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7 14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옷을 사서 입고,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20 보아라, 내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석
라오디게아(14): 라오디게아는 리쿠스(Lycus)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개의 제국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풍부한 상업 행정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도시에 대해 로마 세계 전역에 알려져 있던 가지 점이 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우선 도시는 은행업무의 중심지였다. 다음으로 도시는 의복과 양탄자를 생산했다. 그리고 곳은 의학을 공부하는 학교가 있었으며 약품을 생산했다. 특히 지역 돌을 분쇄하여 만든 안약은 유명했다(IVP 성경주석).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15-16절). 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고 살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부유함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18절).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열정을 내고,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19절). 왜냐하면 주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0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을 열 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함께 먹으며 진정한 교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풍성하고 친밀한 교제로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

 

재정적으로 풍족하다. 

사회기반 시설이 갖추어져있다. 

사고 싶은 것은 맘대로 있다. 

누릴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이마트도 있고, 각종 놀이 공원도 많다. 

주말마다 놀러갈 있는 환경이다. 

선물로 살만한 물건들이 널렸다. 라오디게아 도시에서 생산되는 뿐만 아니라 로마 통치 전역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에 사람들의 눈의 휘둥그레진다. 

교회도 비교적 다른 교회들보다 여유롭다. 

사람들이 돈이 많아서 그런지 관대하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는 같다. 

돈이 풍족하니 마음도 여유로운 같다.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상업의 중심지, 교역의 중심지로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정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물건, 좋은 상품을 찾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인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야 이문이 많이 남는다. 

 

자연스레 물질적 풍요는 영적 정신적 나태함을 낳는다. 

처음 라오디게아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는 예수님 삶의 신비로움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세상의 좋아보이는 물건과 상품들이 유입된다. 

눈에 보이는 표피적 즐거움에 많이 노출된다. 

상품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기이한 물건과 함께 이야기가 같이 들어온다. 이야기와 함께 문화가 들어온다. 

그렇게 풍족함이 만드는 안이함과 세속적 유혹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자연스레 복음에 대한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더이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매주 모일 자랑하는 신기한 물건과 재미진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교회에 안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즐겁고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들이 넘쳐난다. 

풍족함이 주는 여유와 즐거움이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의 자리를 차지한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영적 상태 

특별한 고난도 없고, 도전적인 목표도 상실했다. 

점점 교회의 모임은 사교 모임화되고 복음의 열정은 모임이후의 식사 교제로 대체된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을 알고 계시다. 

그분은 인류 보편적 정서를 누구보다도 알고 계시는 영원부터 계신 분이시다.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14절)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처음에는 돈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어느 순간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돈이 목적이 되고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순간, 수많은 악이 뻗어 나온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의 죄악이 거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풍족하기에 다른 가난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했을 것이다. 

누가 보면 매우 거룩한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계신다. 

 

그들은 진정한 금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벌거벗고 있다. 

그들의 눈은 심히 어두워져 있거나 만화경 속에 갇혀 있어서 진리를 없게 되었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영적 비참함을 깨닫는 것은 일상적 예배 행위로는 불가능하다. 

영적 가난함을 깨닫는 것은 강력한 폭로로 가능하다. 사랑의 경고, 사랑의 들춤으로 가능하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예수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정한 부를 쌓기 위해서는 불에 정련된 , 불같은 고난을 인내로 통과한 금을 사야한다. 

시중에 돌고 있고, 은행가면 있는 그런 금이 아니다. 

비트코인이나 국가채권, 주식으로 있는 금이 아니다. 

불로 연단된, 다져진, 정련되어 깨끗한, 영적으로 순수한 금을 사야 한다. 

고상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 고난이 찾아온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 목표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핍박이 다가온다. 

고난과 핍박을 인내하고 속에 거하다보면 어느새 신앙이 정련된다. 

죽음 앞에서도 끄떡없는 신앙이 된다.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된다. 

사울의 무차별적 추적에도 절망하지 않는 다윗의 신뢰를 갖게 된다. 

 

둘째, 쾌락으로 훌러덩 벗겨진 적나라한 자신들의 실체를 거룩한 옷으로 가려야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겠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 

세속적 쾌락에 더이상 기웃거리지 말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 생각과 행실을 재조정해야 한다.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옷을 입자.

 

셋째, 예수님의 침으로 만든 거룩한 안약을 눈에 발라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야 한다. 

영적으로 점점 무지해진다. 

분별이 어렵다. 

무엇이 참된지 거짓인지, 바람직한 것인지 버려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좋은 상품, 신기한 상품에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영적인 실제를 보는 안목은 점점 줄어든다. 

사단의 교묘한 술책과 계략을 눈치채지 못한다. 

즐거움이 눈에 얇은 막을 씌우고 눈은 점점 멀어간다.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가르침이 주는 분별력을 얻어야 한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바람직하고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눈이 더욱 밝아져야 한다.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책망은 싫다. 징계는 더욱 싫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요즘 시대의 정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책망과 징계를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끝까지 참고 수용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아니냐고 도리어 분노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내내 예수님은 책망하고 있고, 징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계신다. 

그래서 요한게시록을 읽기 싫어진다. 

복음서가 좋다. 

로마서 8장까지가 좋다. 

무조건적인 용납이 좋다. 

책망하시는 예수님, 징계를 언급하시는 예수님은 싫다.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이며 나도 그와 같다. 

 

하지만, 영적 훈계, 책망, 때로는 징계는 현실이며 또한 바람직하다.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된다. 

때로는 엄하게 훈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전이 없다. 

끝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아이들을 무조건 받아 줄수만은 없다. 

밥은 먹어야 하며, 잠을 자야 한다. 

적절하게 유툽을 시청해야 하며, 건널목에서는 뛰면 안된다. 

혜강이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 어쩔 없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망과 징계를 한다는 말은 실제이기도 하고 지극히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분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징계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판사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판사의 훈계와 징계에 무조건적으로 반발하면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물며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판단에 너무 많은 토를 달아서는 결국 나만 손해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이러쿵 저러쿵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이다. 

산상수훈으로 돌아가라. 평지 설교로 돌아가라.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5개의 설교에 집중하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비유에서 교훈을 찾고 예수님의 성품을 그리고, 나아가 그분의 홀로그램을 완성하라. 

그분의 홀로그램 속으로 나와 세상과 공동체를 투영하라. 

그분의 생각으로 필터를 만들어 수많은 메시지를 걸러라.   

구약의 메시지를 걸러라. 영화, 드라마, 노래들의 메시지를 걸러라. 

필터를 항상 띄워두라.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동안 문장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할 사용했었다. 

그러나 윗문장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상당히 엄하고 가르침과 권면이 많은 예수님이시다.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가 밑천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분은 사랑하기 때문에 문을 두드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들어와서 함께 식사하길 원하신다. 

물론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뭔가 권면하실 같긴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하라면 하지 , 히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냥 분명하게 하라고 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리저리 고려하거나 재지 말고 머리굴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 

그분의 가르침이 분명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면 일이다. 

 

예수님과 밥을 같이 먹고 싶다. 

부활 갈릴리에서 아침을 차려 주신 예수님을 기억한다. 

그분이 차려주신 아침 식사를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먹고 싶다. 

그렇게 조용한 아침식사를.. 

그렇게 충만함 아침식사를.. 

아침 식사 이후에 베드로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듯이. 

그렇게 책망하신다면, 책망받을 용의가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책망을 다시 한번 기대한다. 

 

나이 50 가까워지면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나도 벌고 아내도 번다. 

혹여 풍족함이 나의 신앙을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이끌지는 않는지 돌아본다. 

주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한다.   

정련된 , , 그리고 안약 

 

——

풍족함 때문에, 수많은 즐거움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소명의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세요. 

주님과 밥을 먹고 싶습니다. 

밥과 함께 권면과 책망의 말씀을 주신다면 저는 오케이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정련된 금처럼 단련되게 해주세요. 

거룩한 흰옷을 입고, 더욱 맑은 눈으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안에 있는 불만족을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컨트롤 되지 않는 상황과 

부담스런 일들의 연속 앞에서 

주님의 아침밥을 기다립니다. 

주님, 주님으로부터 오는 만족을 누릴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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