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9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21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명성에 어울리게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그지없으시니, 나를 건져 주십시오.

22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이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23 나는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져가고,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려 갑니다.

24 금식으로, 나의 두 무릎은 약해지고, 내 몸에서는 기름기가 다 빠져서 수척해졌습니다.

25 나는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멸시합니다.

26 주, 나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따라,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27 주님, 이것은 주님께서 손수 하신 일이며, 바로 주님이 이 일을 이루셨음을 그들이 알게 해주십시오.

28 그들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주님은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은 치려고 일어났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주님의 종은 언제나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29 나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뒤집어쓰게 해주시고, 그들이 받을 수모를 겉옷처럼 걸치고 다니게 해주십시오.

30 내가 입을 열어서 주님께 크게 감사드리며,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련다.

31 나를 고발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주님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ESV

For He stands at the right hand of the needy,

To save him from those who judge his soul(31절).

 

[오늘의 묵상]

**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시인의 자기 인식이다. 

가난하고 빈곤하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시인이 가난하고 빈곤하다고 할 때, 그것은 마음의 가난함이나 빈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시인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많지 않고, 입을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석양의 그림자처럼 사그라들어간다. 

하루살이들의 발버둥이 그들의 일상이다. 

겨우겨우 먹고 살고 있다. 

금식은 자발적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가난하고 빈곤하니 사람들의 놀림 거리가 되곤한다. 

 

어렸을 적, 가난으로 인해 주눅들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가난한 집의 도시락을 선생님께 갖다드리기가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다가 결국엔 못가져드린 적이 있다. 

당시 소풍 때, 반장이 선생님의 도시락을 챙겨드리는 게 의무였다. 

파출부 어머니가 주인 집 아들내미의 짜증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 서러웠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편지를 써야 했는데, 그게 부끄러웠다.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천호동으로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엇나가지는 않았지만, 가난이 싫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렸을 적, 기도를 참 많이 했다. 

가난을 극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친구들의 전도를 위해 기도했었다. 

목사님이 기도제목을 내놓는 대로 기도했다. 

기도제목은 거창하고 정당했지만, 내면은 그렇지 못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반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의 수치를 덜어드리고 싶었다. 

때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우리 부모님이 수치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로 내 뱉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그렇게 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오늘의 시편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 시편의 기도로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도 방식으로 알고 있었다면, 나도 시인처럼 기도했을 것이다. 

우리 가정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수치를 주는 사람들을 벌하여 달라고, 

그들을 혼내 달라고… 

 

지금은 솔직히 그렇게 가난하지도 빈곤하지도 않다. 

도리어 과거에 비하면 풍족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눈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맞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것이 맞다.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선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그 하나님의 시선이 지금 가난하고 빈곤하여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면, 내 시선도 그렇게 향해야 할 것이다. 

 

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라 억지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가난하지 않은데 시인에게 감정이입을 위해 나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다만, 나도 언제든지 가난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이가 더 들면 더 가난해 질 수 있다. 

노후를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분명 완벽한 준비, 충분한 준비를 할 수는 없다.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어쨌든, 언제든지 가난해 질 수 있으며, 언제든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할 수 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도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그 때, 이 시를 떠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악인들에 대한 처벌을 간곡히 요구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예시가 바로 이 시다.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 

마음의 고통을 주님께 토로할 수 있다. 

언제가 되든, 그 날에도 난 주님께 기도할 것이다. 

주님이 해결해 주시길 간구하며…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가난함과 빈곤함을 굽어 살펴주셔서, 부요함과 풍족함으로 이끄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자원을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 흘려보내게 하소서. 

제가 가진 인적자원을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공유하게 하소서. 

제가 주신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오늘 하루도 인도하소서. 

건강이 필요합니다. 

건강을 읽으면 주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 부르심을 더 깊이 더 잘 알아차리고, 행동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08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아,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3 동서 남북 사방에서, 주님께서 모아들이신 사람들아, 모두 주님께 감사드려라. 

 

4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5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바른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8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9 주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에게 을 실컷 마시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셨다.

 

ESV

Let them thank the Lord for his steadfast love, for this wondrous works to the children of man!(8절)

 

주석

구속의 사랑(2절) 이 시 전체를 통해 언급되는 ‘인자하심’은 자신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여호와의 헌신적이고 변치 않으며 사랑 많은 결의를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주님의 인자하심은 그가 선택하신 이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2절). 주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광야에서 굶주리고 지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길을 잃어 헤매는 이들을 바른길로 걷게 하십니다(4-7절). 그것은 그 백성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에(6절), 주님이 신실하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절). 시인은 이러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주님을 높입니다(8절).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도 합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라는 경제적 문제, 방황과 무기력이라는 마음의 문제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부르짖음에 신실히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이 세상의 고통의 현장에 임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시편의 말씀은 달콤하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예수님에 대한 신약의 저자들의 인식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은 대적의 손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광야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도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물과 먹을 것을 공급하신다. 

우선적으로 출애굽 상황이 그려진다. 

이집트 군대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다. 

광야에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교제하셨다.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셨다. 

출애굽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시인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실 시편의 저자라고 불리는 다윗의 삶이 이런 삶이었다. 

사울이라는 대적자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먹을 물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구원하셨으며, 그러하기에 그는 찬양을 그치지 않았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도 재현된다. 

백성들을 사단의 손에서 구출하신다.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먹을 물을 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다. 

그분은 구약의 하나님을 빼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들 대신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사건이다. 

누군가는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신명기 21장에서도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사야에서 예언하기를,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셨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 53:6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래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것은 신학적 진술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아니다. 

억지로 부들부들 떨면서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십자가 위에 쏟아붓고 계신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그것은 오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확증하기 위해(로마서5:8) 십자가를 사용하셨다. 

다른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신할 뿐이었다. 

온갖 좋은 것으로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땅과 그 소산을 주고, 평화롭게 살게 해도,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길을 갈 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는 사람은 너무 드물며, 그나마 완전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모두들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아는 것에는 반나절이 걸리지 않는데, 그분이 사랑스러운 분으로 아는 데는 인생 전체가 걸려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의 최후 수단, 오랫동안 남겨 두었던 그 수단은 바로 자신이 사람들을 대신 해서 죽음으로써, 사람들이 져야할 저주와 죄의 징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은 바뀔 것이다. 

그래야 성령님은 더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성령님의 활동 환경을 우호적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강력한 작동이었다. 

십자가 덕분에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함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했다. 

십자가 덕분에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넘나들며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

성령님은 자신을 의지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기가 어려운 분이시다. 

성령님은 민감하시고 예민하신 분이시면 사람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 속에서 굳이 적극적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시며, 대리통치자였던 사람들의 위치를 귀하여 여기신다. 

성령님은 당신을 우호적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용기를 갖고 성령님을 적극적으로 초대하여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받는 새로운 존재 말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이 여기서 진실이 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의 영향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인도 받기를 즐겨한다. 

쾌락에 노예가 되지 않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그것이다. 

지식도 논쟁도 그친다. 

그분의 사랑이 남아 나를 이끄신다. 

일상의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이 눈에 들어온다. 

성령님의 섬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적인 세계의 문을 연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면 더욱 더 찬양이 깊어진다. 

선하고 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렇게 찬양을 선포한다. 

 

[오늘의 기도]

십자가에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 

저주와 진노 이전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을 저는 믿습니다. 

그 사랑에 기대어 주님께 찾아갑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람의 말보다 필요한 것이 당신의 도우심입니다.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도우심으로 채우소서. 

 

소통을 위해 말하라고 재촉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는 당신의 손길입니다. 

저를 통해 당신의 손길이 느껴지도록 인도하소서. 

 

섬세하신 성령님,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수 많은 쾌락의 유혹들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음성과 사랑에 기대고 싶습니다. 

주님,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 제 마음을 채워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22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바울은 일상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것을 권면합니다(16-18절). 그리고 성령과 예언을 굳게 붙들며, 분별력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을 이야기합니다(19-22절).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결국 기쁨과 감사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구절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암송했었다.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권면이며,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도리어 항상 기뻐하는 것,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주 비판하고 자주 문제 제기하는 것이 기독 지성인의 일이며, 책무며, 삶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각에 100%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반기를 들고 싶다. 

기독 지성인의 책무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지, 어떻게 쉬지말고 기도할 수 있을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야 한다. 

비판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문제제기 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어려운 고도의 지적, 심적 작업 아닌가!! 

 

기쁨이 사라진 문제제기, 감사가 빠진 비판이 얼마나 오래갈까. 

그것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스스로도 망가뜨린다. 

마음 속에 기쁨을 유지하고, 감사의 마음을 강화하고, 하나님께 기도의 제목을 언제나 올린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랑과 정의가 더욱 확산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욕하거나 무시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이슈와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협력할 바를 찾고, 거부할 것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좀 더 나은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한 비판, 인격을 모독하는 비판은 삼간다.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공개하지 않을 글로 정리해서 논리성을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남을 깎아 내리고, 비판의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지 않고, 인격을 모독하는 등의 관계 파괴형 비판은 금물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살면서, 문제제기가 삶의 디폴트 값이 되어 버렸다.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 결국 영향력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문제 발견형 감각과 논리 구조가 몸에 박혀 있다. 

기계처럼 반응한다. 

기쁨, 감사, 기도가 작용하지 못한다. 

사역자들 가운데도 많은 경우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설교를 하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문제 찾기 일환이다. 

 

그러니 “비판/문제제기”와 “기쁨, 감사, 기도” 사이의 모순 관계가 놓이게 되며, 둘 다를 지혜롭게 잘 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바울은 이 난제에 해답을 성령님으로 보는 것 같다. 

성령과 예언을 대뜸 들이댄다. 

성령님이 없이는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성령님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이끌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다.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라. 

피곤함이 주관하지 않도록, 기쁨과 감사가 내면에 흐르도록, 성령님께 기쁨 호수의 댐 수문을 주장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님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아름답고 멋진 모습들을 계속 묵상해야 한다. 

지식만이 아니라 더 크게 풍성한 감정의 물꼬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언 관련해서는 분별이 핵심이다. 

과연 이 예언, 즉 대언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사탄의 속임수인지, 아님 나의 욕망과 내면의 소리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이 핵심이다. 

그걸 구분할 수 있으면 성령님의 역사를 더욱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

그러면 기쁨과 감사가 찾아온다. 

더불어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 기쁨이 찾아오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님, 

도우시고 이끄시고 실마리를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 

오늘도 기쁨과 감사가 사그라드는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미지에 주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자주 생각나게 하소서.

예언의 말씀을 분별, 분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식, 알아차림, 이해하게 하소서. 

그것이 마음의 내적 기쁨을 낳고, 감사를 흐를게 하고, 기도의 끊을 더욱 붙잡게 합니다. 

부담스런 모든 시간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8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7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잠시 여러분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고자 하였고,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

19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20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NIV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19절)

 

주석

사탄의 방해(18절) 어쩌면 그곳 시의원들과의 문제 때문에 바울이 되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며 계속 그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사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한 교인들에게 그리움을 전합니다(17-18절). 덧붙여 바울이 고대하는 그날, 주님 앞에서 소망과 기쁨과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그들임을 고백합니다(19-20절).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없음에도, 바울은 그들을 묵상하며 기쁨을 고백합니다. 믿음을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바울에게 기쁨을 주었고, 내일의 기쁨을 소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가 미래의 바울에게 영광을 줄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은 내일을 향한 소망과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오늘의 묵상]

1. 방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당연히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자란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리워 진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는 책에서, 그 언어 중 하나가 함께 함이다.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이다. 

 

사랑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결국 몸을 움직여 방문하게 하고, 만나게 한다. 

특히나 사랑에 자랑스러움이 붙으면 그 열망은 더욱 커지는 법. 

바울은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 만남이 가져다 줄 시너지가 기대된다. 

성도들은 더욱 굳음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바울은 더욱 힘을 내서 사역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단은 이런 것이 싫었나 보다. 

사랑의 교제도 싫고, 믿음이 더욱 강화되어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성장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사탄이 방해를 한다. 

방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재정적인 문제일지, 도시 권력자들의 방해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일상적인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탄의 방해라고 부를 만큼의 독특하고 특별한 문제 상황이 발생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에 우연을 가장한 사탄의 방해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탄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고, 유혹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한다. 

이유도 없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교회를 박해하기도 한다. 

 

2. 여러분이야말로

바울의 기쁨과 감사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유대인의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의 기쁨은 이들로 인해 가득하다. 

도리어 동족인 유대인들 중에는 바울을 박해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현상에 대해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복음은 사람을 바꾼다. 

복음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울과 이방인들과의 사랑을 만든다. 

복음은 인종적 벽을 허문다. 

복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기쁨이 되도록 이끈다. 

 

복음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함께 꿈꾸고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 많다. 

오늘 그들이 보고 싶다.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무엇보다 학생들의 변화를 위해 기도했던 그들이 보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길… 

 

[오늘의 기도]

성도들을 사랑으로 연결시켜주시는 주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 성향은 혼자있기 좋아하는 내향형이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만남의 기회가 더 많아지도록 인도해주세요. 

 

오랜만에 만난 간사님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일로만 바라보지 않고 기쁨의 관계로 바라보도록 이끄소서. 

전국의 간사님들과 더욱 행복한 시간들로 연결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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