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20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57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5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9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6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61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The Message

Jesus was curt: “Are you ready to rough it? We’re not staying in the best inns, you know.”(58절)

 

주석

59-60절. 예수님은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에 대한 헌신은 가정에 대한 헌신을 넘어선다고 급진적으로 묘사하신다. 이 말씀은 사실상 모든 고대의 가치 체계에 위배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고대의 가치 체계는 친족의 장례를 요구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스스로 따르겠다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12제자들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수많은 부르심이 있었지만, 누가는 대표적인 세 가지 예시를 든다. 

 

1. 따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거처를 책임져 줄 수 없는 사람임을 밝힌다. 

여우도 새도 거주할 장소가 있는데, 예수님은 허구한 날 여행이다.

정처가 없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한다. 

그래도 따라오겠는가? 

때로 밥도 제대로 못먹고 때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여러 위험에 놓여 있음에도 따라 오겠는가?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알았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브리스가와 아굴라, 디모데, 바나바…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이런 정처 없는 삶을 살았다. 

주께서 부르시면 가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따르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잘 왔다" 이렇게만 말할 것 같지만, 예수님은 현실을 말해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열정을 품는 사람들이 항상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님은 예수 따르미의 삶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신다. 

 

2. 나를 따르라.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먼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순서요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건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패륜적 명령이다. 

누가도 이 명령이 얼마나 자극적이었으면, 이렇게 기록에 남겼을까? 

예수님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리가 없다. 

예수님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제안하신다. 

누구에게는 현실을 살펴보라고 한다. 

누구에게는 빨리 따라오라고 하신다. 

누구에게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보라고 하신다. 

누구에게는 알리지 말라 하신다. 

누구에게는 온 동네에 소문 내도록 허락하신다. 

천편일률적이지 안다. 

케바케다. 

장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지금 “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때로 이런 급진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다. 

 

때로 예수님은 선교사로 나가라고 하신다. 

때로 예수님은 목회를 그만두하고 하신다. 

때로 예수님은 이 교회를 그만두고 저 교회로 이직하라고 하신다. 

이게 예수님의 방식이다. 

 

3. 나를 따르라. 

세 번째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따라 오라고 명령하신다. 

그는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라오겠다고 한다. 

이 정도도 못 기다려주시는가? 

그저 "좋다, 그렇게 하렴"이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은 가혹하다. 

이 사람이 언제 안 따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인사만 하고 오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12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따르라는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었다.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아버지를 놔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물론 최종적으로 예수님과의 여행에 합류했던 것은 조금 후에 일이긴 하지만, 최소한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할 때는 매우 즉각적으로 따라 나섰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명령을 생각할 때, 그분의 요청에 대해 조금이라도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 번민이 많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혹은 예수님은 지금 이 사람의 속 마음을 간파했을 수도 있다. 

따르겠다고 앞에서는 말하지만, 가족들을 만난다는 핑계로 일단 지금 이 자리를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려고 하지만, 이 사람은 주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앞으로 뻗어나가야 하지만, 이 사람은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나가는 삶, 그 가운데 자신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데, 자꾸 주저하는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는 않다. 

 

각 사람마다 각 특징대로 부르신다.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나를 부르신 방식과 다른 사람을 부르신 방식이 다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역에 있어 중요하다. 

그 사람의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데, 그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시는데, 여전히 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다. 

참 복이 있다면 부르심의 현장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현장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역하는 것이다. 

서로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서로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참 복은 그분의 부르심에 자리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살아간다. 

때로는 슬픈 일도 있고, 고통스런 순간도 있지만 불러주신 분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어디로 부르시고 계신가? 

 

[오늘의 기도]

저를 부르신 주님, 

그 부르심에 맞게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부르심의 방향을 확인해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그 방향을 알게 해 주세요. 

저 혼자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해주세요. 

객관적인 부르심의 요소를 발견하게 하소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의 부르심의 요소도 발견하게 하소서. 

 

저는 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나의 욕심과 욕망으로 살아가던 때와 비교해서 

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더 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고통스러워도 사랑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계속 예수 따르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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