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06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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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주간의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2그래서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3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4둘이 함께 뛰었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7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8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10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주일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실을 전합니다(1-3). 베드로와 요한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무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예수님을 감쌌던 삼베옷과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누군가 가져갔다고 믿습니다(4-8).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러 말씀하셨고 성경에서 약속한 부활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9-10).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은 잊은 자신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까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나도 생각에만 몰두해서 주님의 말씀을 잊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새벽 달리기

 

1.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의 자기 인식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요새의 용법에는필자”, “J” 등을 사용하여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같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배워야 자세다.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규정한 사람들은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의중, , 의도에 맞춘 삶을 살아간다. 

요한은 정말 그랬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간다.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집중한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청한다. 

이게 사랑의 힘이다. 사랑받는 자의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다. 

 

2. 달리기

베드로와 요한이 달리기를 한다. 

얼마나 급한 상황인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여성들의 말에 혼비백산정신이 없다. 

뛰기 시작한다. 골목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가로지른다. 무덤이 있는 곳까지 울퉁불퉁한 돌산길을 뛰어 오른다. 

숨이 가쁘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같다. 마라톤처럼 숨을 고르면서 정신이 없다. 페이스를 조절할 없었다. 

그냥 뛰는 것이다. 자신이 있는 최고의 속도로예수님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달린다. 

 

베드로보다는 요한이 빨랐다. 나이차이? 사랑의 차이? 

하지만 요한은 무덤 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덤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베드로를 기다렸다. 

삼베가 보인다. 저건 예수님 아닌가? 어슴푸레 보이는 흰색 세마포에서 희망을 봤을 수도 있다. 아직 무덤에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문이 열린 것도 이상하지만,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정들이 보인다. 혹시 매복했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을 잡으려는 시도는 아닌가?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로마 병사들의 함정에 빠져서 예수의 시체 탈취 사건의 주범이 되는 순간, 예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있겠다싶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닫는 순간, 베드로가 도착했다. 

베드로는 생각이고 나발이고일단 무덤으로 들어간다. 그의 저돌성은 익히 알고 있던 , 충분히 그럴만한 위인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로마 병사가 있든 말든, 주변에 뭐가 있든 말든, 일단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을 헐떡이며무덤 안의 동굴의 울림은 소리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새벽의 달리기는 예수님의 제자 핵심이었던 명에게 마치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려움, 걱정, 불안 

멈출 없었던 달리기는 동굴 세마포 앞에서 산화된다. 

잊을 없는 그날 새벽의 전력질주. 

 

3. 수건과 삼베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의 몸을 싸맸던 삼베와 머릿수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돌무덤의 입구의 큰돌을 누군가가 옮겨놓았다. 시체 도둑이거나 로마 병정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시체를 싸맸던 삼베와 수건을 벗겨서 두었는가? 그것도 머릿수건은 곳에 따로 개켜 있다니 

 

7_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제자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었다. 

시체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든, 시체를 감쌌던 삼베와 수건을 풀어 놓을 리가 없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체의 옷을 벗긴다?? 

썩어가는 맨몸의 시체를 들고 옮긴다?? 

사이에 머릿수건은 쪽에 가지런히 개켜 놓는다??

이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명할 방법이 별로 없다. 

다른 방식으로 추리해야 맞다. 기존의 시체 탈취 방법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 말했지만, 마음에서의 부활이지 육체적 부활일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었다. 

성경의 기록도 믿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흘려 보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확하다. 거짓이 아니다. 

저자는 그날의 새벽 달리기부터, 무덤과 세마포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명확한 부활사건을 철저하게 믿기를 바랬다. 

그날 새벽의 제자들은 믿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니 믿을 밖에 없을 정도로 분명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제자들이 시신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는 성립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시체의 옷을 풀어헤치고 예수님의 맨몸시체를 옮길 정도의 미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빈무덤의 부활의 증거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자신의 머릿수건을 차곡차곡 개켜서 곳에 두고 나오셨다. 

돌문이 마치 자동문처럼 손만 대자마자 굴러갔다. 

이미 부활체에 어울리는 새옷을 입고 계셨다. 

그렇게 유유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이제 쇼타임이다. 진정한 왕이 되셨다.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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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숨을 헐떡이며 전력질주 하던 제자들 옆에 계셨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부활을 믿듯, 당신의 재림도 믿습니다. 
오셔서 모든 고통과 슬픔 당한 사람들을 구원하소서. 

내전 중에 있는 모든 나라를 구원하소서. 

기후위기로 지구는 병들었습니다. 지구를 구해주옵소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세마포와 머릿수건을 보여주소서. 

위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3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38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왔다.

40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41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남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려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38).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값비싼 몰향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유대의 풍속을 따라 요셉과 함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십니다(39-42).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길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례를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섬겨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죽음의 폭로

 

1. 오늘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날을 기념한다. 동시에 제주 4.3 민중항쟁을 추념한다. 우주적인 죽음이 가져다 슬픔과 국가폭력의 희생이 가져다온 슬픔이 겹치는 날이다. 수많은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인간사에 넘친다. 지도자의 욕망은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대량 학살로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를 폭로했다. 4.3 억울한 죽음들은 국가로 응집된 인간들의 죄를 폭로했다. 죽음은 진실을 폭로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 

 

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서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12제자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흠모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탄복했다. 자신의 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때문이었을까? 가족 때문이었을까? 명예였을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명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니고데모였다.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였던( 3:1) 니고데모는 영적인 궁금함으로 늦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는 말에엄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느냐 상상력 넘치는 발언을 장본인이기도 하다. 번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막지 못했음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지도 모른다. 유대 지도자로서 전체 흐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류 기득권의 주장과 과격함을 이길 없었다. 어쩔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볼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니고데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몰약과 침향 ? 분명 아무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부가 있었다. 그는 명예/지위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밤에 몰래 찾아오지 않았었나! 그의 지위는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의 지위와 명예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고, 그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3. 죽음의

 

아무리 두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들 마음에 뜨거운 뭔가를 남겼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이 결국 무고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당당함과 자신들의 비겁함이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순간 보인 하늘의 싸인이 그들의 마음속 동굴에 빛을 비추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빛이 되어 그들을 비춘다. 누구도 벗어날 없다. 빛이 들어왔다. 

 

 

4. 죽음의 폭로

 

빛은 인간의 심연을 폭로한다. 두려움, 비겁함, 합리화, 이중성 등등. 죽음의 빛이 빠르게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뜨거운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십자가의 잔상은 깊은 애도를 남기고 애도가 피를 끓게 한다. 숨겨 놨던 용기의 주위에 애도의 피가 둘린다. 결국 문이 열린다. 

 

빌라도를 찾아간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무덤을 그것도 무덤을 제공한다. 

비싼 향유를 드린다. 제자들에게 향유를 전달한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더이상 숨어지낼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온 급격한 변화였다. 

 

 

5. 자기 폭로의 시간

 

때로 강렬한 폭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숨겨놨던 마음의 이중성, 충돌 되는 욕망, 손해 같은 두려움, 누리지 못할 즐거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본다.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도, 세월호 사건 꽃들의 죽음도 우리 인간들의 한계없는 욕망을 폭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년 되새기는 것은 나의 욕망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폭로하는 과정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흑암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어떤 심연을 주님께 드러낼 것인가?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잠잠해 집니다. 

나도 모르게 폭주하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죽음이라는 영광의 앞에 노출시킵니다. 

열망/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저를 십자가 앞에 펼칩니다. 

주님의 피로 용기의 문을 열어 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더욱 정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2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28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29거기에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31유대 사람들은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시체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안식일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32그래서 병사들이 가서, 먼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다리와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나서,

33예수께 와서는, 그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았다.

34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이것은 목격자가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는 자기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여러분들도 믿게 하려고 증언한 것이다.)

36일이 이렇게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37 성경에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말씀도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69:21 참조) 신포도주를 받으십니다(28-30). 또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는 (유월절 양을 잡을 양의 뼈를 꺾지 않음, 12:46 참조)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31-33).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물과 나온 것을 기록함으로, 그가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고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12:10 참조). 십자가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묵상해봅시다.

 

——

 

 

날이 왔다. 예수님의 지난 3년간, 아니 인생 전체를 결산하는 날이 왔다. 

가열차게, 쉴새없이, 종횡무진 지난 3년을 살아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무수한 이적/기적들을 행하셨다. 

귀신도 많이 내쫓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설교와 강의도 이어졌다.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논쟁하셔야 했다. 

죽이려는 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것이다.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말씀만 하셨을까. 아니 말씀은 그것만 했다고 치더라도, 수많은 생각들과 장면들이 떠오르셨을 것이다. 세례요한과의 만남, 제자들을 삼으심, 병자/귀신들린 자들 고치심,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오천명을 먹이심, 성전정화사건, 나사로를 살리심, 마지막 만찬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난 3 아니 자신의 인생 전체가 지나갔다. 뚜벅뚜벅 날을 준비하며 살아왔다.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날이 오자,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날을 맞이했다. 

 

십자가 위의 6시간 동안,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늘의 묵상은 예수님의 생각에 닿아 있다. 

육체적 고통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자신을 찌르고 조롱하고 죽인다. 

배신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

울분, 억울한 죽음 보다 피할 없는 삼위 하나님과의 단절, 그로 인한 울분. 

육체적, 정서적, 영적 고통 모두 예수님의 머리를 채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은, 최소한 요한이 보기에, 성취였다. 

자신의 인생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지고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줄곧 추구했던 . 

오랜 기다림의 . 

가상칠언이 아닌 가상만상(십자가 위에서의 가지 생각) 영원을 품은 성취였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만들어진 드라마의 모든 떡밥이 거두어졌다.

그간의 암시, 복선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언약이 성취되었고, 약속이 지켜졌다.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28, 36, 37).  

성취를 확인한 그분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는다. 

이루었다.”(30) 

인생을 넘어 영원의 시간이 단어에 압축되었다. 

이루었다. 오랜 소망과 염원이 이루어졌다. 

 

숨을 거두는 장면엔 그의 미소가 보인다. 

사명을 완수한 , 소명을 성취한 자에게 보이는 가녀린 미소.

 

영원부터 이어온 이야기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압축된 이루었다 안식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31). 현실의 몰두가 가져 비참함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행태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거룩함을 잃어버린 자들의 최후다. 영원의 이야기를 망각한 자들의 비애다. 오랜 소망으로 영원의 비전을 마음 속에 품은 사람들만이 그래도 어렴풋이 압축된 이루었다 알아차릴 있다. 요한은 비밀을 알아차렸다. 예수님의 가녀린 미소도 간파했다. 

 

누구에게나 날이 있다. 

인생의 소명을 다하는 , 사명을 마치는 . 

나에게 날은 언제인가? 

숨이 다하는 , 나도 예수님처럼 이루었다 있을까. 

나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있을까. 

날을 위해 오늘 달려 있을까. 

새삼 다시 묻는다. 

 

우리 공동체에게 날은 언제인가? 

사명과 소명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변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공동체의 사명을 다하면 이루었다하고 해체하면 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우주와 역사에 거대하게 존재한다. 

우리 공동체도 작은 역사와 공간에 점으로 남으면 그만이다. 

이루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기독 공동체의 폐쇄는 소멸이 아니라 회생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이 되어 아름다운 은하수가 된다. 

얼마나 밝게 빛날지는 공동체가 최선을 다해 사명을 다했는지에 달렸다. 

 

오늘, 고난주간의 성금요일. 

예수님의 가상만상에 빠져있기를, 영원의 이야기에 이어져 있기를 바래본다. 

또한 나의 사명, 공동체의 사명을 다시 복기해 보길 소망한다. 

고통과 수치 속에서 왕이 되신 그분을 되새긴다. 

 

덧붙임, 예수님은 숨이 넘어가시기 전에 이미 승리를 확인하신 하다. 오랜 전투의 끝은 육체의 숨이 끊어지는 바로 찰나의 순간이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의 숨을 내쉬며 무수한 시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탄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부터 거다. 

 

——

예수님, 

십자가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각과 정서와 마음을 묵상합니다. 

영원부터 이어져 당신의 이야기에 저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의 사명과 소명을 다시 각인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01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7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18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박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19빌라도는 또한 명패도 써서, 십자가에 붙였다. 명패에는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20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도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이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

21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22빌라도는나는 것을 썼다하고 대답하였다.

23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뒤에, 그의 옷을 가져다가 몫으로 나누어서, 사람이 몫씩 차지하였다. 그리고 속옷은 이음새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통째로 것이므로

24그들은 서로 말하기를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하였다. 이는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25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있었다.

26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어머니,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27 다음에 제자에게는, 이분이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때부터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의미의골고다라는 곳에서 , 우편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17-18). 그의 죄를 알리는 명패에는유대인의 이라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19-22). 이것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던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가 알아볼 있는 언어로 표시된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음으로 인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 수난에 대한 예언( 22:18 참조) 성취됩니다(23-2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시는 ,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25-27).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십자가에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세상을 위한 사랑의 왕이십니다.

 

——

진짜 유대인의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장면은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실감나게 그렸다. 

구절 하나로도 오랫동안 머물고 묵상할 있을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사형틀을 직접 끌고 가신다. 

몸에 상처 투성이요. 머리엔 가시 면류관 자국이 선명하고, 옷은 피로 얼룩져 있다. 겉옷과 속옷 것없이 예수님의 피로 물들었다. 나중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그의 속옷을 제비 뽑아 가져갔다고 하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 왕의 피를 빨아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패를 자세히 묘사한다(19-22). 아마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보인다. 

무슨 메시지일까? 

십자가에는 죄명이 달리는 것이 상식적이다. 

The irony in John continues as the reason for the death of Jesus received its official entitlement or “notice” (titlon). Frequently persons condemned to death had their offense written on a placard and either hung on their bodies or carried before them as they were paraded to the execution site.
_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264.

사람이 여기에 이런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행위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형벌의 정당성을 확보해준다. 

사람들은 공개 처형의 끔찍함을 그의 죄를 보고 상쇄시킨다. 

 

그런데 요한이 보기에 예수님의 명패(죄명)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죄명과 너무 다르다. 

유대인의 나사렛 사람 예수”, 이것은 죄명이라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유대인의 삶을 애정했던 예수님,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나눠주셨던 예수님,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했던 예수님. 그래서 많은 민중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대하지 않았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누가복음 19:38) 이라고 노래를 불렀다. 과연 죄패로 이런 민중들을 설득할 있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고, 민중들을 격동케 하는 행동 아닌가? 사실 비정치적인 행위로 비춰진다. 

 

게다가 죄패가 맘에 안들었는지, 대제사장들은 수정을 요구했다. ‘자칭이라는 말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유대 민중들이 그를 임금으로 왕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다고 애써 부인하는 자세다. 만약 빌라도가 INRI(라틴어: IESVS·NAZARENVS·REX·IVDÆORVM) 한국어로 번역하면 "유다인들의 임금나사렛 사람 예수이란 뜻을 가진 천주교의 두문자어이다.) 쓰려고 한다면, 그것도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 유대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병정들까지도 죄패를 읽게 하려고 한다면(20), 결코 유대인의 왕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같다. 대제사장이 원했던 죄패는 아마도 반역자, 신성 모독자, 사기꾼, 반역시위 주동자, 민심 소란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스스로 말했던 ,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던 말을 죄패에 썼다. 제사장들의 요청도 거부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 손에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그는 제사장들의 요구를 들어 마음이 없었다. 뭐에 홀렸는지, 빌라도는 유대 민중들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 그것을 그대로 죄패에 적었다. 그리고 죄패는 예수님의 영광의 명패 되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의 왕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날은 죄인의 처형식이 아니라 왕의 대관식이었다고 말이다. 맞는 같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벌거벗겨진 채로, 왕의 대관식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왕의 대관식이 이토록 처참하고 부끄러울 있는가. 과연 대관식을 영광의 순간이라고 부를 있는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요한은 십자가를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왕이 부끄럽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게 우주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대관식이었다. 

 

빌라도는 부지불식간에, 어찌저찌하다가 결국 예수님의 왕의 대관식을 준비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모든 민중들이 함께 인정하는 왕이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단, ,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를 이루신다. 승리가 왕의 대관식이 것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에서처럼 말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왕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분이 왕이 되신 것이다. 진짜 말이다. 자칭 왕이 아니라 우주가 인정할 밖에 없는 왕이 되신 것이다. 

 

왕을 찬양한다. 

수치로 영광의 관을 쓰셨다. 

고통으로 왕좌에 오르셨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셨다. 

그의 놀라운 너무나 창의적인 지혜를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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