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11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1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바울은 끝으로 ‘화평’을 이야기합니다(11절). 우리는 기뻐하는 것,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는 것, 서로 격려하는 것, 같은 마음을 품는 것으로 화평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11-12절).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13절).

 

모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온전케 할 것입니다. 죽음과 어둠에 있는 자들을 위해 생명의 빛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잠재우는 성령의 사귐으로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지냅시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하는 하루를 보냅시다.

 

[오늘의 묵상]

1. 대단원의 막 

고린도후서를 이렇게 오랫동안 묵상한 적도 처음이었다.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 감정이 가장 많이 묻어나는 책이었다. 

때로는 바울의 감정이 널을 뛰는 것 같아 따라가기 힘든 적도 있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다시 하는 것 같아 불평하기도 했다. 

허나 생각해보면, 이렇게 솔직한 글을 성인에게서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솔직한 비난을 본다는 것이 행운인 것처럼 말이다. 

거룩과 정직이 함께 갈 수 있다. 

거룩은 조용함이 아니다. 

거룩은 변하지 않는 감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은 진정성과 정직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보여주셨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다양한 감정은 큰 도전이 된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큰 도전이다. 

마음 속 생각과 감정에 정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과 바울을 모델로 삼을 만 하다. 

 

바울은 긴 편지의 마지막을 몇 가지 권면으로 할애하고 있다.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라. 

서로 격려하라. 

같은 마음을 품으라. 

화평하게 지내라. 

하나같이 소중한 덕목이다. 

여전히 고린도교회는 분열의 씨앗이 존재하고, 갈등과 긴장이 있다. 

하지만, 교인들은 기뻐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있으며,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온전함과 완전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나태함에 빠져서는 안된다. 

자유는 아무것도 안할 자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물론 때로는 안해야 할 것도 많지만), 선을 행할 자유가 더 중요하다. 

온전함을 추구할 자유가 생겼다. 

그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는 자유다. 

이제는 온전함, 완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격려하라.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서로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를 응원하고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 대사로 살기 위해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이런 목표를 위해 같은 마음을 품으라. 

파당을 짓고 서로를 비난하고 나와 너가 다르다고 경계하지 말고 공통점을 찾아내고 한 마음으로 나아가라. 

그렇게 화평을 품으라. 

화평, 평화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셔서 주신 말씀이다.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다.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격정적 환희에 들떠있는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다.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그렇게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다. 

 

2. 삼위 하나님의 축복 

바울은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행한다. 

거룩한 입맞춤은 삼위 하나님의 축복이다. 

서로를 축복함으로 인사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축복으로 서로를 축복한다. 

손을 서로에게 펼치고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 넘치길 기도한다. 

고린도후서 전체를 묵상한 지금 이 시점에 이 축복이 가지는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가득한 우려와 걱정은 삼위 하나님의 축복으로 대체된다. 

우려와 걱정만으로는 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없다. 

같은 마음, 같은 노력, 같은 격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의 축복이 절실하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 꼭 필요하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공동체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분의 선물과 사랑과 긴밀한 연결이 공동체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점에도 바울은 요한의 강조를 반복한다.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 제자들이 하나가 되길 그토록 바라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말씀과 소원을 특유의 문장으로 강조한 사도 요한(요한복음 17장)의 글은 바울에게도 울린다. 

 

어느 기독 공동체나 이런 축복이 필요하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건, 조밀하게 붙어 있건 간에 기독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 

은혜, 사랑, 사귐이 가득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의 연합의 정신이 붙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 요한, 바울이 다 강조한다. 

초기 기독 공동체의 강조는 다름 아니라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거리와 상관없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성도들이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문안한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거룩한 입맞춤” 교회!! 

 

이런 축복의 마음을 품고 오늘도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의 기도]

은혜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사귐의 성령님, 

삼위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와 공동체를 축복하소서. 

하나님의 교회가 분열과 비난이 아니라 사랑과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고 인사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 안에서 기뻐하고, 예수님처럼 온전히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한 마음을 품고, 평화를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들어가길 소망합니다. 

무뎌진 마음에 찾아오셔서 더욱 온전함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소서. 

있는 척, 그런 척 하지 말고 정말 진정으로 정직하게 제 자신을 주님께 올려드리게 하소서. 

 

오늘도 부담스러운 일정입니다. 

감당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감당하도록 도우소서. 

사랑의 마음, 은혜의 마음, 사귐의 마음이 채워지게 하소서.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 

우리 나라의 역사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선거제 개혁을 위해 국회 전원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승자독식, 반사이익의 정치, 혐오의 정치가 100%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망하는 길이 아닌 서로 성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득권 정체 세력의 허리를 꺽어 주시고, 나라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지게 하소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4. 11. 

 

[본문_요한복음 20:19-31_새번역] 

19 , 주간의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0 말씀을 하시고 나서,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손을 만져 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설교]
0.
들어가며
이번 달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을 가져다 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공은 제자들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과연 이들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1. 도마의 열망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잡아다가 사형까지 집행한 유대인들의 무도함에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알고 제자들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무덤을 살피고 사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자신과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숨죽이며 유월절, 무교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평안, 평화가 있을 없습니다. 두려움은 극도의 자기 보호를 낳고, 극단적 자기 보호는 타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를 낳습니다. 배척과 혐오는 결국 전쟁의 굴레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두려움의 결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두려움은 살인을 낳지만, 국가의 두려움은 전쟁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빠져서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신(이스카리옷 유다가 배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으로 가득 제자 공동체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살아 났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성령님을 숨으로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23) 

 

그러나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오니 다락방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다락방에 오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기쁨에 얼굴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도마는 처음에는 믿을 없었습니다. 몰래카메라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마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놀리는 같아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빠진 같아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도마의 말은 그의 정서를 대변해 줍니다. 

 

25_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도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고,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도마는 악에 받친 같습니다.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는 믿을 없으니,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도마는 정말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제자만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마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는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직접 보고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직접 만져보라고 말했을 , 도마는 만져보기는 커녕, 자기를 지명하시면서 말을 걸어오신 예수님께 감격하여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2. 꾸짖음 vs. 격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장면에서 도마를 꾸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27)라거나,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8) 말씀을 비추어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꾸짖음 보다는 격려의 늬앙스로 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체 제자들 앞에 번째로 오신 상황에서 도마에게 정색을 하며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도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드러운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런 도마에게 엄하게 꾸짖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28절의 말씀은 일종의 축복과 예언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지 않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30-31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요한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고, 믿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선물로 주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마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역해야 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요, 앞으로 보지 않고 믿게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축복이었던 겁니다. 사랑의 눈빛과 목소리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3. 나의 나의 하나님

도마의나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과 쌍벽을 이룹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대적 배경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의그리스도메시야 헬라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신적 동일성을 나타내는 유대식 어법입니다. 그에 반해, ‘나의 나의 하나님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최고의 칭송입니다. “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있는 표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다신교 세계에서 유일신과의 개인적 관계를 드러내는 파격적인 어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죽였던 로마의 권력의 무서움을 뒤로하고 이제 진정한 세상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무수한 이방인들의 신앙고백 최고의 모델이 됩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4. 나가며_나의 고백은?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참조 20:16). 그러나 이제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 나의 하나님”, 세상의 주인이신 오직 밖에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 이제나의주님으로나의하나님으로 관계가 형성됩니다. 호칭의 변화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누군가를 나의 신랑/신부라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아빠/엄마로 부르는 순간, 누군가를 나의 사장/대표로 부르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 인생 최대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진실된 고백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형식에 치중된 종교 문화 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고백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생일대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구나~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제자들의 정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중에서도 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2. 도마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봅시다. 어떤 어조와 말투로 말씀하시는지 서로 나눠 봅시다.    

 

3.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요?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 종교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으로 부르고 있나요? 그분을 진심으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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