행동과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게 해 주세요. 

그것 또한 제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매주 하는 설교, 매일 쓰는 묵상글… 

모든 것이 기록에 남습니다. 

부끄럽고 또한 두렵습니다. 

제가 한 말과 글로 저를 평가한다면, 생각조차 두렵습니다. 

최선을 다해 매일 노력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오늘 저녁에 예배가 있습니다. 

Youth-worship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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