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 31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2병정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3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4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5예수가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6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하고 말하였다.

7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9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

12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하고 외쳤다.

13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

14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15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16이리하여 이제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님은 군인들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과 자색 옷이 입혀져 뺨을 맞으며 수치와 조롱을 당하십니다(1-3절). 빌라도가 여전히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상처입고 찢긴 예수님을 데려오지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4-6절).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즉 그들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외칩니다(7, 12절).

 

빌라도는 백성들의 외침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줍니다(12-16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말씀하십니다(11절). 온 세상의 참된 왕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

차가운 리토스트론

 

눈물겹다. 

빌라도의 노력이 가상하다. 참 애쓰고 있다. 몇 번이나 예수님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있다. 아니 예수님의 무죄 방면을 힘쓰고 있다.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때리라고 허용한 것은, 이제보니 방면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 정도 했으니 사형하라는 둥, 십자가에 달라는 둥, 너무 극단적인 조치를 요구하지 말라는 임기응변이었다. 이 모든 것인 유월절 전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직결심판을 내릴 권한을 가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는가! 총독이라 하더라도, 아침에 잡혀온 죄수에게 몇 시간 만에 사형을 언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예수에 대한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예수를 좋아한다는 것도, 예수가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 유대인의 왕을 반나절 만에 재판하고 사형을 언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쫌 때린 뒤에, ‘그래도 너희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느냐’라는 메시지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만하면 됐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기득권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6절).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는 사라지게 해야 한다. 더이상 남겨 둘 수 없다. 그들의 외침은 여전히 들리는 듯 하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법적/양심적으로 도저히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할 테면 여러분들이 하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었단 말이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들먹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예수님이 한 말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이 말은 지식인들 사이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단어였을 것이다. 만약 당시에 신문이 있었다면, 대서특필 뿐 아니라 모든 논설위원들이 논평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장…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기사를 쏟아내고,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몇날 며칠을 보냈을 수도 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인가?” 기사가 쏟아질 때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확산 될때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분노했다. 욕했다. 죽이고 싶어했다. 

 

빌라도는 그 정도의 민감함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으며, 민중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인물, 가끔 기이한 행적, 마술 같은 기적을 몰고 다니는 존재. 핵심은 민중들이 따른다는 점,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입에서 죄의 근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주장’에 있다면, 빌라도는 더욱 궁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살렸다는 참모들의 보고를 들은 빌라도는 더욱 의문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궁금해 미치겠다. 어떡해서든 자신은 피를 묻히기 싫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진짜면? 진짜 신의 아들이면?

 

빌라도는 리토스트론에 앉기가 싫었다. 너무 차가웠다. 민중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님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설 것인가? 유대인의 왕을 진짜 죽이면 민중 소요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종교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면 그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는 건 아닌가? 등등 생각이 엄청 복잡했을 것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궁금함도 더했다. 종교적인 질문도 가세했다. 여튼 리토스트론은 차가웠다. 

 

빌라도가 잘했다 잘 못했다 평가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빌라도가 처한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온갖 딜레마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누구를 위할 것인가? 누구를 이롭게 할 것인가? 

무엇이 진정 나와 내 가족과 내 회사와 내 교회를 위한 것인가? 

온갖 질문들이 떠돌아 다닌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복잡한데, 리더십을 발휘해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말 나의 생각과 관점이 옳고 바르고 적절한 것인가? 

 

딜레마 앞에 매일 선다. 

그러기에 그 딜레마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죄로 인해 모든 진실이 왜곡되어 보인다. 만화경 속에 갇혀 있다. 죄로 인해 판단력이 흐리다. 

그러기에 선택의 기로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난 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난 그 리토스트론에 앉고 싶지 않다. 

 

 

 

 

2021 03 30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8사람들이 가야바의 집에서 총독 관저로 예수를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하여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9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당신들은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30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31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유대 사람들이우리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2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암시하여 주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33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34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것이오?”

35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36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7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8빌라도가 예수께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아와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39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40그들은 다시 소리로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유월절을 앞둔 유대인들은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서 빌라도의 관저 밖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며 그를 사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합니다(28-32).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들로 더렵혀져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로마 정부에 위협이 만큼 죽일 만한 죄가 있는지를 심문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그럴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33-38).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기 위해 바라바라는 강도와 예수님 누구를 놓아줄지 묻지만 사람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39-40). 사람들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 나라의 왕보다 폭력을 행하는 강도를 선호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초라해진 예수보다 힘을 가진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따릅니다. 나의 마음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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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셨다. 

사실 이렇게 명료하게 예수님 스스로 왕이라고 하셨는지 몰랐다. 

그동안 그분이 우리의 , 나의 주라고 그렇게 찬양도 하고 고백도 했지만,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왕이라고 장면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떡하니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왕은 세상의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면, 부하들도 있어야 하고, 호위병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해줄 병사가 없었다. 대신 싸워줄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스스로 싸움을 멀리하라 했다. 베드로의 본능적 대응을 막으셨다. 칼을 가지고 다니는 칼로 망한다(26:52) 하셨다. 그분은 싸움을 원치 않으셨다. 대신 묵묵히 제사장의 부하들과 로마의 병사들에 몸을 맡기셨다. 이렇듯 그분은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셨다. 

 

하지만, 그러기에 예수님은 역사와 우주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세상에 속한 왕은 영토와 시간의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역사와 모든 공간의 왕이 되셨다. 그분을 따르기로 사람들의 영원한 왕이 되신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대범하게 자신이 왕이라고 천명하신 것이 눈에 선하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무장 투쟁을 하신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권력을 찬탈할 마음도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저 전혀 다른 레벨의 왕이셨고, 그걸 주장하셨던 뿐이었다. 죄를 찾아 낸다면 아마도 당시 종교 권력자들을 비판했다는 ,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의 장사를 방해했다는 점일 뿐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죽일 죄였는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예수님 당신의 천명이 그저 감사하다. 

그분은 나의 왕이시다. 세상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왕이시다. 

세상의 통치 원리와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통치의 왕이시다. 

왕되신 예수님을 다시 왕이라고, 나의 주님이시라고,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라고 고백하고 싶다 

 

고난주간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고난을 당하셨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거짓(위선) 사람들에게 고초를 당하셨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왕은 때로 세상에서 이런 고난과 고초를 당한다. 

그것은 왕을 따르는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자문하게 된다. 

나는 왕을 따라 고난과 고초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안정을 추구하며, 편안함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분과 함께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이 들었다고 안주할 생각인가? 

호수에 돌을 던져본다. 

 

 

2021 03 26 금요일

예수님이 잡히시다 

18:1-11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2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곳을 알고 있었다.

3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5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내가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7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8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9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0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11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겟세마네)으로 가십니다. 유다는 횃불과 무기를 군사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기위해 그곳으로 옵니다(1-3). 잡히시는 상황이지만 주님은누구를 찾느냐?” 묻고내가 사람이다”(I am he) 답하십니다. 놀란 병사들은 뒤로 물러나 엎드립니다(4-6). “나는 ~이다”(I am), “사람들의 엎드림 요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도록 내어주시며 자신의 제자들이 물러갈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잃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17:12)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시며,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십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며 묵상합시다.

 

——

 

1. 일부러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들어가신다. 죽음의 골짜기, 십자가로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은 여러번 찾았던 , 제자들이 알던 , 으레 예루살렘으로 오면 가는 곳이었던 모양이다(2). 

이날이 유다가 자신을 날이라는 알았다면,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면, 다른 곳에 가셨을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그저 있어도 되는 일이다. 굳이일부러 

예수님은 아셨다.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알고 계셨다(4). 

예수님은 자신이 마셔야 잔을 마시기로 결정하셨다. 게세마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자기부인의 전형을 보인 기도였다. 

 

이렇게 예수님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십자가로 향하신다.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기 위해, 죄와 죽음의 법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돌진하신다. 

거침없는 행보가 부담스럽지만, 또한 필요한 일이었다. 

 

2. 놀라 자빠짐

오늘 본문의 특이점은 6절이다. 

예수를 잡으러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내가 사람이다라고 말씀 하시는 순간,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물리적, 정신적 충격을 받아 뒤로 흠짓 물러나더니 이내 땅에 쓰러지고 만다. 

장면은 그동안 기억 속에 각인되지 않았었다.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내겐 충격이다. 

 

예수님의 신적 자기 표현에 물리적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런 물리적 충격을 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예수님을 잡으러 사람도 아니라, 굳이 따진다면 제자들의 무리 속에 사람 하나이겠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노출되고 싶다. 

그분의 말씀에 몸과 마음이 붕떴다고 떨어져서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면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순간이 아니다. 

일생에 있을까 말까 순간을 그린다.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사랑과 자비에 정신적, 물리적 충격을 받고 싶다.

 

이런 마음이 어찌보면, 종교적 심성에 속한 것이리라. 

위대하고 절재적인 존재에게 완전히 굴복해 보고 싶은 마음, 무조건적인 의존의 마음. 

 

이런 마음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런 종교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상식을 파괴하고, 성경의 진리를 오히려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신적 대리인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이유를 댄다. 

맞는 말이다. 무분별한 종교성이 원래의 기독교를 타락시킨다. 

 

그러나, 신적인 위엄 앞에 노출되었던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왜곡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이, 나약한 존재로서 고통받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그분의 위엄과 광대함에 머리와 가슴에 충격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은 그대로 아름다운 위치에 두자. 경험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하기에, 종교적인 경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지만, 오늘도 충격의 장면이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인간의 굳은 마음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변화산에서 보았던 예수님, 게세마네에서 보았던 예수님을 또한 생생히 경험하고 싶다. 

 

과학, 기술발전, 투명성, 민주화된 개인이런 단어들이 주는 비신비화, 비신화화 

속에서 줄기 신비로운 빛을 보는 경험을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은혜의 삶이다.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0“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아버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분을 믿게 사람들(교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20). 그들이 하나 주님 안에 거하며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게 것입니다(2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것입니다(2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것입니다(25-26).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가장 강력히 증거 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 4:3) 힘써 지켜가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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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Prayer

 

본문에 대한 반응, 감탄사였다. 미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기도가 얼마나 미친 기도였는지 실감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초월적이기까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도의 이상에 반했었다. 

기도처럼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살아가자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것이라는 진리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일단 우리가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너무 다양하며 또한 만의 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셋은 세상 사람들이 알게 것에 흥분한 이유가 바로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라는 나의 야망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지 때문에 점점 말씀이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 사역도 하고 있다. 하나됨의 정도와 수준도 수정되었고, 속도와 범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됨을 붙들고 살고 있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하나됨을 포기했다. 더욱 다양해도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26)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시에 감지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정치적 지향이 어찌 똑같을 있단 말인가? 사역의 방법론과 방식이 어떻게 같을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 소명이 다른데 방향을 어찌 맞추는가? 하지만, 한가지 빼지 말아야 공통 분모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이요, 십자가로의 사랑이다. 또한 부활로의 사랑이며 영광으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의 결과와 행동은 희생과 섬김 그리고 영광과 통치, 이렇게 분화되고 통합된다. 

 

사랑이 나와 우리에게 있는가? 사랑을 믿고, 인식하고, 따르고 있는가? 공통분모를 놓치기가 싫다. 누군가 이것도 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요. 하나됨을 이루는 아교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다(26). 

 

너무 보편적으로 추출했다고 보는가? 맞다. 보편과 상황은 주고 받는 것이다. 왔다갔다한다. 보편 없는 상황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상황없는 보편은 전체주의 절대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됨의 보편이다. 보편을 나의 상황, 우리 공동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것 나름의 깊이 있는 묵상과 사색의 결과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보편을 추구한다. 사랑이 결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그저 멀끔히 수용하고 싶지 않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사회개혁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하나님의 사랑없이 환경운동도 있고, 사회개혁운동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보편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기본이요. 보편이요. 하나됨의 아교다. 그래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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